오늘날에도 문제시 되는 대구경북인들은 아주 대놓고 역사에도 똥구라를 쳤다. 더해서 그간 한국인 기성세대들이 가졌던 믿음까지 더하면 말이다.
어쩌면 신라는 문명화된 지역이 비문명과 싸우는 중국사서에서 한족과 흉노나 몽골인들이 투쟁하는 양식을 빌려서 서사를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정작 신라가 북진해서 쳐 들어간 지역은 함흥평야일대로 명백하게 여진족 농민이나 지주들이 이미 경작하고 있던 지역이다.
따라서 그 것은 한갖 침략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민족 기성세대들이 고구려를 반농반목이라고 믿거나 유목국가라고 믿게된 것조차도 어쩌면 기성의 신라와 경북지역 엘리트들의 프레임이다.
정작 20세기에 한국인들이 간도나 만주국으로 이주해갔을 때에 동북3성의 기득권도 만주족 지주들이었고, 만주족 역시 지주들이 중심이 된 농경민이다.
다만 야인들에게 쌀을 매개로 밥값을 하게끔해서 용병으로 부릴 수 있던 것이다.
사르후 전투에서도 여느 유럽국가와 마찬가지로 누르하치의 가장 중요한 친척을 포함한 여느 엘리트들이 기병대를 구성하였을 뿐이다. 왜냐면 당시에는 불분명한 정세와 여진족들이 가진 경제력의 한계로 몽골계 투르코폴 용병들을 마구 뽑는 것에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데 신라는 여진족들이 경작하는 땅을 쌩으로 후렸을 뿐 아니라 그러한 것을 반도의 통일이라는 명제로 사후에 정당화하였다.
위의 프레임에 따라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 삼국이라는 프레임이다.
반면에 축출당한 여진족들은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았음에 분명하다. 따라서 그들이 후일에 청조를 통해서 정권을 잡았을 때에 정계비를 통해서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으로는 넘어오지 않을 것을 주문한 것이다. 그렇게 이해해야지 전후관계가 어느 정도 맞는 것이다.
그리고, 경북계 한국인들에게 허구헌날 뚜들겨 맞던 함경도 지역에서 이성계 뿐 아니라 김일성도 태어났다.
이성계는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켰지만 김일성은 같은 시도를 했다가 실패하자 현재의 북한일대의 왕으로 만족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애초에 그러한 은원은 진흥왕이라는 놈이 경상도 군세를 이끌고 함흥평야일대로 침공한 것 때문에 발생한 균열인 것이고, 그 균열의 결과로 현대의 한반도는 나눠져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라는 놈은 신라의 이사금 밑에서 용병을 뛰었을 뿐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고구려가 신라가 침략한 적이 있냐는 명제 자체가 미약한 것이다.
본인 역시도 경상도인이지만 바로 전대까지만 하더라도 경상도인 뿐 아니라 한민족 전체에게서 자식이라는 것은 상황을 객관화하고, 비판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가 가졌던 관점들을 편견까지도 그대로 유습하는 것이었고, 그러한 지점들이 한국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믿음들이 역사에 특히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한 지점들을 바로잡는다면 정작 삼국쟁패라는 것은 없었으며, 조령이남의 경상도지역으로 백제나 고구려의 외세군대가 진격했다는 사례는 매우 드문 편이다.
게다가 백제와 신라의 충돌들은 국가대 국가의 충돌보다는 강대국과 약소국이나 심지어 주종관계를 맺고 있는 세력간의 영주와 왕의 다툼에 훨씬 가까운 것이다.
예를 들면 백제의 군사 5천 정도가 신라의 여왕이 있는 곳으로 난입했다는 것은 풀스케일의 국가간 대전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삼국정립이라는 것은 어쩌면 끽해야 당나라가 지정한 조공국인 tributary 가 한반도와 동북3성에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3개국에 지정되었다는 지극히 중국중심의 구분이지 그 세나라가 대등한 입장을 가진 것은 전혀 아니었다.
상황을 재해석하자면 함경도로의 북진전쟁을 일으킨 것도, 한수유역으로 침공을 개시한 전쟁을 일으킨 것도 모조리 신라이고, 고구려는 그 것을 막기에 급급하였다.
정작 고구려는 온달이라는 놈을 통해서 반격을 통해서 신라 공세에 노출되는 상황을 타개하려고 한 적은 있었지만 정작 온달의 군세는 경상도에는 닿지도 못하고 강원도 영월이나 어딘가에서 전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기성세대가 물려준 편견이 여진족은 반농반목이다 따위인데, 정작 여진족 국가인 금나라는 맹안모극제를 바탕으로 여진족 정주민들을 징병하는 군제를 가졌을 뿐이고, 심지어 여진족 군세내에서 몽골=타타르나 부리야트나 퉁구스카 야만족들이 실제로 다수였나는 것도 사실이라고 하기 어려운 논거이다.
여느 정주국가와 마찬가지로 여진족 군대의 태반은 여진족 출신 농민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끽해야 몽골계 용병들의 존재로 인해서 기보비율을 여느 반도나 중국군대와는 다르게 조금 높게 잡을 수 있었던 것 정도 가지고 오지게 과장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