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으로 생각될 수도 있으나, 현지 지배권에 관한한 왕의 통치권을 존중한다. 왕은 그의 권력을 제한없이 실행한다. 조정 위원회는 단지 자문 기구에 물과하다. 시나, 마을, 섬을 소유한 봉건 지주는 없다. 부유한 사람은 농장이나 소작을 주고 수입을 얻는다. 그들 중 일부는 2000-3000 소작을 가진 이도 있다. 왕에게서 섬이나 땅을 대부받은 사람도 있으나 죽으면 바로 왕에게 반환된다.
말그대로 조선은 오늘날의 김씨왕조와도 같은 절대왕정이고, 봉건 지주의 성립을 일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에는 봉건 지주가 사회의 근간이 된 봉건 사회이고, 신라와 가야또한 그러한 사회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신라하대의 참상이라고 하는 기사들조차도 고려조에 왕권이 강화된 사회적 배경에 의해서 신라를 비판한 것인데, 신라에서 봉건 지주들이 성주나 장군(=쇼군)으로 칭할 수 있던 것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즉, 신라왕조는 경주일대만 직할통치했지, 나머지 영토에 대해서는 봉건 지주들이 성립해서 기득권을 가진 것을 용인해 주었다. 이 것이 조선과 고려와 신라의 가장 큰 차이이다.
게다가 봉건제는 패러다임이 전제왕조와는 완전히 상이해서, 봉건 지주들과 왕실사이에 서열이 있어야 한다는 예법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영국섬에서 랭카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과 플랜태저넷 가문 간에 서열이 있다는 생각은 완전히 넌센스인 것이다. 특히 통혼으로 대등한 사돈가문인 경우가 실질적이었기 때문에 그 것들은 기술상으로도 완전히 대등하게 언급될 것이다. 특히 유럽의 봉건지주들의 집합적인 협의체라고 할 수 있는 테니스트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완전한 대등한 협력자였던 것이다.
그러한 부분에서 백제와 신라는 당연히 동급으로 언질될 수 밖에 없는 것은 봉건제라고 하는 시대의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즉, 체제가 바뀐 시대적 상황에 의해서 이해되지 못한 부분들은 엉터리로 곡해되었다. 서동요의 논지대로 백제왕들이 신라공주인 선화공주의 자손들이었다면 의자왕과 김춘추 사이에는 동항렬의 왕위계승서열권자라는 관점이 성립한다.
https://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3
이건 가장 최근 기사인데, 의자왕이 사탁왕후소생이라는 기존 설과 다르게 정작 일본서기에 의하면 사타왕후소생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왕비의 소생인 의자왕이 늦게야 세자가 되었고, 정작 사탁왕후는 되려 아들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의자왕에게 쫓겨났기 때문에 의자왕은 선화공주의 소생일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의자왕과 김춘추는 백제와 신라의 국가대 국가의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 봉건제이던 신라사회내에서 왕위계승전쟁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 소설 대망을 보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마쓰다이라 가문의 이야기를 보면 그 집안에는 본래 장자가 따로 있었지만 외간여자와 사통을 한 탓에 계승서열에서 멀어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비인가 할배가 가독을 물려받았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비슷한 논거로 김춘추의 할배였던 진지왕이 쫓겨나는 내용이 있다.
아마도 후대의 유교 사관에 의해서 진지왕이 계승에서 멀어진 것을 황음무도. 그러니까 유흥탓이라는 식으로 해석한 것 같은데, 정작 일본사와 비교했을 때에 당시의 봉건사회에서는 유럽의 테니스트리와 마찬가지로 평민과의 결혼을 엄금하고 있었고, 그러할 경우에는 계승서열에서 삭탈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왕으로 이미 즉위한 상황에서도 화백회의에 의해서 축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사랑을 위해서 왕위를 포기했다는 영국의 에드워드 8세 마냥 말이다.
이러한 것에서부터 고려조나 조선조가 기술한 신라대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의 한계가 보이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신라의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되려 오늘날의 유럽왕정들의 역사가 신라사의 미싱 퍼즐을 리컨스트럭트 하는 것에 도움이 된다. 일본 역사와 함께 말이다.
의자왕과 김춘추는 모계서열도 인정해주던 당시의 룰에 따라서 왕위계승을 놓고 다투는 처지가 되었는데, 둘 다 핸디캡이 있었다. 김춘추는 할배였던 진지왕이 귀족이 아닌 여염집 여자와 사통해서 낳았던 씨였고, 반면에 의자왕은 모계와 부계는 모두 귀족출신이 맞았지만 의자왕에게 엄청 많았다는 아들들은 어쩌면 증명못할 신분출신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로 영국은 1980년대까지도 왕위계승서열자와 평민의 혼일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 결과 찰스 왕세자라는 놈은 스펜서가문의 다이애나 스펜서와 결혼하였는데, 정작 아들대에 와서는 평민출신 여자인 케이트 미들턴과 결혼하면서도 계승서열을 유지해주는 변화가 발생하였다. 무려 영국 왕실의 역사 900년 만에 말이다.
그리고, 상기한 가설을 이용한다면 어째서 신라하대에는 성골이 사라지게 되는가라는 역사학계의 숙제에 대해서도 대답을 할 수 있게 된다.
그 대답은 성골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귀족끼리만 결혼한 씨들만 왕이 될 수 있는 법도가 사라진 것이다. 김춘추와 의자왕의 대에 와서 말이다.
당시에 유력한 왕위계승권자였던 김춘추와 의자왕은 아마도 둘 모두 평민의 씨가 섞였거나 혹은 자손들은 모계가 평민인 문제가 발생하였다. 어쩌면 그러한 문제에 의해서 김춘추의 딸이 의자왕에 의해서 교살당하였다. 김춘추의 딸의 남편은 당시에 대야성주로 임명된 또한 유서깊은 가문 출신이었는데, 모계와 부계를 모두 인정하던 신라의 법도상 김춘추에게 가장 큰 어드밴티지는 김춘추의 사위가 차기왕이 된다면 평민씨를 받아들인 것은 일시적이고, 성골의 권위가 다시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지점이 김춘추에게 가장 큰 명분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후대의 사가들이 우긴 것과 다르게 신라는 결코 부자세습사회가 아니며 그 것은 블루 블러드끼리만 결합하는 테니스트리를 이루고 있는 씨족세습의 부분집합에서 왕의 왕자가 귀족여자와 결혼해서 정통성 있는 적자를 생산하고 있다면 별다른 이변없이 부자세습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는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 소지왕에서 지증왕으로 갈 때에도 갈 때에도 상기한 동기에 의한 점프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김춘추의 아들들은 모비종모법과 같은 취지에 의하면 결코 신라의 개국씨족들 부류에 속하지 않은 가야계 김유신의 여동생의 아들이 되기 때문에 그들은 그냥 평민자손으로 간주되어야 할 터였다. 그러나 김춘추의 딸은 조금 예외적인 상황으로 남편의 성분만 확실하다면 김춘추의 외손자는 백두혈통순종으로 간주될 수 있는 꼬인 족보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러한 부분이 왕위계승에 결정적 부분이 될 수 있는 지점을 깨달은 의자왕은 봉건영주들간의 싸움으로 위장해서 김춘추의 딸과 사위를 교살해버렸다. 그러나 정작 그러한 파렴치한 행동으로부터 김춘추의 계승이 확정되었다.
여기서 깨달아야 하는 부분은 백제의 완전한 독자국가가 아니면 단지 한반도 남부의 봉건지주세력이었다는 점이고, 상황에 따라서는 신라의 제후로 간주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작 삼국은 사라지게 되고, 고구려와 신라간의 투쟁에서만 신라가 자꾸만 고구려의 땅을 떼어먹는 구도였다는 결론이 도출되게 된다.
여기서 고구려는 닥치고 한국 역사라는 관점까지 버리게 되면 고구려는 여진계 야인들의 나라이고, 신라는 정주민인 한국인들의 나라인데, 농경사회가 야만족들의 땅을 프론티어 삼아서 잠식해가듯이 정주사회인 신라문명이 팽창하면서 자꾸만 북진하면서 고구려 야인들의 땅을 프론티어 삼어서 편입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정주문명이 야인들의 땅을 빼앗고는 촌락과 농경지로 취락을 만들고, 경작을 하고는 다시 인구팽창이 일어나는만큼 야인들이 가진 땅들을 또 빼았고, 정착촌을 만들고, 정주민들이 야인들의 땅을 죄다 먹어버리는 전형적인 과정이 되려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의 본질이었지 않냐고 보인다는 것이다.
즉, 국가와 국가의 대결이라는 것을 상정하는 것 자체가 반도나 중국, 그리고 동북3성 일대의 정주화가 확고해진 매우 후대의 관점이라는 것이다.
정작 실제로는 당대의 신라는 오늘날의 강릉인 하슬라일대의 야인들을 정복해서는 마치 미국인들이 아메리칸 인디오들을 몰아내고, 땅을 빼았은 것처럼 프론티어로 확장하고 있던 매우 신생 문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그러한 신라의 팽창에 대해서 별반 뾰족한 수를 가질 수 없었던 5부제 부족공동체를 근간으로 한 나라였고 말이다.
정작 국가와 국가같의 전쟁이 일어나려면 그 것은 관료제와 상비군과 행정시스템을 필요로 하는데, 정작 삼국시대의 행정문서도 몇 개 전해지지 않는 상황에서 도대체 뭘 근거로 삼국이 정립해서는 국가대 국가로 맞붙었다고 할 것이냐는 지점에 대해서 잘 생각해야 된단 것이다.
따라서 바로 그 부족공동체 국가가 신라를 깔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것이 끽해야 동시베리아의 몽골계(=몽골과 말갈을 같은 말이라고 봄)인 부리야트(=부여)계나 꼬셔서는 우리 저 신라 같이 슈킹하자 그러고 나서는 니가 그쪽의 지배자가 되게 해줄께 뭐 요런 식으로 말갈족 추장세력들을 어떻게 해서건 끌어들이려고 한 시도가 소위 고구려가 말갈과 백제를 끌어들여서 신라를 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말갈과 백제가 그러한 고구려의 proposition을 받아들였다는 증거는 그닥 없는 편이다. 신라정복도 좋지만 목숨은 소중한 거니까 그리고 보나마나 진짜 운 좋게 신라를 박살낸다쳐도 누가 전리품을 더 많이 가질 것이가의 문제에 봉착할 것이 분명해서야 말이다.
즉 그 것은 판세가 아니라 단지 고구려의 설레발 외교일 뿐이고, 정작 말갈인이나 백제인이 그 외교에 호응했다는 증거는 그다지 존재하지 않는다.
신라가 말갈이라고도 하는 몽골계의 부리야트들로부터 실제로 군사캠페인의 대상이 되었냐는 팩트체크와 현실적인 부분에서는 그러한 양상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은 커녕 이국조차도 제대로 성립되지 않았다. 되려 현실은 북상하는 정주민인 신라인과 땅을 뺐기고 복속되는 처지인 여진계 고구려인의 관계만 존재했을 뿐이다.
고구려는 분명히 주변 세력들을 어떻게든 꼬셔서 북상해오는 골칫덩이인 신라를 견제하도록 할 공산이었지만 실제로는 그게 되진 않았다는 것이다.
고구려: 야 말갈아 우리 신라같이 쳐 들어가서 신라멸망시키고, 땅이랑 노예들 N빵하자.
말갈: 야 니덜 신라한테 위협받는다고 신라랑 싸움에서 우리보고 총알받이 해 달라는거냐? 응, 안 가. 안 간다고 이거사.
요게 현실이었단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고구려가 백제를 꼬시는 것도 실제로 공동군사작전으로 이어진 것은 단 한 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중국 사서의 내용들은 정세가 아니라 단지 외교를 그렇게 한다는 것으로 훨씬 축소해서 생각해야 될 문제란 것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미국은 주기적으로 미국의 무기산업을 재고를 떨이하고, 자원을 소진하면서 고용을 창출하고, 화폐수요를 창출하기 위해서 전쟁을 치러 왔고, 북한에 대해서도 침공하기를 원하는 세력이 있지만 정작 한국이나 일본이 그에 대해서 호응하고 있냐는 문제는 전혀 별개의 문제인 것과 똑같은 것이다.
요컨데, 말갈의 힘을 빌려서 신라를 견제하고, 백제도 우군화하면서 삼국의 구도가 정립되게 한다는 것은 고구려의 희망사항이었고, 삼국구도란 것은 정작 성립하지 않았고, 백제세력은 어쩌면 그냥 전주와 익산일대에서 봉건지주로 행사할 수 있는 정도만 원했을 뿐이고, 말갈 역시도 승패가 그닥 불분명한 고구려주도의 캠페인에 동참하고 싶어하는 야인들은 별반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후삼국도 거짓인 것이 정작 당시에 익산의 유력세력이던 견훤의 세력은 신라왕조를 지지해서는 당시에 고려세력이 경상도로 난입하자 상주와 안동에서 그들을 저지하였다.
어쩌면 애초에 삼국이라는 것은 신라와 후백제를 침공해온 고려계 오랑캐 새끼덜이 서남부 한인들과 동남부 한인들을 이간질하는 이이제이의 관점에서 중세 이후에 대두된 것이고, 그들의 하수인이던 김부식이라는 놈이 엉터리로 짜맞춘 것이다.
정작 견훤은 근거지가 백제왕궁과 사택지가 존재하던 바로 그 지역 출신임에 미루어 볼 때에 어쩌면 성왕과 선화공주나 그들의 방계들의 후예인 직계 혹은 방계인 오랜 익산지역의 유력자집안 출신이었을 것이고, 그는 신라와 대립한 것이 아니라 신라왕조를 지지했기 때문에 후삼국론대립론도 모두 허구이다.
되려 남조에 대한 투르크들의 침략을 고려하면 당나라의 chinese-Turk 들은 닥치고 한반도로 건너와서는 침략하였는데, 정작 구당서를 보면 신라는 안동도호부의 당 세력에 대해서 당나라인들과 철천지 원수였던 여진족들을 끌어들여서는 고구려계 야인들이 후일의 천리장성 이남이 전라도나 충청도로 넘어와서 이주하는 것을 허했다고 나온다. 그러자 돌궐계와 고구려계의 충돌이 일어나면서 당과 신라의 관계도 악화되면서 신라와 당의 전쟁이 발발하였다고 한다.
어쩌면 백제인들이 부여계인 부리야트라는 것도 이러한 이주 정책 이후의 것인데, 중국인들은 순서없이 뒤죽박죽으로 기술했을 가능성이 매우 큰데, 왜냐면 신당서의 경우에는 실제로는 당대에 쓰인 것이 아니라 당나라가 멸망하고 나서도 한참 뒤에 쓰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구당서는 실제로는 당멸망 이후인 5대 10국 때부터 쓰였고, 신당서는 그보다 더 후일인 송대에나 구양수들에 의해서 쓰인 것이다.
따라서 신라가 투르크인들의 정착촌 설립 따위를 태클 놓으려고 허용한 야인들의 남부지역에 대한 이주에 의한 서남부 한인들의 부여계 몽골로이드와의 결합과 같은 것은 실제로는 7세기 이후의 일이지만 정작 사서들은 더 이후에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이미 일어난 변화를 변화가 일어난 시기보다 훨씬 전대로 상정해서는 백제가 부여인들인 비류와 온조로부터 기인한다 따위의 신화에나 근거하는 카더라는 검증도 해 보지 않고, 사실인양 기술한 것이 당시의 중국이나 한국의 사가들의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백제는 비류와 온조의 씨이고, 신라는 혁거세의 씨라는 점이 신라, 백제의 대립의 근본 요소가 되었는지는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다.
정작 프론티어 정복을 통해서 여진계 야인들과 일부의 몽골인들을 끊임없이 복속해나가던 신라사회내에서 혼혈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즉 그 것은 대립각의 원인이 될 수 없으며, 비유를 하자면 비류와 온조로 표징되는 부여와 주르첸인들의 딸과 혁거세로 표징되는 경상북도와 한수유역의 한국인 아들이 결합한 것과 같은 인종들이 보통사람들의 주류였던 것이 신라의 인종적 관점이었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