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들이 동북공정을 하게 된 것은 만주국이 수립되었다가 한족들에게 넘어건 비교적 근자의 일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천년전에 중국인들은 역사주작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월인들인 베트남인들의 역사와 관련해서 말이다.
월인들에 대한 언급은 공자가 쓴 책 춘추에 이미 언급되고 있었고, 본래는 초의 지방세력이었지만 곧 국가화하면서 춘추오패중의 하나로 꼽힌 월나라로 성장하였다.
월나라인들의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곡해에 대한 발견이 어쩌서 후한 멸망 이후의 전란의 양상이 선비족과 버마계 이주민들로 비정한 오초월인들간의 민족적인 투쟁이었다고만 비정해야 했는지에 대한 논거가 될 것이다.
남조의 월나라인들 중에서 단연 주목해야 할 존재는 진패선이라는 장군 출신 황제이다.
진패선은 오늘날에도 무덤조차 파헤쳐져 있으므로, 사후에 현지인들로부터 극심한 반동을 유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의 자손 진숙보에 대해서도 희대의 바보라는 식으로 아주 blame한 수식어들이 따라다닌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진패선과 진씨들이 돌궐세력의 장강이남으로의 남진을 저지하던 마지막 세력이었는데, 나중에 건너온 세력들은 그를 좋게 생각했을리가 없는 것이다.
결국 진가를 멸망시키고 나서야 선비돌궐계 왕조인 수나라의 통일이 주창되었기 때문에 목소리만 큰 짱개승자새끼덜이 진씨들을 곱게 봤을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당조의 측천무후라는 놈은 아예 대놓고 역사에 대해서 가감첨삭하면서 선비투르크계열 지배자들에게 민감한 내용들은 모조리 뜯어고쳤다는 점을 마치 치적인양 자랑까지 했으니까 중국역사가 얼마나 엉터리 주작인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삼국지 따위에 의하면 진패선은 제갈량 밑에 있던 아장 진식의 자손이다. 혹은 진수와 같은 계열이다 그 지랄인데, 그러한 것은 짱개들의 불쉿이다.
주강일대의 진씨라는 것은 월나라인들의 꽤나 유명한 가문으로써 베트남사에서는 진씨 왕조까지 세웠던 놈들이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은 이미 월인들을 주강이나 나아가서 5대 10국의 남한세력이 광서성과 광동성에서까지 베트남인들을 몰아내어서는 오늘날의 베트남 일대로 몰아낸 이후의 패러다임에 맞춘 억지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즉, 한대에 월인들이 중국인들의 일부로써 기능하던 때에는 그들은 장강과 동정호로 연결될 수 있는 주강(=월강이라고도 불림)일대에서 흥하던 민족이다.
그리고, 주강에서 감강따위를 통해서 난창이나 구강의 장강유역으로 갈 수 있는 통로들이 월나라인들과 오나라인들의 오랜 교역통로였었다.
어쩌면 중국인들을 베트남에 대한 동북공정을 완벽하게 하지는 못하였는데, 진패선은 본래 토착가문의 자손으로써 토음으로 관리도 하면서 군행정가도 되는 일자리를 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양 무제 소연이 돌궐 오랑캐놈인 후경의 거짓항복을 받아주었다가 후경에게 잡히게 되면서 남조인들을 거국적인 투쟁을 할 필요가 있었고, 그에 따라서 소씨인 소역을 옹립하고 왕승변의 군세와 연합투쟁을 맹세하게 되었는데, 후일에 돌궐계 지배세력들은 그 의미를 아주 축소하였지만 진패선과 왕승변의 의기투합은 월과 오의 거국적 투쟁을 의미했다고 보여진다.
그에 따라서 오월동주인 월과 오가 연합을 하게 되자 장강을 넘어온 후경과 선비족세력들에게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게 되어서 장강을 넘어온 선비족들은 강을 건널 수 없는 상황에서 대대적인 학살을 당하였다고 한다.
선비와 돌궐은 죄다 똑같은 의미로써 선비족국가 서위의 사돈이었던 부민 칸이라는 놈이 돌궐(굑-turk)이라는 이름과 카칸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중국외부의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선비라기보다는 돌궐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 것이 바로 투르크이다. 투르크와 돌궐은 똑같은 말이다.
그리고 후경이라는 놈은 초기 선비돌궐사에서 매우 강력한 워로드였던 이주영이라는 놈 밑에 있던 제장들 중에 한 놈이던 것이다. 이주영의 세력으로부터 사실상 거의 모든 투르크들이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 것인데, 그 중에 한 세력이 남조의 월나라인 황제를 꾀어서는 장강이남으로까지 투르크세력을 끌고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계략으로 장강을 건널 수 있었던 투르크인들을 진패선과 왕승변에 의해서 모조리 몰살당하였다.
따라서 선비족 탁발계 왕실이 엄연히 지배하던 수나 당의 사가들은 결코 진패선에 대해서 호의적일 수 없었다.
어쩌면 그러한 동기들에 의해서 베트남인 역사에 대한 한족역사처럼 보이게 하는 작업들이 시작되었다. 진패선 뿐 아니라 관공과 대치를 했다는 여몽이라는 인간도 베트남계가 아닌가 의심되는데, 또한 베트남사에서 여씨들이 러왕조까지 세웠기 때문이다.
진씨나 여씨는 베트남에서는 왕조까지 세웠던 베트남의 족장들 중에서 주류 씨족들 중 하나인데, 중국사가들은 그들의 존재를 모조리 곡해하였다.
그리고, 수나라와 당나라 때에 베트남인들과 선비돌궐족들의 투쟁을 계속되어서 당조가 망할 때쯤에는 이미 장강일대에서 베트남인들을 완전히 볼 수 없게 된지 오래였고, 그보다 훨씬 아랫지역인 광동성과 광시성까지 뺐겨서는 해당지역에 성립한 남한이라는 국가와도 여전히 민족적인 투쟁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항구적으로 광동성과 광시성의 월강일대까지 모조리 빼았기게 된다. 월강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애초에 월강일대는 베트남인들의 Stonghold 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여기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소위 삼국지에서 말하는 손권의 나라라는 것은 엉터리 짜집기라는 것이다. 손권이라는 놈이 오초계라는 것을 완전히 간과하였거나 고의적으로 누락했을 것이다.
왜냐면 오와 월이 장강일대의 주류라는 상황은 상기했듯이 남조의 진대까지도 유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조초기의 북벌을 단행하던 군인들은 또한 명백하게 초나라 계열이었고, 남조라는 것 자체가 춘추전국시대때부터 존재한 오초월인들의 나라이다.
여기서 오초월계가 어째서 선비돌궐계들의 난입 이전의 한제국과 진제국의 주류인종이었다고 봐야하냐면 전한초기의 오초칠국의 난과 그 후속처리에 대한 기사들에서 이르기에는 오초지역에 유씨왕들이 대거 이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유자천하는 것도 책봉관계로 보면 오초지역이 유씨들의 본 나와바리라는 성격이 매우 짙기 때문이다. 반면에 오늘날의 허난이나 허베이 지역에서는 군현제가 시행되었다.
그와 함께 초한전쟁이 어째서 통일중국의 판세를 가르는 전쟁인지도 깨달아야 하는데, 초와 한의 세력은 유씨덜이 초나라 지역에 대거 분봉되었듯이 그 것은 민족적으로는 같은 민족이었을 것이다. 즉 당시에 중국의 주류인종들끼리 판세를 나눠서 결판을 벌인 것이 초와 한이라고 보면 되고, 초와 한은 뗄 수가 없는 관계인 것이다.
그리고 오나라까지 들어가면서 월나라도 끼니까 오초월한은 당시에 중국의 주류인종들이다라는 결론이 나오게 되고, 나아가서 진나라까지 포함시킬 수 있다.
그에 반해서 삼국지 게임에서 중원이라고 하는 지역들은 중요성은 한대 초기에는 대단히 낮았고, 그러한 지역의 마이너한 팩션들을 그냥 일컬어서 제후라고 표현하였고, 그러한 중원의 제후들은 조금씩 제거되면서 군현제가 이식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데, 오초한진월은 진한제국이나 초한전쟁 당시에는 오늘날 미국의 오대호 연한의 레드넥들과 같은 인종적 주류로 자처하는 집단의 국가였다고 봐야하며, 삼국지에서도 묘사되지만 따라서 초나라인 형주와 진과 초의 교집합 지역인 익주에는 유표나 유장이 인스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방이 항우에게 익주로 물러날 것을 청할 때에 조상의 무덤이 그 곳에 있다고 한 점 따위를 상기하면 오초한진월의 주류인종들의 공통조상들은 오늘날 사천성인 익주에 있었지 않나 의심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에 버마나 윈난성에서 익주로 나아간 인종들이 중국 고대사에서는 주류였었지만 한제국 멸망 이후에는 남조만을 근거로 투쟁하다가 결국에는 선비돌궐족들에게 중국통치의 주도권과 중국의 지배세력의 주류인종 지위도 완전히 빼았겼음을 알 수 있다.
게임 삼국지 따위를 해보면 그 것은 중세에나 집권한 선비돌궐계들의 경제적 관점까지 그대로 따르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허난성과 허베이성의 가치가 지나치게 고평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대의 경제적 중심지는 상양과 뤄양을 잇는 호북성일대나 시안과 한중이었을 것이다.
남조초기에 환온이 북진을 할 때만 하더라도 호북성과 호남성에서 형성된 군세가 유비의 나라가 있었다는 쓰촨성과 뤄양, 시안이 있는 산시성까지 단 일격에 회복할 수 있을 정도였다.
즉, 후한멸망 이후에도 초나라 지역의 경제적, 군사적 역량이 되려 익주, 관중, 허난 다 합친 것보다 더 높았다. 그렇게 볼 때에 삼국지의 조위(조조의 위나라)라는 국가의 진위 자체가 대단히 의심스러운 것이다.
조위는 어쩌면 북위의 선비족 지배세력이 이성계가 자신의 6대 할배까지 추존하듯이 만든 개념일 것이다. 나아가서 위라는 이름이 들어간 것이나 유사한 것 전부를 의심할 수 있고, 어쩌면 춘추의 송양공까지도 선비족들의 외삽일 것이다.
선비족들은 본래는 그레코-박트리아왕국에서 기인하는 쿠샨왕조의 그리스계 지배자들로써 그들의 문화인 헬레니즘 문화를 통해서 존재를 비정할 수 있다.
그에 따라서 헬레니즘 양식이 들어간 불상들과 실상은 헬레니즘 워로드들에 의해서 위경으로부터 참칭된 유사불교인 대승불교와 결부지을 수 있는 집단인 것이다.
중국의 선비족 지배집단들은 대승불교를 바탕으로 유교와 도교를 아우르는 유불도 사상이라는 독특한 것을 만들어냈는데, 정작 대승불교 자체는 부다의 말씀과는 아무 상관없는 둔황이나 투르판따위의 서역으로부터 중국을 침공해온 세력들이 참칭한 유사불교 종파이다.
페르시아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그리스계 지배집단의 나라이던 쿠샨왕조에 대해서 기원후 240년경에 샤푸르1세가 대대적인 침공을 단행하였는데, 그에 따라서 도미노현상으로 샤푸르1세가 침공해오면서 박트리아지역과 인도지역으로 양단된 쿠샨왕조의 헬레니즘 세력들중 박트리아의 쿠샨왕조잔당들이 중국으로 쳐 들어온 것을 중국쪽에서는 선비족이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하다면 234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는 제갈량 사후에는 강유나 그딴 건 없었고, 곧 선비족의 침략을 대대적으로 받게 되는데, 사마씨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인지도 매우 의심스럽단 것이다.
게다가 사마라는 것은 관직을 의미하는 것으로 요즘으로 치면 총리같은 직책이라고 할 수 있는 사마씨가 있었다고 표현한 것도 의심스럽다.
되려 순차적으로 정리하자면 240년 이후에 중국인의 왕이 선비족에게 사로잡히면서 중국의 한 정권이 완전히 끝장이 났고, 신료들 중에서 사마가 일파들을 이끌고는 남조로 가서는 총리가 집권하는 임시정권을 세웠는데, 이걸 사마xx 요 지랄로 사마씨가 집권했다 요 지랄이나 후대의 황학에 의거해서 모조리 첨삭주작했다고 의심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강력한 증거로써 남조의 오초월의 세력은 주작역사 삼국지에서 비정하듯이 손권이라는 놈이 튀어나와서는 세운 건강정권이 아니라 오초7국의 난 때부터 한제국의 기득권 세력들이 분봉하여 다스리던 지역이었던 것이 그대로 남조로 이어졌다는 정황을 감안해야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