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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과 한나라 쇠락의 시작 – 안토니우스 역병
게시물ID : history_299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옐로우황
추천 : 1
조회수 : 246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20/01/19 11:23:18

165년부터 180년까지 지속된 안토니우스 역병(Antonine Plague)은, 그 상황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한 그리스 의사의 이름을 따 갈레노스 역병(Plague of Galen)이라고도 부른다. 안토니우스 역병은 파르티아를 상대로 한 원정에서 돌아온 군대에 의해 로마 제국으로 전파된 전염병의 대유행이었다. 학자들은 그 고대의 질병을 천연두 또는 홍역으로 의심하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 역병은 169년에 로마 황제 루시우스 베루스(Lucius Verus)의 목숨과 180년에 베루스와 공동 황제였고 5현제이며 이 역병의 이름과 관련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Marcus Aurelius Antoninus)의 목숨을 앗았다.



※ 옐로우의 세계사 연표: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65



중국의 문헌은 161~162년 서북부 변경에서 유목민과 싸우는 군대에 정체 모를 역병이 터져 병사 3분의 1이 죽었다고 기록한다. 역병은 171년과 185년 사이에 다섯 차례 더 중국을 찾아오며 그 기간 동안 로마 제국도 그만큼 자주 역병에 시달린다.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 이집트에서는 유행성 전염병이 인구의 4분의 1 이상을 죽였던 것 같다.



로마제국 멸망에 대한 논의는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의 《로마제국 쇠망사》로 시작된다. 기번은 역사학자로서 갖추어야 할 정확성과 엄밀성을 갖고 책을 저술했음을 보여 주었고, 이것이 현재에도 《로마제국 쇠망사》가 세계인들이 선호하는 고전으로 손꼽히는 이유다.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 이유로 전염병 발생의 영향을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안토니우스 역병에 대해서는 주요한 요인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아서 에드워드 로밀리 보크(Author. E. R. Boak, 1888-1962)과 같은 연구자, 역사가들은 안토니우스 역병이, 계속되는 일련의 역병 발발과 같이, 로마제국 쇠퇴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Manpower Shortage and the Fall of the Roman Empire》에서 보크는 166년의 역병의 발발로 인구가 감소하여 모자라는 군인을 농부와 지역 공무원으로 충당하였기 때문에 식량 생산량이 떨어지고 도시와 촌락 행정의 지원이 부족해져 전체적으로 야만인 침략을 막는 로마제국의 역량을 약화시켰다고 말한다.



《The Route to Crisis: Cities, Trade and Epidemics of the Roman Empire》에서 Eriny Hanna는 "로마 문화, 도시화  및 도시와 지방의 상호 의존성"이 전염병의 확산을 촉진하여 제국 붕괴의 토대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Hanna, 1). 인구 밀집 도시, 부족한 식량으로 인한 영양 실조, 공중 위생의 조치 부족으로 로마의 도시들은 질병 전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전염병은 도시를 중심으로 연결된 육로와 해상 무역로를 통해 외곽 지역으로 쉽게 전파되었다.



최근에 카일 하퍼(Kyle Harper, 1979- )는 "사회 발전의 역설과 자연의 예측 불가능성이 로마의 붕괴를 위해 같이 작동했다"고 제안한다 (Harper, 2). 다시 말해, 기후변화가 새롭고 치명적인 질병의 발생에 대한 환경적 맥락을 제공했는데, 안토니우스 역병은 로마 기후최적기의 끝 무렵에 나타나 세계에 천연두를 소개하였다. 하퍼는 치명적인 세계적 전염병, 즉 안토니우스 역병을 시작으로 키프리아누스 역병(249-262), 유스티니아누스 역병(541-542)이 높은 사망률로 로마제국의 토대를 크게 흔들었다고 주장한다. 로마제국의 강점으로 많이 인용되는 강력한 로마 군대, 넓은 제국의 영역,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 로마 도시의 수와 규모가 오히려 궁극적으로 로마제국의 몰락으로 이끄는 치명적인 질병 전파의 기초를 제공했다.



갈홍(Ge Hong, 284~363)이 중국에서 천연두의 증상을 정확하게 묘사한 최초의 사람이었지만, 역사학자 Rafe de Crespigny는 후한 황제 환제(146-168)와 영제(168-189)의 통치 기간 동안 중국을 괴롭히는 재앙, 즉 151, 161, 171, 173, 179, 182 및 185 년에 발생한 역병이 아마도 안토니우스 역병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며, 이 재앙이 장각(Jian Jue, 184)가 이끄는 신앙인 태평도를 일으켰으며, 황건의 난(184-205)을 촉발시켰다고 말했다.



고대의 기후최적기는 유럽에서 중동을 거쳐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왕국의 형성을 가능케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비슷한 시기에 쇠락하기 시작했다.

※ 로마 온난기(로마 기후최적기) : http://yellow.kr/blog/?p=3970



이언 모리스의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에서는, 기원전 1년과 서기 1년 부근에서 정점을 찍은 뒤 사회발전지수가 동양과 서양에서 모두 떨어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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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6.1. An Old World–wide depression: the peak, decline, and fall of the ancient empires, 100 BCE–500 CE



이번 하락은 완전히 새로운 규모의 붕괴였다. 유라시아 양단에 영향을 미치며 이전 어느 때보다 폭넓을 뿐만 아니라 더 길게 지속되었고 더 심각하기도 했다. 몇 세기가 지나도록 사회발전지수 그래프 선은 바닥을 기면서 400년까지 동양의 사회발전지수는 10퍼센트, 500년까지 서양의 사회발전지수는 20퍼센트 감소시킨다.


정주 사회가 출현한 이후 최초의 도시가 발달하는 것과 함께 인구 규모가 커지고 인구밀도도 높아지면서 인간은 동물에게서 오는 질병에 더욱 대규모로 노출되기 시작했다. 또한 교역과 여행의 증가로 질병이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좀 더 빨리 전파될 수 있게 되었다. 초기 문명들도 상호 간 교역을 했지만, 기원전 200년에서 기원후 200년 사이의 기간에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지중해와 중국을 연결하는 두 개의 주요 노선, 즉 비단길(실크로드) 및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잇는 해상무역로가 확립되면서 질병은 대륙 전체로 퍼졌다. 한 지역에 국한하지 않은 ‘국제화된 전염병’의 첫 사례가 안토니우스 역병이었다.



로마온난기 이후의 진행이 중세온난기가 끝날 무렵인 13~14세기에 찾아온 흑사병의 대유행, 그리고 17세기 소빙하기로의 진행과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출처 http://yellow.kr/blog/?p=4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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