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에도 한 번 비슷한 글을 올린 적 있었는데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친절하게 조언해주셔서 정말 큰 도움이 됐습니다. 계속해서 새로운 스토리, 설정, 글 스타일로 소설을 써보려 노력 중인데 다시 한 번 평가받을 수 있을까 싶어 글 남깁니다. 따로 댓글 안 남겨주셔도 읽어주시는 분들 미리 감사의 말씀드리겠습니다.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사내의 말소리에 아르텐은 재빨리 그의 옆에 놓여져 있던 검집을 움켜잡았다.
"헤루스의 이름으로 맹세컨대, 난 산적이나 도적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여행자요."
"요즘 평범한 여행자들은 칼을 두 자루씩 들고다니나 보군요?"
"요즘 세상이 워낙 흉흉해서 말이오."
웅성하게 나있는 나무들 사이에서 한 중년의 사내가 천천히 걸어나오며 말했다. 등에 커다란 짐 보따리를 메고있는 그는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아르텐을 향해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요 앞에 바덴 도시로 가던 길인데 숲 속에서 잠시 길을 헤매서 말이요. 어쩔 수 없이 야행을 하게 됐는데 불 좀 잠깐 빌려도 되겠소?"
"처음 보는 사람을 설득하는데 헤루스의 이름을 대는 자라면 믿을 수 있겠죠."
보통 사람들을 뭔가를 약조할 때 진실과 공정한 심판을 관장하는 신인 스카일러의 이름을 대는 경우가 많았다. 죽음의 신인 헤루스의 이름을 대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는데 헤루스의 이름을 대고도 거짓을 말할 경우 어떤 참상이 그를 덮칠지 몰랐기 때문이다.
'애초에 인간들의 사사로운 일에 신들의 이름을 댄다는 것 자체가 불경이겠지만.'
아르텐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소매에 걸려있던 불꽃 문양이 그려져있는 황동표식을 떼어냈다. 법의 힘이 미치지 않는 황무지에서 공공연히 이 표식을 보여주며 다녔다가는 등에 칼이 꽂히기 쉽상이였다.
"내 이름은 헨슨이라고 하오."
자신을 헨슨이라고 소개한 사내는 자신의 허리춤에 걸려있던 두 개의 기다란 검집을 풀어헤치며 모닥불 앞에 앉았다.
"저는 아르텐이라고 합니다."
몸을 일으킨 아르텐은 그와 악수하기 위해 손을 앞으로 뻗었지만 헨슨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하며 아르텐의 손을 뻔히 쳐다볼 뿐이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마침내 더이상 참지 못한 아르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악수조차 하시기 싫을 정도로 제 손이 더럽습니까?"
그 말을 들은 헨슨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죄송하네. 아직 북방의 인사법은 익숙하지 않아서 말이오. 그래서 손 한 번 잡아주면 되는거요?"
"잡으신 후에 한 번 살짝 흔드시면 됩니다."
아르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헨슨은 양 손으로 아르텐의 손을 붙잡고 거세게 양 옆으로 흔들었다. 얼마나 힘을 실어서 세게 흔드는지 아르텐의 몸이 갸우뚱 기울 정도였다.
"그 정도면 됐습니다."
"북방의 인사법은 정말 이상하군. 인사 한 번하는데 남자들끼리 손을 붙잡해야 된다니."
"그러면 이 근방의 인사법은 어떻습니까?"
"사내 사이에 몸을 맞대는 인사따위는 필요하지 않소, 그저 반갑다는 눈빛 한 번이면 족하지."
헨슨의 말에 아르텐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이런 인사법이 생긴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가 있다고?"
"오랜 옛날, 북방의 한 상인이 어두운 숲 속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당신과 나처럼 그도 모닥불 하나를 가운데에 놓고 처음보는 이방인과 밤을 보내게 됐죠. 잠시 잡담을 나누던 둘은 곧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곤히 잠자던 상인은 뭔가 자신의 목을 누르는 느낌을 받고 잠에서 깨어났죠.
눈을 떠보니 그의 몸 위에는 방금 전까지 함께 잡담을 나누던 사내가 피칠갑을 한 채로 올라타 있었습니다. 상인이 그 날 밤 만난건 인간이 아니라 산 속에서 여행자들을 유인해 그들이 잠든 사이 잡아먹던 유령이였던거죠. 자신의 목을 짓누르고 있는 유령을 본 상인은 당황해 양 손으로 힘껏 유령을 때리려했지만 아무것도 치지 못하고 허공만 가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 기적적으로 해가 떠오르면서 유령은 사라졌고 상인은 살아남을 수 있었죠. 겨우 목숨을 건진 상인은 그 이후로 누군가를 처음으로 만날 때면 유령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그 사람의 손을 붙잡아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게 바로 북방의 사람들이 악수를 하게된 유래죠."
아무런 말 없이 집중해서 이야기를 듣고있던 헨슨의 얼굴이 점점 새파래졌다.
"제길, 오늘 잠자기는 글렀군."
반쯤 중얼거리는 그의 말을 들은 아르텐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사실은 제가 방금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제발 유령얘기는 하지 말아주시게. 마녀도 제 말하면 온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저희 북방인들은 유령을 믿지 않아서 말이죠."
헨슨이 뭐라 말하려던 그 때 그들의 바로 옆에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런 소리에 헨슨과 아르텐은 재빨리 각자의 검을 빼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르텐이 검집에서 검을 빼들며 헨슨에게 말했다.
"유령이 아니였으면 좋겠군요."
"자네들은 유령을 안 믿는다 하지 않았었나?"
"상황은 항상 변하는 법이죠."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점차 커지더니 순식간에 수 십 명이 수풀을 헤치는 소리로 바뀌었다. 이런 밤 중에 떼지어 숲을 돌아다닐 법한 자들은 산적떼뿐이었다. 사람의 그림자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차가운 눈빛으로 어둠을 응시하던 아르텐이 소리쳤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우리는 바덴 도시 수비대다! 무기를 내려라!"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외침소리가 들렸지만 헨슨과 아르텐은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자신을 경비대나 수색대라고 말해 상대의 경계를 풀고 접근하는 것은 왠만한 산적들이 사용하는 방식이였다. 이번에는 헨슨이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먼저 달빛 아래로 나와 모습을 드러내라!"
"천박한 서샤인이 감히 카이저의 병사에게 명령을 해!"
환하게 비치는 달빛 아래로 화가 나 씩씩거리는 병사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특유의 붉은색 가죽갑옷을 입고 원형 방패를 들고있는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는 북부제국의 병사들이였다. 그들의 기다란 창날이 달빛에 비쳐 반짝거렸다.
10명 남짓한 수비대 일행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커다란 검을 빼들고 앞으로 걸어나왔다. 잠시 매서운 눈빛으로 헨슨을 노려보던 그는 옆에 서있는 아르텐의 얼굴을 보고는 놀랐다는 투로 말했다.
"둘 다 서샤인인줄 알았는데 한 명은 우리 동포였군."
"저희는 그저 이 앞 바덴 도시로 가는 여행자일 뿐입니다. 무슨 볼 일이 있으신지요?"
아르텐은 수비대 대장의 투구에 새겨져있는 해골 문양을 바라보며 그에게 물었다.
"도시에서 벗어난 현상수배범을 찾는 중이다. 신원을 밝혀라."
"제 이름은 아릭 스웬트라고 합니다. 북방의 약초들을 가져다 서샤에 파는 상인이죠. 이 쪽은 제가 고용한 서샤인 용병, 투논이라고 합니다."
"네.....네, 그렇습니다."
헨슨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짓말을 하는 아르텐의 모습에 꽤나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르텐의 말을 들은 수비대 대장은 한쪽 손으로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수상쩍다는 듯이 말했다.
"요즘 약초사들은 옆에 검을 차고다니는 모양이오?"
"요즘 세상이 워낙 흉흉해져서 말이죠."
"그 말은 부정할 수 없군. 요 근래 바덴 도시에서도 워낙 이상한 일들이 많이 터지고있고 말이야."
그가 방금 전 봤던 검을 잡고있는 아르텐의 자세는 약초사라기보다는 전쟁터에서 몇 번 구른 전사의 그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아르텐을 제대로 심문할 시간은 없었다. 도시에서 탈출한 현상수배범이 지금 이 순간에도 숲 저 너머로 벗어나고 있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혀를 차며 자신의 뒤에 서있는 수비대원들에게 소리쳤다.
"다시 출발한다! 서둘러라!"
수비대 대장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르텐을 바라보며 말했다.
"바덴 도시로 갈 계획이라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편이 좋을거요."
"마음 속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아르텐이 공손히 인사하던 그 때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울려퍼졌다. 나무들 사이에서 날라온 화살은 정확히 맨 앞에 서있던 병사의 목을 궤뚫었다. 갑작스런 기습 공격에 목숨을 잃은 병사의 몸은 줄이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힘없이 진흙탕 위에 널부러졌다.
"컥!"
"적이다!"
"엎드려!"
"전투대열을 갖춰라!"
몇 개의 화살이 연이어 날라왔지만 빠르게 전투대형을 갖춘 병사들의 방패에 막혀 모두 튕겨져 나갔다. 헨슨은 아르텐을 향해 엎드리라고 소리친 후 재빨리 땅바닥으로 몸을 굴렀지만 아르텐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은 듯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가만히 숲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텐이 겁에 질려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 헨슨은 재빨리 몸을 날려 아르텐을 붙잡으려 했지만 방패를 뚫고 날라온 몇 개의 화살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전진!"
화살이 날라오는 방향을 향해 1자 모양의 진을 선 수비대 병사들은 방패를 앞세우고 빠른 속도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동료 중 한 명이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돌진해오는 수비대의 기세에 눌렸는지 날라오는 화살의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완전히 멈췄다.
쿵 쿵 쿵
"이얀! 북방 돼지놈들한테 본때를 보여줘라!"
화살세례가 잦아들고 그 대신 뭔가 대지를 울리며 그들을 덮쳐오기 시작했다.
"오우거다!"
병사들 중 한 명이 소리침과 동시에 1자 모양의 진이 양 옆으로 움직이며 U자 모양의 반원진(半圓陣)으로 바뀌었다. 오우거는 평범한 창칼로는 뚫리지 않는 두터운 가죽을 가지고 있었다. 어미를 잃은 야생의 오우거 새끼들이 산적들의 손에서 길러지는 경우가 간혹 있었는데 이럴 경우 그 산적단은 산에서 왕과 같은 존재로 군림했다.
그들의 눈앞에서 달려오고 있는 오우거 또한 이 산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오우거를 상대하는데 적합한 능력을 가진 궁수나 마법사가 없는 경우, 최소한의 피해로 오우거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반원으로 오우거를 몰아붙이면서 최대의 약점이라고 알려진 목 뒷덜미에 칼을 쑤셔넣는 것뿐이였다.
하지만 이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최소 20명이 넘는 인원이 필요했는데 남아있는 9명의 수비병들로는 오우거를 견제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우오오오!"
몇 미터를 달려오면서 가속도가 붙은 오우거의 몸통박치기에 3명의 수비병들이 동시에 땅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쓰러져있는 병사들을 향해 오우거가 나무뭉둥이를 휘두르려던 그 때 한 명의 사내가 오우거 앞으로 접근했다. 태연스러운 사내의 등장에 당황한 듯 오우거의 거대한 몽둥이가 잠시 움칫했다.
오우거와 병사들 사이에 홀로 서있는 자의 정체는 바로 아르텐이였다. 잠시 오우거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르텐은 손을 올려 후드 안쪽에 있던 마스크를 얼굴에 뒤집어썼다. 그것은 마치 실제 해골을 잘라서 만든 것처럼 정교하게 생긴 해골 마스크였다.
"아르텐! 미쳤어?!"
수 십년간 치열한 전쟁터 속에서 용병으로 구르면서 헨슨도 몇 번이고 오우거와 맞붙은 적 있었다. 하지만 단신으로 오우거와 싸워 살아남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서샤제국 최강의 기사단이였던 성전기사단의 단장조차 홀몸으로 오우거에 맞서싸우다 죽음을 맞이했었다.
"우아아아!"
자신을 놀래킨 아르텐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자 분노한 오우거는 아르텐을 향해 힘껏 몽둥이를 휘둘렀다. 오우거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몽둥이가 공중을 가르면서 위압스런 바람소리가 뿜어져나올 정도였다.
오우거가 몽둥이를 치켜올릴 때까지만 해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아르텐은 천천히 자신의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바로 다음 순간 그의 왼손 아래에 달려있는 조그만한 구멍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면서 숲 주변을 환하게 비쳤다.
"으아아악!"
시야를 새하얗게 뒤덮는 강렬한 빛에 헨슨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감쌌다. 그뿐만이 아니라 산적들과 수비대들 또한 놀란건 마찬가지였는데 심지어 몇몇은 자신의 눈이 멀었다면서 땅바닥에 드러눕기도 했다.
아르텐의 왼손에서 뿜어져 나온 빛은 그의 바로 앞에 서있던 오우거의 몸을 휘감았다. 그를 향해 날라오던 몽둥이의 속도가 점차 느려지더니 이내 힘없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잠시 후 빛이 점차 사그라들고 어둠이 다시 주변을 물들이면서 산적들과 수비대 병사들은 자신들의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오우거가 서있던 자리에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잿더미만 조금 남아있었고 그 옆에는 몽둥이를 들고있는 오우거의 팔 한짝이 떨어져있었다. 제 주인을 찾아가려는 듯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는 팔은 방금 전까지 오우거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일한 흔적이였다.
"으으아아아! 흑마법사다! 도망쳐!"
자신들의 최강의 전력을 한순간에 잃은 산적들은 공포에 휩싸여 숲 안쪽을 향해 도망쳤다. 수비대 병사들은 놀랄 틈도 없이 아르텐을 둘러싸며 그를 향해 창을 겨누었다. 헨슨은 여전히 믿기지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아르텐을 쳐다보고 있었다.
"네 정체는 뭐냐?!"
수비대 대장의 외침에 아르텐은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했다. 새하얀 해골 모양의 마스크에서 오직 그의 두 눈동자만이 푸른 빛을 내며 반짝거렸다.
"당장 말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병사들의 창칼이 금방이라도 그를 찌를 것처럼 다가왔지만 아르텐은 여전히 아무런 말 없이 품 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는 불꽃의 모양이 그려져있는 황동표식이였다. 아르텐은 천천히 황동표식을 오른팔에 붙였다. 그 모습을 본 수비대 병사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아아..."
아홉명의 수비대 병사들을 포함해 수비대 대장까지도 창을 옆에 내려놓고 아르텐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오직 헨슨만이 어리벙벙한 얼굴로 가만히 서있을 뿐이였다.
"이단심문관이시여. 저희가 지은 무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아무릎을 꿇은채로 반쯤 소리치듯 말하는 수비대 대장을 바라보며 아르텐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바덴 도시에 거주하는 모든 신민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을 전적으로 북방제국 출신의 아르텐 2급 이단심문관에게 일임하며 그 권한과 지위는 바덴도시의 시장인 바흐투 자작보다 우선한다. 또한 임시적으로 아르텐 2급 이단심문관에게 바덴 도시 내의 사법 재판권과 징세권을 부여함으로써 마녀 토벌을 수월히 하도록 한다.
본 포고문의 효력은 바덴 도시에서 출몰한 마녀가 공식적으로 토벌되는 순간까지 유지된다. - 서샤왕&카이저."
포고문을 읽어내려 갈수록 바흐투 자작의 손이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이내 마지막 구절에 다다르자 그는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책상을 내리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것은 서샤왕국에 대한 명백한 월권행위요!"
"당신이 지금 들고있는건 카이저가 직접 쓰신 칙서요. 혀를 잃고 싶지 않다면 다음에 할 말을 신중하게 생각하시오, 바흐투 시장."
바흐투 시장이 그의 앞에 서있는 아르텐을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치자 아르텐의 뒤에 서있던 북방제국 수비대 대장인 토논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한겨울의 서리만큼이나 차가운 그의 말에 울그락 불그락하던 바흐투 시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
북방제국과 서샤왕국 사이에 공식적인 휴전 조약이 체결되면서 대규모의 북방 제국 병사들이 크고작은 서샤왕국 도시들에 파견됐다. 표면적인 이유로는 동맹국의 치안유지를 위한 지원군의 파견이였지만 사실상 서샤 왕국의 팔다리를 붙잡고있는 점령군이나 다름없었다.
북방 제국은 눈꽃 전쟁의 승리자로서 지난 몇 년 동안 서샤 왕국에 무력을 행사해왔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서샤 왕국의 주권을 짓밟은 적은 없었다. 엄연히 다스리는 왕이 존재하는 도시에서 군사권뿐만이 아닌 징세권과 재판권을 요구한다는 것은 사실상 도시 하나를 내어달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우리 도시에서 마녀가 출현했다고는 해도 재판권과 징세권까지 뺏어간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억지요! 북방제국은 새로운 전쟁이라도 일으킬 셈이요?"
"바덴 도시는 서샤왕국 내에서 가장 작은 도시입니다."
아르텐이 나서지 말라는 듯 수비대장 토논에게 가벼운 손짓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요?"
뜬금없는 아르텐의 말에 바흐투 시장은 씩씩거리며 물었다. 아르텐은 바흐투 시장의 책상 앞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곡물의 생산량도 다른 도시들에 비교하면 터무니 없을만큼 적을 뿐만 아니라 광물도 거의 생산되지 않고 그렇다고 이 도시만의 특산물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지요."
아르텐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더 자세히 설명해줘야 이 멍청한 귀족놈이 알아들을 수 있는걸까? 북방제국이 제시한 조건은 알고보면 사실 꽤나 관대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북방제국의 기준에서였지만 말이다.
"산적떼나 거대 괴수가 출몰했다면 도시 내 자경단 조직을 지원하거나 적당한 수준의 토벌군을 보내는데서 끝났을 지도 모릅니다."
아르텐은 그렇게 말한 후 한 쪽 다리를 꼬았다. 아무리 우는 아이도 그치게 한다는 이단심문관이라지만 타국의 상급 귀족 앞에서 그렇게 도발적인 자세를 취한다는건 엄청난 결례에 속했다. 대놓고 그를 무시하는 아르텐의 포즈에 바흐투 시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마녀가 출몰했다면 이야기가 다르죠. 사실 제가 파견되기 전에는 수 만 명의 돌장갑병 부대를 파견해 도시 전체를 정화하자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샤 왕께서 저희 카이저에게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도록 간곡히 부탁하시며 마녀토벌을 일임해주신 바, 바흐투 자작님이 지금 왈가왈부하신다고 어떻게 바뀔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하지만...크흑."
서샤 국왕을 들먹이자 바흐투 자작도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는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아르텐은 여전히 다리를 꼰 채로 품 속에서 연초를 꺼내 불을 붙였다. 입에 한가득 머금은 새하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아르텐은 말을 이었다.
"아직 조사를 시작도 하지 않은만큼 지금 당장 징세권이나 징발권을 요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뭐든지 상황의 추이에 따라 뒤바뀔 수 있는 법이죠."
"그대가 마녀를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거지?"
"두 달 안에 제가 마녀를 찾아내지 못할 경우 도시 전체에 대한 정화작업, 즉 익스터미나투스(Exterminatus)가 실행될 것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무고한 주민 수 만명을 모조리 죽여버리겠다고 말하는 아르텐의 모습에 바흐투 자작은 온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북방제국에서 이단심문관이 파견될 것이라는 것은 그가 사전에 통보받은 사실이였지만 이런 식으로 북방인에게 도시 전체의 통제권을 넘겨줘야 한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앞으로 저는 시청 앞에 있는 장미여관에서 머물 예정이니 뭔가 요청하실 사안이 있으시면 그 쪽으로 사람을 보내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한 아르텐은 의자에서 일어나 바흐투 자작을 향해 공손히 인사를 했다.
"행복의 신, 바한의 축복이 자작님과 함께하길."
아르텐이 자작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가자 수비대 대장 토논도 여전히 굳은 얼굴로 그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방에 혼자 남은 바흐투 자작은 수치심과 분노에 손이 시뻘개질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자 어쩌면 몇 주 전에 있었던 마녀 출몰 사건도 북방제국이 일으킨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그의 머리 속을 채웠다.
북방제국과 서샤왕국 국경선 근처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인 바덴 도시에 마녀가 출몰하고 북방제국에서 사건해결을 위해 이단심문관을 파견한다. 우연이라고 믿기에는 아귀가 너무 잘 맞아떨어졌다.
'바덴은 서샤 국왕폐하께서 내게 하사해주신 도시다. 제 아무리 북방제국의 촌뜨기들이 난리를 친다한들 거저 내줄 수는 없지.'
"여봐라! 밖에 아무도 없느냐!"
그의 외침에 문 밖에 있던 하녀 한 명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예, 자작님. 뭔가 필요하신 것이라도?"
"잭슨 경비대장에게 전령을 보내 도시의 경비병들을 전원 소집하라 명해라."
"예, 알겠습니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문 밖으로 나서는 하녀의 모습을 보며 바흐투 자작은 또 다시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샛노란 번개가 하늘을 밝혔고 뒤이어 천둥소리가 대지를 뒤흔들었다.
"저희 쪽으로 추가 기운 이상, 바흐투 자작 쪽에서 뭔가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청 밖으로 나온 아르텐에게 수비대 대장인 토논이 말을 걸었다. 어둠이 짙은 밤 속에서 장대비가 거리를 적시고 있었고 도시에는 나돌아다니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바덴은 변방의 도시치고는 사람이 많은 편에 속했지만 밤에 마녀가 나타나 사람들을 잡아간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면서 해가 지고 거리밖으로 나오는 용감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제가 바흐투 자작이였어도 가만히 앉아있지는 않겠죠. 하지만 서샤 국왕이 공동으로 조인한 칙서이니만큼 제아무리 자작이라도 선을 넘어선 행동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두고 봐야겠죠. 이건 저희 수비대가 사용하는 연락용 호루라기입니다. 도시 어디에서라도 이걸 사용하시면 근처의 수비대 병사가 바로 달려갈 것입니다."
토논은 품 속에서 기다란 원통형으로 생긴 호루라기를 꺼내 아르텐에게 건넸다. 상아색 호루라기가 달빛에 비쳐 아르텐의 손 위에서 반짝거렸다.
"사용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아르텐은 옷 안쪽 주머니에 호루라기를 집어넣으며 토논에게 말했다. 이단심문관은 온갖 첨단무기와 장비로 무장한 일인군단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가 이 호루라기를 사용할 때는 오직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뿐일 것이다.
"저도 동감입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둘은 도시의 여관치고는 꽤나 허름해보이는 모습의 장미여관 앞에 도착했다.
선술집이나 다름없는 골목 여관의 특성상 건물 안은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있는 남정네들의 고함소리로 요란했고 패싸움이라도 벌어지고 있는지 나무 쪼가리 부서지는 소리도 간간이 울려퍼졌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반쯤 기울어진 여관건물을 바라보며 토논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허름한 여관이 아니라 저희 수비대가 머무르고 있는 시청 막사에서 머무르셔도 괜찮습니다. 당장 내일 건물이 무너져 깔려죽으셔도 별로 놀라지 않을 것 같네요."
"하루종일 길거리만 돌아다니다 보면 이런 여관도 궁전이나 다를 바 없죠. 나중에 마음이 바뀌면 찾아가겠습니다."
이단심문관들은 수행하는 임무의 특성상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그들은 일생의 대부분을 숲과 황무지에서 보냈고 죽은 후 시체가 회수되는 경우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아르텐의 말에 토논도 딱히 뭐라 할 말이 없는지 혀를 한 번 차고는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인사를 마친 아르텐은 여관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가 문을 열기 무섭게 두 명의 사내가 기겁한 표정을 지으며 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아이고 저 년이 사람 잡네!"
예상치 못한 광경에 아르텐은 순간적으로 검 손잡이에 손을 뻗었지만 곧이어 들리는 목소리에 실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야! 이 겁쟁이 새끼들아! 사내새끼가 되가지고 고작 그것밖에 못하냐!"
부리나케 달려가는 두 명의 등 뒤로 아르텐에게 익숙한 여인의 노호성이 울려퍼졌다.
사내들을 뒤따라 여관 밖으로 뛰쳐나온 붉은 머리칼의 여인은 한쪽 손에 들린 큼지막한 부엌칼을 휘두르며 사내들을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어휴, 멍청한 영감탱이들 나이만 지지리 쳐먹어가지고."
"오늘도 수고가 많으시군요."
"아, 스웬트 씨. 이제 오시나요?"
그제서야 아르텐을 발견한 그녀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그녀의 이름은 에린, 이 곳 장미여관 주인의 딸이였다. 아르텐이 이 곳에 머문지도 벌써 몇 일이 지났지만 그는 아직도 눈앞의 여인이 포악한 성격인지 아니면 상냥한 성격의 소유자인지 종체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한 쪽 손으로 여관의 문을 열며 에린에게 손짓했다.
"밤공기가 많이 차군요. 감기 걸리시기 전에 먼저 안으로 들어가세요."
"어멋, 감사해요."
그녀는 방금 전 주정객들을 내쫓을 때와 180도 바뀐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린의 뒤를 따라 여관 안으로 들어가자 지독한 술냄새와 함께 오래된 나무냄새가 아르텐의 코를 찔렀다.
"어이, 에린! 사윗감이라도 낚아온 거야?"
"얼굴도 반반한게 잘 어울리는데?"
"우리같은 아저씨들은 싫고 젊은 놈은 괜찮다는거야? 하하!"
아버지 뻘되는 주정객들의 짓궃은 농담에 에린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모두 닥치고 술이나 쳐마셔요!"
"하하하!"
"에린도 결국엔 소녀였구만! 으하하!"
비어있는 테이블에 적당히 앉은 아르텐은 여관 안을 둘러봤다. 장미여관은 전형적인 2층 여관집으로 2층은 투숙객들이 머무르는 여관방들이 있었고 1층에는 투숙객들과 손님들이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식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근방에서 유일하게 정통 벌꿀 맥주를 제대로 만들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서 그런지 여관에는 하룻밤 묵으려는 투숙객들보다는 술 마시러 온 사람들이 더 많았다. 사람들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던 그 때 갑자기 그의 바로 앞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올린 아르텐은 자신의 앞에 서있는 에린을 발견했다.
"자, 그렇게 뚱하게 앉아있지만 말고 한 잔 마셔요."
탁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앉아있는 테이블 위에 커다란 유리 맥주잔이 올라왔다. 벌꿀 맥주로 꽉 찬 잔에서 하얀색 거품이 떨어지며 나무 테이블을 적셨다.
"저는 맥주 주문한 적 없는데요?"
"매일 딴 사람들 술마시는거 손가락 빨면서 구경하는게 불쌍해서 한 잔 주는거에요."
에린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어깨에 손을 가져다대며 그에게 말했다.
"휘유~ 에린이 공짜로 술을 주다니. 내일 아침에는 해가 아니라 달이 뜨겠구만."
옆의 테이블에서 휘파람 소리와 함께 그녀를 놀리는 말소리가 들렸지만 에린은 상냥히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드는 걸로 대답하며 다시 주방으로 사라졌다. 잠시 멍하니 맥주잔을 바라보고 있던 아르텐은 이내 맥주잔을 들고 입에 가져다댔다.
잔을 기울이자 차가운 맥주가 그의 목을 타고 내려가 빈 속을 채웠다. 맨 몸으로 얼음목욕을 하는 것만 같은 시원함에 아르텐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맥주를 마셔본 경험이 없었다.
북방의 척박한 땅에서는 맥주의 주재료인 보리와 같은 곡물을 경작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북방인들은 주로 말의 젖을 발효시켜 만든 마유주(馬乳酒)를 마셨다. 동물의 젖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짝 역한 맛이 나는 마유주에 비해 맥주는 꽤나 달콤했고 뒷맛이 깔끔했다.
'마유주보다 백 배는 나은 것 같은데?'
서샤인들이 왜 이렇게 술을 좋아하는지 살짝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된 그는 잔을 마저 비운 후 품 속에서 연초를 꺼냈다. 그가 왼손을 연초 앞쪽으로 살짝 갖다대자 파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연초에 불이 붙었다.
"어이, 너무 많이 마신거 아니야?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고."
"난 아직 시작도 안했어? 자네가 술에 약해진거 아니야?"
모두가 웃으며 술을 마시고 음유시인은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노래하고 있었지만 아르텐은 이 평범한 모습 뒤에 숨겨진 진실을 알고있었다. 이들 중 한 명은 양 떼 속에 숨어있는 하얀 늑대였다.
아르텐은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코트 안 쪽에서 자그마한 돌덩어리를 꺼내들었다. 그가 품 속에서 꺼낸 돌은 겉으로 보기에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여느 평범한 돌덩어리와 다름없었지만 실제로는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근방에 있는 괴수나 돌연변이의 존재를 감지하는 '진실의 돌'이였다. 몇 백년 전 대륙을 호령했던 대마법사의 축복을 받은 이 마석은 이제는 대륙 전체에 10개도 채 남아있지 않을만큼 희귀한 물건이였다.
'진실의 돌'은 외형상 평범한 인간과 거의 동일한 웨어울프나 뱀파이어 같은 돌연변이들을 구별하는데 최적화된 마석으로 이단심문관들만이 소지할 수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특수한 임무를 수행중인 이단심문관들만 가능했다. 도시에 들어온 이후부터 빛을 발하던 진실의 돌은 이 곳 장미여관 앞에서 터질 듯이 밝은 빛을 뿜어냈다.
어쩌면 바덴에 온 지 일주일도 안돼서 마녀를 사로잡을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아르텐은 입에 담배를 꼬나문 채로 오른쪽 손 아래에 달려있는 로커스트 석궁의 볼트를 살짝 조였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