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아무런 계획없이 손 가는대로 썼었는데 채 20장을 넘기지 못하고 포기하게 되더군요. 그 이후로는 스토리라인과 세계관을 미리 완벽하게 정해서 쓰려고 했는데 오히려 설정놀이(?)라고 해야될까요 재미있는 글보다 세계관을 짜는데 더 집중하게 되서 결국 이도저도 안되더군요. 일상에 지쳐서 쓰기 시작한 글이지만 조금 쓰다보니 적당한 설정이나 대강의 스토리가 머릿속에 그려져서 재밌게 작업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자작글이니 다른 분들께 보여드리기 살짝 민망한 면이 없잖아 있으나 한 번 읽어주시거나 감상평을 짧게라도 적어주실 수 있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문맥상 어색하다거나 대화체, 서술하는 방식 어떤 것이든 이상하다고 생각하시는 점은 마음껏 비판해주셔도 괜찮습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게 깔려있는 어둠 속에서 수 십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건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칠흑색 로브를 둘러싼 사내들 사이로 한 여인이 숨을 헐떡이며 필사적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이제 갓 스무살이나 됐을까 싶을 정도로 앳되어 보이는 여인의 품 속에는 작은 갓난아이가 안겨있었다.
잡히면 죽는다. 죽음이야말로 모든 생명체가 느끼는 가장 원초적인 공포였다. 여인의 품 속에 안겨있는 아기도 자신을 둘러싼 그런 음산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잠에서 깨 요란스런 울음소리를 내며 어미의 젖을 찾았다.
하지만 요람 밖에서 아기를 반기는 것은 어미의 젖이 아닌 사막의 매서운 모래폭풍이였다. 모래가 얼굴을 스치며 지나가자 아기는 화들짝 놀라 다시 여인의 품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으며 온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근처의 대지는 이미 대부분 사막으로 변한지 오래였고 해가 떨어진 후에는 동상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온도가 급격하게 낮아졌다. 하지만 지금 사막 위를 달리고 있는 이들에게 그런 자잘한데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운명의 산이 나온다! 쉬지 말고 달려라!"
로브를 둘러싼 자들 중 가장 앞에서 달리고 있던 사내가 뒤의 일행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있는 힘을 다해 달리고 있는 이들 뒤로는 수 십 명의 현상금 사냥꾼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그들이 타고있는 두더지 같이 생긴 생명체인 타우넨은 사막 위를 미끄러지듯이 질주하며 빠른 속도로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곤충들의 울음소리만이 잔잔하게 울려퍼지던 사막에는 이제 타우넨이 모래를 훑으며 내는 기괴한 소리와 사내들의 고함소리로 가득찼다.
"가운데에 있는 여자가 아이를 가지고있다! 여자를 노려라!"
"예!"
서로의 얼굴이 선명히 보일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지자 헌터들의 대장이 허리춤에서 석궁을 꺼내들며 소리쳤다. 수 십년간 사막에서 살아오며 사람을 사냥해온 그들답게 격하게 흔들거리는 타우넨 위에서 석궁을 꺼내 조준 후 발사하는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1분도 채 되지 않았다.
"위험해!"
뭔가 빠른 속도로 바람을 가르며 날라오는 소리가 들리자 사내 몇 명이 재빨리 몸을 날려 여인을 감쌌다. 날카로운 쇠뇌가 로브를 뚫고 들어와 그들의 배와 다리 곳곳에 박혔다.
촉 끝에 묻어있던 신경독이 혈관을 통해 순식간에 몸 전체에 퍼지면서 쇠뇌를 맞은 이들은 힘없이 사막 위로 쓰러졌다. 그들은 자신들을 힐끗 바라보는 일행들을 향해 비장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죽음 이후에도 모든 것을 길로스에!"
"그대의 승리가 영원의 신전 위에 새겨지길."
나머지 사내들은 쓰러져있는 동료들을 향해 나지막이 축복의 말을 속삭이며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그들에게 동료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잠시라도 머뭇거리다간 모두 죽을 수 밖에 없다는걸 그들 스스로가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
몸에 쇠뇌가 박힌 채 쓰러진 이들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타우넨들을 담담히 바라보며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짧은 순간동안 엄청난 양의 마나가 그들 몸 속에서 요동치며 식은 땀이 그들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고 쇠뇌가 박힌 팔다리에서 핏물이 봇물터지듯이 쏟아져나와 대지를 붉게 적셨다.
"다 짓밟아 버려!"
타우넨의 거대한 몸통이 그들을 으스러뜨리기 바로 직전 그들의 몸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엄청난 폭발이 주변을 뒤흔들었다. 마치 두 눈으로 태양을 직접 쳐다보는 것만큼이나 눈부신 빛이 사막 전체를 밝혔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이어지는 진동에 사막의 드래곤이라고 일컬어지는 타우넨들조차 패닉에 빠진 듯 사방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고 모래 폭풍이 점차 사그라들면서 그들 주변의 참혹한 풍경이 드러났다. 수 십명에 달하는 헌터들이 폭발에 휩쓸려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다. 방금 전까지 그들이 있었던 곳 근처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난 내장과 뼛조각들만이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을 뿐이였다.
"싸이커다! 놈들의 자폭에 휘말리지 마라!"
헌터들이 채찍을 휘두르며 고함치자 그제서야 타우넨들이 진정된 듯 몸을 추스렸다. 하지만 타우넨과는 별개로 헌터들이 방금의 폭발로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그들에게 있어서 싸이커는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존재였다.
강대한 마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자. 오랜 옛날, 싸이커들 한 명 한 명이 영웅으로 칭송받을 때도 있었지만 거의 씨가 말라버린 지금은 그저 마력을 주체하지 못하는 괴물들에 불과했다.
'제기랄, 놈들 중에 싸이커가 있었다니.'
헌터 일행의 맨 앞에서 타우넨을 이끌던 사내가 욕설을 내뱉었다.
헌터들은 단순히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는 사회 최하층에 불과했다. 의뢰주들은 푼돈을 던져주며 위험한 일들을 떠맡겼고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가장 약한 싸이커조차 평번한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초인이였다. 싸이커 한 명을 잡으려다가 그들 일행 전체가 죽을 수도 있었다. 헌터는 동료가 죽으면 그 가족들을 대신 보살펴주는 관습이 있었다. 방금 전 죽은 동료 헌터들의 숫자만 해도 이미 수 십.
지금 당장 의뢰 성사금을 받는다 해도 죽은 이들의 가족을 보살피는데 전부 다 쏟아부어야할 지경이였다. 살아남은 헌터들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봤지만 그도 억울할 따름이였다.
목표가 싸이커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미치지 않고서야 의뢰를 맡을리 없었다.
'이쯤에서 포기해야 되는건가.'
그는 잠시 멈춰서서 고민했지만 좀처럼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들의 의뢰주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자였다. 이대로 의뢰를 포기하고 마을로 돌아갔다가는 돈을 받는건 둘째치고 경비대에게 끌려가 모두 처형당할 수도 있었다. 그들에게 돌아간다는 선택권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머뭇거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의 사냥감은 저 멀리 도망치고 있었다. 이내 마음을 굳힌 그는 채찍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공격대를 둘로 나눈다! 1,2분대는 나를 따라서 놈들을 추격하고 3분대는 놈들의 경로를 우회해서 운명의 산으로 간다!"
대장의 명령에 따라 타우넨 수 십마리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대지가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진동했다. 그들이 떠나간 자리 뒤로는 언제 피냄새를 맡았는지 벌레떼가 몰려와 시체들을 뒤덮기 시작했다.
-17년 후-
"아이작! 빨리 일어나, 해가 벌써 중천에 떠있다!"
캐롤의 계속되는 외침에 아이작은 자꾸 감기려하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해가 뜬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커튼 사이로 한 줄기의 햇빛이 들어와 아이작의 좁은 방을 비추고 있었다.
그의 방은 집 2층에 있는 다락방이였고 방 안에 있는거라고는 책상 한 개와 몇 권의 책뿐이였지만 좁은 방은 이미 발 디딜 곳 한군데 없이 꽉 차있었다.
아이작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책들을 밟지 않도록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며 방문을 열고 나갔다.
"지금 내려가요!"
아이작은 잠에서 덜 깨 감각이 없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며 계단을 내려갔다. 부엌으로 들어가자 방금 막 만들었는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스프와 큼지막한 빵 덩어리가 그를 반겼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에 아이작은 어머니에게 인사하는 것도 까먹은 채 냅다 의자에 앉아 스프를 들이켰다.
"앗, 뜨거!"
"너는 어떻게 18살이나 먹은 애가 아직도 어린애처럼 먹니?"
캐롤은 그런 아들의 모습이 꽤나 웃긴 듯 웃음을 터뜨리며 빵을 잘라 그에게 건넸다. 아이작은 그의 앞에 놓여진 빵 한 덩어리를 집어들며 그제서야 그녀에게 아침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안녕히 못 잤다, 어저께 약초 정리를 모두 끝내놓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꼬맹이가 누구였더라?"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에 쉬지 않고 음식을 입에 쑤셔넣던 아이작의 손이 살짝 움찔거렸다.
"그게, 어저께 으깨던 버섯 중에서 독버섯이 몇 개 있었는지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져 가지고..."
"그럼 해 뜬 지 세 시간이 넘는 지금까지 잠을 잔 것도 독버섯 때문이겠구나?"
"네! 네, 그렇죠."
어색하게 웃는 아이작을 잠시 노려보던 캐롤은 이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어떻게 우리 아들은 이렇게 거짓말을 못할까. 책 읽는건 상관없지만 너무 밤 늦게까지 읽으면 안된다?"
"네..."
귀엽다는 듯이 미소지으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캐롤의 모습에 아이작은 왠지 모르게 분했지만 그녀의 말이 그다지 틀린 것도 아니였기 때문에 아무런 대꾸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빵을 스프에 찍어먹었다. 솔직하고 단순한 그의 성격에 거짓말하는 것은 생각보다 무척 어려운 일이였다.
아이작이 마지막으로 남은 빵조각을 입 안에 털어넣을 때 붉은 머리의 소녀가 하품하며 부엌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15살 정도 되어보이는 소녀는 아이작과 마찬가지로 방금 전에 잠에서 깻는지 반 쯤 감겨있는 눈을 천천히 비비며 둘에게 아침인사를 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넬리도 잘 잤니?"
"네."
멍하니 부엌을 훑던 그녀의 시야에 스프 그릇이 들어오자 반쯤 감겨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동그래졌다.
"그거 혹시 옥수수 스프에요?"
"응, 넬리가 좋아하는 허브도 많이 넣었단다."
"와! 아줌마 최고! 정말 사랑해요!"
캐롤의 말을 들은 넬리는 잠에서 완전히 깻는지 양 팔을 벌리며 의자 위에 앉아있던 캐롤을 끌어안았다. 캐롤은 넬리의 붉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머리가 벌써 푸석푸석해졌구나. 좀 있다 목욕하고 오면 아줌마가 빗질해줄게."
"네!"
힘차게 대답한 넬리는 의자에 앉아 힘차게 스프를 퍼먹기 시작했다. 숟가락이 몇 번 들락날락하자 그릇 한가득 담겨있던 스프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멍 때리며 그 엄청난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작이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말했디.
"너는 여자애가 무슨 오우거처럼 음식을 먹냐?"
"오우으거어?"
입에 한가득 빵을 집어넣던 넬리는 고개를 들어 아이작을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으악!"
다음 순간 아이작은 자신의 발을 움켜쥐며 비명을 질렀다.
"오우거 같아서 미안하네요!"
아이작의 발을 '살포시' 짓밟은 넬리는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스프를 흡입하는데 집중했다. 단순한 엄살이 아니라 진심으로 아팠는지 잠시 자신의 발을 쓰다듬던 아이작이 그녀에게 뭐라 소리지르려던 그 때 캐롤이 먼저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다 오늘은 잊지말고 집에 일찍 들어와야 된다."
"오늘이 망자의 날이였나요?"
"응, 오늘이야."
사람들은 보름달 뜨는 날을 '망자의 날'이라고 불렀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숲 속 깊은 곳에서 잘 나오지 않던 웨어울프나 오크 같은 몬스터들이 마을까지 내려와 사람들을 해쳤고 몬스터들뿐만 아니라 무언가에 홀려 숲 속으로 들어가 그대로 돌아오지 않은 마을 사람들 또한 한둘이 아니였다.
그래서 오늘처럼 보름달이 뜨는 날에는 혹시모를 위험에 대비해 마을의 사내들이 3,4명씩 조를 짜서 경비대와 함께 마을 주변을 순찰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아이작 또한 오늘 처음으로 야간 순찰조에 포함됐다.
"아이작, 밥 다 먹었으면 따라오렴. 넬리는 누가 밥 안 뺏어가니깐 체하지 않게 천천히 먹고."
"네."
넬리는 알겠다는 듯이 대답했지만 여전히 숟가락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게 바로 진정한 언행불일치구만.'
아이작은 넬리의 천역덕스러움에 감탄하며 캐롤을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
"이게 뭐에요?"
거실로 들어간 아이작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의자 위에 놓여져 있는 한 벌의 가죽갑옷이였다. 아이작은 가죽이나 갑옷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가죽치고는 상당히 매끈하고 반들반들한 표면을 봤을 때 갑옷이 단순히 무두질만 한 싸구려가 아니라 기름에 몇 일간 푹 삶아 만든 보일드 레더 아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대로 만든 보일드 레더 아머는 한 벌에 최소 100레티나가 넘었고 심지어 개중에는 강철 갑옷보다 비싼 물건도 존재했다. 캐롤과 아이작, 넬리가 다함께 운영하는 약초 가게인 '미녀 약초점'의 일년 수입이 대략 50레티나였으니 지금 그가 들고있는 가죽갑옷은 사실상 가게의 이 년 매출분에 달했다.
아이작이 살짝 떨리는 두 손으로 갑옷을 집어들자 손가락 마디 끝에서 가죽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촉감이 느껴졌다.
"엄마, 이건..."
"오늘 너 순찰 할 때 입으라고 잭 아저씨에게 부탁해 몇 일 동안 파라핀 기름에 삶아 만든 갑옷이란다. 한 번 입어보렴."
그녀의 말에 아이작은 갑옷을 들어 몸 위에 걸쳤다. 너무 딱딱해서 가죽이라기보다는 금속에 가까울 정도였지만 착용감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몬스터 토벌을 위해 가끔씩 마을을 지나가는 기사들을 아이작과 마을의 아이들은 동경에 가득찬 눈으로 구경하곤 했다.
그 어떤 공격이든 거뜬히 막아낼 수 있을 것만 같은 풀프레이트 아머는 단순히 그 자체만으로도 위용이 넘쳤다.
비록 가죽이지만 값비싼 보일드 레더 아머를 입고있다는 사실에 아이작은 왠지 모를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비싼걸 받았다고 어린애마냥 좋아할만큼 아이작은 어리지 않았다.
넬리와 함께 캐롤을 도와 약초점을 운영하면서 그도 약초점의 수입이 어느 정도인지는 지레짐작으로 알고 있었다.
"이거 되게 비싼거 아니에요?"
캐롤은 그런 아이작의 말을 듣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작, 네 목숨보다 비싼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단다."
"엄마, 저도 이제 19살이에요. 굳이 이런거 안 사주셔도 오크 한 두 마리 정도는 거뜬히 물리칠 수 있다고요."
아이작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낯 부끄러웠는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여태까지 그의 검술 훈련 상대라고는 동네 경비대장인 헨슨과 뒷마당 장대에 걸려있는 허수아비가 전부였다. 주변에 몬스터 군락이 많은 개척 마을의 특성 상 대부분의 아이들은 걸음마를 뗀 순간부터 기본적인 검술을 익혔지만 당장 먹고살기 바쁜 와중에 검술을 배울 여유는 그리 많지 않았다.
캐롤이 남아있는 거의 전재산을 쏟아부어서 이 갑옷을 산 것은 단순히 오늘 순찰을 돌 아이작이 걱정되서가 아니였다.
'아이작...'
캐롤은 오늘 밤 벌어질 일을 알고있었다.
그녀는 오늘 죽는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아는 것보다 더 끔찍한 고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매일 밤 눈을 감을 때면 피범벅이 돼 쓰러져있는 자신과 그런 옆에 주저앉아 있는 아이작의 모습이 보였다. 슬픈 듯 울부짖는 아이작의 옆에는 넬리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매번 그 광경을 볼때마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공포심으로 인해 생겨난 꿈이라는 것을 자각했지만 한없이 몰려오는 공포와 슬픔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영원처럼 느껴지던 꿈이 마침내 끝나고 잠에서 깨 아이작과 넬리의 자는 모습을 볼 때면 방금 전 봤던 모든 것들이 한낱 악몽에 불과한 것만 같았다. 아이작과 넬리는 지금까지 그녀의 삶을 이끌어준 원동력이였다. 그 둘마저 없었더라면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미쳐버렸을 것이다.
비록 스스로 낳은 것은 아니지만 아이작과 넬리 두 명 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녀의 소중한 자식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막상 죽을 날이 다가오자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더이상 둘의 미래를 함께 할 수 없다는 상실감이 그녀의 가슴을 더 크게 울렸다.
'진짜...오늘일까?'
여태껏 그녀가 지켜봤던 사람들 중 예언을 피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예언은 절대적이였고 결코 회피할 수 없었다. 그저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유일한 길이였다. 그 누구보다도 그 점을 잘 아는 캐롤도 정작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자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아이작에게 모든걸 털어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만의 하나라도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녀는 오늘 살아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제와 같은 일상이 계속 이어지고 아이작과 넬리는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겠지.'
하지만 운명이 바뀌지 않는다면? 아이작은 알면서도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져 평생을 고통받을 수도 있었다. 운명이 뒤바뀌면서 그녀가 아닌 넬리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어쩌면 아이작이 그녀 대신 죽게될 수도 있었다. 한 가지 생각이 또다른 생각을 물고 이어지면서 결국에는 아무런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헨슨한테 자랑하고 올게요!"
난생 처음으로 가지는 갑옷이 꽤나 마음에 드는 듯 소리치며 문 밖으로 뛰쳐나가는 아이작의 등을 향해 캐롤은 무의식적으로 팔을 뻗었지만 이미 둘 사이의 거리는 멀어져 있었다. 마을 저편으로 아이작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부디 아이작과 넬리의 앞에 놓여진 운명을 축복하길."
그녀는 7대 신들의 이름을 차례로 되내이며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기도문을 몇 분 정도 암송하자 불안했던 마음도 천천히 안정됐다. 캐롤은 자신의 목걸이를 풀며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아직 작별인사를 할 사람이 남아있었다.
"아이작, 헨슨이 널 찾더구나!"
"네! 알았어요!"
갑옷을 입은 마을 구석구석을 뛰어다닌 아이작은 고개를 내려 다시 한 번 자신의 갑옷을 구경했다. 곳곳에 정교하게 이어져있는 이음새는 한 눈에 봐도 엄청난 노력과 기술의 결과물이였다.
'이렇게 비싼 갑옷을 사주실 정도로 걱정되신 걸까?'
아이작의 눈 앞에 씁쓸한 표정으로 웃던 캐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확실히 오늘이 그의 첫번째 야간순찰이였지만 보통 신참들은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숲 외곽보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마을쪽을 순찰했다. 몬스터 몇 마리야 출몰할 수 있었지만 사내 몇 명이 달려들면 거뜬히 물리칠 수 있는 정도였다.
"여, 아이작 갑옷 멋진데?"
"어디 시체에서 벗겨온거 아니야?"
"쟤는 겁 많아서 시체 근처에 가지도 못할걸."
마당 앞에 젖은 빨래를 걸어놓던 아낙네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다같이 아이작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잠시 길 옆에 멈춰선 아이작은 자신의 갑옷을 손으로 퉁퉁치며 자랑스럽다는 듯이 그녀들을 향해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