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년 12월 실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고 왕권 강화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국방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과정 중 일어난 병인양요는 대원군 정책의 주된 근거로 자리 매김하였다.
외침이 기우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으니 말이다.
대원군이 집권 초기부터 국방력 강화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해안 경계를 강화하고
서양인들과의 교류를 차단하는 정도에만 머물렀다. 그러나 청나라가 서양열강에 굴복한 것과 이양선의 출몰이
잦아지고 러시아가 남진해온 것,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벌어지자 군사정책을 전환하였다.
국방정책 전환을 잘 보여주는 것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 직후인 1866년 7월에 훈련대장 신관호가 건의한
군무육조이다. 군무육조는 1867년 1월에 약간 수정을 거진 후 정식으로 채택되어 대원군 국방정책의 근간이
되었다. 군무육조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1조는 중앙군은 정예병을 육성하고 군대의 규율이 무너졌으므로 병사를 다시 선발하여 규율을 확립하고
총기와 탄약을 정비하자는 것
2조는 포수들을 군으로 편입시켜 교대 근무를 시키자는 것
3조는 변방 지역에 백성이 구축하는 보루(민보)를 설립하여 유사시 사용하자는 것
4조는 오가작통법에 근거한 민병제도를 실시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병장기를 지급하고 평상시에도 훈련하게
하자는 것
5조는 백성이 궁핍하고 정치가 부패하면 군대에도 문제가 생기니 이를 살피자는 것
6조는 항상 방비를 갖추고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자는 것이었다.
대원군은 신관호의 건의를 기본으로 하여 군제개편과 군사력 강화책을 실시하였다.
금위영과 어영청을 개편하여 향군이 서울에 번상하는 것을 멈추고 금위영과 어영청에 포수를 몇 초 더 갖추게
하였다.(1초는 125명) 이 조치로 경군에 포수를 중심으로 4초가 늘어나면서 이전 향군이 번상하던 것에 비하여
정예병이 자리잡았다.
이러한 군사력 강화에는 재원 마련이 필수적이었는데 이는 우의정 김병학의 건의로 확보할 수 있었다.
김병학은 염장세와 어장세를 군비에 충당하자고 건의하였고 대원군은 이를 즉시 채택하였다.
국방력 강화 추진은 삼군부가 중심이 되었다. 삼군부는 의정부와 대등한 지위로 군사업무를 총괄하였다.
삼군부는 중요 무관직과 변경 수령의 천거, 변방 진지 설치와 병력 배치 총괄, 각 군영의 관리, 군기 제조 등을
담당하였다. 이렇게 기본방침과 추진 주체가 정해지자 국방력 강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국방력 강화는 훈련도감과 용호영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군과 강화도 진무영, 포군, 북방 변경이 중심이 되었다.
중앙군은 대원군 집권 초기 중앙군은 세도정치기를 거치면서 거의 고사상태였다. 기록에 따르면 중앙군은
약 16,000여명에 불과하였는데 그나마도 철저한 훈련은 커녕 대부분이 노약자들로 이루어져있었다.
대원군은 실태를 알자 노약자를 젊은이로 대체하고 훈련을 강화하며 무기관리를 철저히 하도록 하였다.
급한 불을 끄는 것과 동시에 중앙군 개편 작업도 시작하여 훈련도감은 정예병 20초(2500명)를 만들었고
금위영과 어영청은 포군을 증강하고 훈련을 장려하였다. 북한산성을 방어하는 총융청은 포수 중 뛰어난 이들을
특별히 1초(125명) 선발하여 병력을 증강하였다. 금군(禁軍)인 용호영은 아병군 60명, 권사 복마군 5명,
뇌자 10명, 순령수 10명, 지곡관 12명, 기패관 15명, 기타 병졸 20명을 보충하였다. 용호영은 대원군 집권기간
내내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 궁궐 수비강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병력이 늘어났다.
1869년에는 총 약 60여명이 1870년에는 약 90여명이 늘어났다.
대원군은 집권 기간 동안 중앙군 중 훈련도감과 용호영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 훈련도감은 훈련과 병기 비축,
정비를 통해 다른 중앙군 보다 정예군으로 자리잡았고 용호영은 금군으로 왕실의 친위군으로 재정비하여
왕권강화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중앙군에 우선순위가 밀렸지만 대원군은 지방군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지방군 강화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강화도에 진무영을 설치한 것이다. 강화 진무영은 병인양요때 프랑스 함대가 후퇴한 직후에 설치되었는데
강화유수가 진무사를 겸하게 하였다. 강화 진무사를 보좌할 부관은 경력이 긴 무관을 임명하도록 하여 군무를
보좌하도록 하였다. 강화진무영은 이전 경기수영하에 있던 진을 옮겨서 포군을 중심으로 약 3,300여명에
달하였다. 강화진무영은 다른 지방군에 비하여 특별히 포수를 위주로 구성되었으며 민병 수백명도 속해있었다.
효충사나 장의사라고 이름 붙여진 민병은 군량과 비용을 스스로 내고 훈련을 받던 이들로 강화진무영에
320여명이 속해있었다. 숫자는 알 수 있지만 자세한 편제는 전하지 않아 상설 의병격인 민병대로 본다.
다만 이들 민병대는 훈련상태나 규율이 썩 좋지는 않았다.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강화진무영 뿐 아니라 4도 유수부(수원, 광주, 강화, 개성)에 수시로 관리를 파견하여
지방군을 점검하고 훈련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이는 수도 서울 인근의 4도 유수부의 지방군의 질이 매우
떨어져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앙군과 서울 인근의 지방군 강화가 빛을 발한 것은 신미양요였다. 신미양요 당시, 조선은 서울과 강화도
일대에 중앙, 지방군을 총 망라하여 약 2만여명을 배치 할 수 있었다. 특히 그동안 양성한 포수 2천여명은
강화도의 각 진에서 미군과 격전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방비에도 불구하고 신미양요 당시 조선군은 미군을
상대로 처참한 교환비를 남겼다. 미군은 조선이 준비했던 포대들을 파괴하고 돌아갔다.
신미양요는 대원군에게 군사력 증강이 더 필요하다는 교훈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1873년 실각할 때까지
대원군은 강화도 군비를 위한 특별세를 걷고 군포를 양반에게도 걷기 시작하였으다. 이를 밑거름으로 삼아
진무영에 20초의 군사를 증강하였고 전국 고을마다 포수를 육성하도록 명령했다. 대원군 실각 때까지
전국 각 지역에서는 포수 약 3만 여명이 육성되었다.
다만 포수 위주로 병력이 증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는 명확했다. 훈련방식이 낡고 병장기가
전근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지방군 강화에는 군을 강화한 것뿐 아니라 해안방어와 국경방어를 강화한 조치도 있었다.
대원군은 해안인 태안, 진도 등지에 진을 설치하였으며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두만강 변의 파수처와 보루를
보수하도록 명령했다. 특히 두만강 변은 병자호란 이후로 세도정치를 거치면서 관리가 소홀하여 거의
무너진 상태였기 때문에 대원군기 두만강 변의 보루 등 국경선을 강화한 조치는 여러모로 효과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