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중순이었음. 실업계 3학년은 대부분 10월 이후를 기준으로 취업에 나가게 됨. 여친도 취업을 나가게 되었는데 어차피 내신 1등급에 수능도 잘 보았기 때문에 대학을 골라서 가는 지라 집 근처 빵집에서 한가롭게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음. 학비도 벌 겸 해서.
이제 곧 있으면 여친은 졸업을 하게 되니 나만 덩그러니 놓여진 것 같은 기분이었음. 여친은 그런 내 우울한 기분을 알고 있었기에 위로해 주었심.
여친 : 대학 가도 남자는 쳐다도 보지 않을 테니까, 안심하셔. 나 : 누나야, 나 버리면 안된다? 여친 : 너야말로 탱탱한 얘들한테 한 눈 팔지마. 그랬다간 니 인생 끝이다? 나 : 졸업하면 누나 서울로 올라가잖아. 그럼 쉽게 볼 수도 없는데. 여친 : 뭐... 그렇기야 하지. 하지만 방학 때마다 내려 올 테니까.
여친과 같이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가니, 속이 참 답답했음. 하지만 난 일편단심임. 이 세상에 나 만큼 한 여자에게 충성하는 남자 있으면 어디 나와보심. 10년을 넘으면 인정 ㅋㅋ
어쨌든 여친이 취업을 나간지 거의 2주 째 접어 들었을 때 나는 여친이 목표로 삼은 서울의
모 대학에 진학하기로 마음 먹게 되었음.
마침 내 전공 과도 있었음. 완전 일석이조 아님? 근데 친구 놈들은 이런 나의 생각을 아주
악질적인 스토킹이라고 매도하는 것이 아니겠음? 이것들아,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
하여간 그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내신 1등급이 되어야만 했고 수능도 잘 봐야만 했음.
그래서 일단 앞서 망친 시험(완전 시망)을 만회하기 위해 1학년 마지막 기말고사에 전력을
다하기로 했음. 덩달아 친구 놈들도 끌어들여 같이 공부하게 되었음.
이 과정까지 온 갖 회유와 협박, 설득이 있었음. ㅋㅋㅋㅋ
공부 장소는 교내의 도서관임. 도서관의 도 자도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던 내가 여친 때문에 도서관을 출입 할 줄은 생각도 못했었음. 어쨌든 나, 한 다면 하는 남자임. 누구도 날 막을 수 없음. 내가 집념 빼면 시체임. ㅋㅋㅋㅋ
A : 진짜, 독한 놈이야. 이거. B : 지 혼자 할 것이지, 우리까지 끌어들이냐? 나 : 이 썩을 놈들아. 공부해서 남 주냐? 1학년 때부터 착실하게 공부해야 나중에 후회 않한
다. 틀림없이 내게 고마워해야 될걸? C : 타로녀에게 점 배운 이후 이 시키 말빨 진짜 좋아졌네. 나 : 아닥하고 일단 시험범위부터 체크하자고.
나 없었으면 틀림없이 이름없는 지잡대나 갔을 놈들임. 내가 하도 닦달하고 같이 공부하자고 했기 때문에 나중에 간신히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하게 된 것임. 근데 이 놈들이 아직도 은혜를 안 갚음. 망할 놈들.
어쨌든 우리 학교 도서관은 꽤 규모가 컸음. 그래서 이용하는 학생들도 많았는데 기말고사
시즌이다 보니, 그 숫자는 더욱 많았음. 게다가 11시까지 이용하게 해줬으니, 여러모로 편리했음. 돈 없고 가난한 중생들인 우리는 학원에 다닐 생각은 하지 않았음.
B : 야, 근데 들었냐? 여기 자정만 되면 귀신이 나온다는 데? C : 응. 나도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어. A : 야야야, 그거 다 헛소문이야. 귀신은 무슨. 시나락 까먹는 소리야.
공부하다 말고 뜬금없이 도서관에 귀신 나온다는 소리를 하는 친구들임. B와 C는 예전에 귀신에게 된통 당한 전적이 있는지라 그런 것에 관해서는 몹시 예민했음. A는 착각이었었다고 생각하니까, 별다른 감흥도 없는 거임. 공통점이 있다면 니들은 나 때문에 살았다는 거임.
난 단순한 소문이라고 생각했음. 우선 소문의 출처가 불분명했고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각양각색이었음. 그래서 난 단순히 학교괴담 정도로만 생각했음. 며칠 째 같은 소리만 들으니 이젠 신물이 다 날 정도임.
일요일이면 나와 여친은 데이트를 즐겼음. 뭐, 데이트 코스라고 해봐야 시내가 전부였지만
거의 하루종일 붙어다녔고 재밌는 추억도 많이 만들었음. 여친님은 그저 내가 옆에 있는 것이 좋다고 했음. 나도 마찬가지임. 우린 주로 카페를 즐겨 찾았음.
여친 : 공부는 잘 하고 있어? 나 : 엉. 마음 먹고 하려니까, 잘 되는 것 같더라. 도서관이라서 그런지 더 잘 되는 것 같고
여친 : 도서관이라.... 정말 너도 징하다. 대학도 날 따라오려고 하니? 나 : 내가 전공하는 학과도 있으니까. 겸사겸사지. 여친 : 그래. 그럼 자취할 곳을 찾아야겠네? 나 : 나 아직 1학년이거든? 2년이나 남았거든? 합격 한 것 처럼 말하네. 여친 : 난 합격 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게다가 합격하면 말이야, 나랑 같이 자취방에서 살면 되지. 돈도 아끼고 좋잖아? 나 : 누나야. 여친 : 왜? 나 : 만약 같이 살게 되면 야한짓 해도 되나요? 여친 : 네가 하는 거 봐서. 나 : 지구가 멸망해도 반드시 합격 하고야 만다!
ㅋㅋㅋ 단순한 요런 떡밥에 넘어가기도 했음. 그렇게 재미있게 놀고 있었음. 같이 맛있는 점심을 사먹고 영화도 보고 오붓하게 손 잡으며 걸어 보고 몰래 뽀뽀도 해보고 근사한 저녁도 먹고 사우나도 가보고...... 염장질 ㅈㅅ함.
어쨌든 데이트는 무척 좋았음. 데이트가 끝나고 여친 집에서 뒹굴거리며 놀던 차에 여친은
뜬금없이 도서관에 대해 얘기해 주었음. 여친은 도서관에서 항상 행동을 조심해야 되고 주변을 유심있게 살펴 보라고 했음.
그냥 듣지 말 걸. 때늦은 후회를 했지만 이미 늦었심.
여친 : 너, 그거 아니? 도서관에는 영혼이 많다는 거. 나 : -_-...... 여친 : 정색하는 것 봐. 하지만 알아둬야 할 거야. 나 : 모르면 안되나요? 여친 : 아니. 알아야 돼. 나 : 나 도서관에서 공부 중인데. ㅠ_ㅠ 여친 : 사실 난 네가 도서관에서 공부할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거든. 이왕 이렇게 된 거, 도
서관의 비밀 좀 알려주는 게 낫다 싶어서 말이야. 나 : 왜 난 어딜 가든 귀신하고 연관이 있냐. 여친 : 네 팔자지.
내 팔자 오지랖도 넓다는 걸 다시 깨달았음. 여친 말로는 도서관은 고요하고 적막하기 때문에 갓 죽은 영혼들이 머물기에는 아주 좋은 환경이라고 함. 물론 모든 영혼들이 도서관에 모이는 건 아님. 도서관에 모이는 대표적인 영혼들은 바로 공부 때문에 죽은 어린영혼들이라는 것임.
우리 주변에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얘기임. 공부에 비관해서 자살하거나 죽는 일. 그들은 죽어서도 자신이 죽은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시달려야 했던 것을 반복적으로 행한다고 함. 도서관에 모이는 영혼의 유형들은 공부를 하기 위해 머무른다는 것인데 영혼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책을 빼거나 페이지를 넘길 수 없심.
그래서 공부하는 학생의 옆에 가서 같이 책을 본다고 함. -_-......
공부하는 학생들이 가끔 소름이 돋거나 무언가를 느꼈다면 그건 심중팔구 그 주변에 같이 책을 보는 영혼이 있기 때문임. 여친은 이 순수한 영혼은 사람을 해치거나 위협하진 못한다고 함.
하지만 이 영혼이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산 자를 질투하게
되고 그 질투는 원한이 되어 우리가 흔히 부르는 귀신이 된다고 함.
그리고 귀신이 된 영혼은 사람을 해코지 하고 마구 괴롭힌다는 것임.
하지만 모든 영혼이 귀신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음. 그 중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인지하기 전에 사자가 와서 잡아간다고. 그러지 못할 경우 귀신이 되어 사람을 해치는 것임.
처음부터 원한을 가지고 죽은 영혼은 쉽게 귀신이 된다고 하지만 이런 유형은 시간에 따라
귀신이 될지 아니면 사자에 의해 하늘로 올라가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임.
하여간 도서관은 그런 영혼들이 많으니 여친은 혹시라도 그러한 영혼이 보이거나 하면 함부로 건들지 말고 아는 체도 하지 말라고 했음. 잘못하면 신내림을 받을 수도 있고 자신이 죽은 자라는 것을 인지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거임. 그러면 귀신이 되는데 그러기 전에 사자가 와서 잡아가야 함.
나 : 누나야. 그 얘기 대체 누구에게 들었어? 여친 : 예전에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런 것들이 상당히 많이 보이더라고. 그래서 봉명스님에게 물어봤었지. 나 : 그 땡초에게? 대체 그 아저씨 정체가 뭐여? 여친 : 버릇없게 땡초가 뭐니? 법력 높으신 스님에게. 나 : 쩝, 그러면 난 어떻게 해야돼? 여친 : 아마 넌 어르신들이 곁에 계셔서 영혼이 보이거나 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혹시라도
보일 지도 모르기 때문에 특별히 유념하라는 거야. 괜히 죽었는지도 모르는 영혼들을 자극하지 말라고. 나 : 내가 미쳤냐? 그런 것들을 건드리게.
내가 죽으면 죽었지, 설마 그딴 걸 스스로 건드리겠음? 보통 도서관에 걸린 정숙이라는 의미가 참 새롭게 와닿는 거임. 세상 천지에 영혼이나 귀신이 없는 곳은 없다고 했으니, 내가 특별하게 도서관을 피할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음.
다만 아무것도 모르고 같이 공부하게 된 친구들이 좀 불쌍해졌음. 분명 영혼이 옆에서 같이 책을 읽거나 그럴 것이 아니겠음? 여친은 우리 학교 도서관에도 그런 영혼이 많다고 했음. 그럼 십중팔구임. 그래도 같이 늦게까지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았으니 그리 크게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음.
나 : 속 편한 놈들. ABC : 뭐, 임마?
하여간 공부는 계속했음. 어차피 무시하면 된다고 했으니 별 다른 일이야 있었겠음? 편안하게 마음을 먹고 공부를 계속했음. 이제 기말고사거 코 앞으로 다가왔음. 막바지로 테스트를 하고 있었음. 그러다가 천장과 책장 사이에 공간이 좀 있는데 무심결에 그 곳을 보았음.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음.
놀랍게도 그 책장 꼭대기에 엎드려 누워있는 창백한 인상의 남자가 주먹만한 동그란 눈알을 굴리며 그 아래를 지나다니는 학생들을 보고 있었음. 마치 구경이라도 하는 듯이. 순간 놀란 나는 그 귀신에게 시선을 돌렸음.
눈이라고 마주쳤다간 골치 아파짐.
내가 볼 수 있을 정도로 기가 센 귀신이었음. 그 덕분에 나는 사시나무가 떨듯이 벌벌 거렸
음. 다행히 귀신이 내 시선을 느끼지 못해서 아직까진 들키지 않았음. 대신 공부할 기분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아갔음.
솔직히 당장 나가고 싶었으나 내가 이 놈들하고 약속을 한 게 있어서 도서관이 끝나기 전까지 나갈 수 없었음. 사나이 약속을 했으면 목숨만큼 지켜야 한다는게 내 신조이고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인종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인종임.
그런 내가 친구들과 기말고사 전까지 무조건 도서관에서 끝날때까지 공부하기로 거듭 약속했는데 그걸 어길 수는 없었음. 근데 저 망할 귀신이 눈에 들어오니, 정말 환장하는 줄 알았음.
식은 땀이 흘러나오는 것도 모자라 손 끝이 덜덜 떨렸음. 이건 뭐, 중풍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임.
A : 너, 왜 그러냐? 나 : 아무것도 아냐. B : 이 시키! 똥 마려우면 퍼뜩 싸고와! C : 참으면 병된다.
이 시키들이 순식간에 날 웃음거리로 만듬. -_-^
B는 목소리가 제법 커서 근처에 있던 얘들이 모두 듣고 키득거렸음. 하지만 차라리 귀신 보고 놀란 것보다 화장실 가는데 더 자연스러운 것 같았음.
그래서 화장실로 갔음. 근데 가지 말았어야 됐음. 내가 미쳤지.
작은 거 볼일 보고 손을 씻고 있는데 보통 세면대에는 거울이 있잖슴? 그 거울에 비친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음. 내 뒤에 도서관에서 보았던 남자와 다른 장발의 남자가 붉은 눈을 가지고 노려보고 있었음.
방금 전 쌌던 작은 게 다시 찔끔 나올 정도로 졸라 놀랐는데, 난 이미 이딴 놈들과 엮인게
한 두 번이 아니라서 침착하게 모른 척하고 화장실에서 나왔음. 심장은 빨래 방망이로 두들기는 것처럼 뛰었음.
난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휴게실에서 여친에게 전화했음. 지금 시각이 9시였는데 여친은 8시까지 근무하니 집에 있을 것은 분명했음. 내 예상대로 여친은 전화를 받았음.
나 : 누나야. 내 좀 살리도! 여친 : 갑자기 웬 사투리냐? 무슨 일 있어? 나 : 귀신이 두 놈이나 나왔단 말이야.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누나가 와서 좀 없애주면 안
돼? 여친 : 야! 넌 내가 무슨 전문 퇴마산 줄 알아? 귀신만 나오면 다 없애게? 나 : 내가 기댈 건 누나 밖에 없단 말이야. 꺼이꺼이 ㅠ_ㅠ 여친 : 아, 알았어. 울지 마. 에휴, 차라리 도서관에 가지 말라고 할 걸. 네가 보일 정도면
꽤 기가 센 귀신들인가 보구나. 알았어. 30분 안에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나 : 아니, 걸어오면 10분 밖에 안 걸릴 텐데, 30분 씩이나? 여친 : 샤워하느라 화장이 다 지워져서 그래. 맨 얼굴로 가긴 좀 그렇잖아. 나 : 지금 그게 문제냐!? 니 남친이 죽겠생겼다고! 여친 : 죽긴 뭐가 죽어. 일단 끊어 준비 좀 하게. 나 : 여보세요? 잉? 여보세요? 야!!!
또 자기 할 말만 하고 끊는 여친. 이러니 내 수명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음. 별 수 없이 나
는 쭈볏거리며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왔음. 잠깐 쉬는 시간이라고 재밌게 떠들고 있었음. 와, 저 속편한 놈들.
C : 야, 근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냐? B : ㅋㅋㅋ 졸라 큰 건가 보군. A : 근데 표정이 똥 씹은 표정이다? 잘 안나왔냐?
우매한 중생들이 거룩한 나의 고뇌를 알겠음? 그냥 속편하게들 살라고 말해주고 싶었음. 대꾸없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자리에 앉았는데 그 귀신이 아직도 책장 위에 엎드려 누워있을까 싶어 그쪽을 보았음.
아나 ㅅㅂ! 눈이 정면으로 마주친 거임. 순간 속으로 X됐다를 백만 번이나 외쳤음.
그 귀신은 자신의 존재를 알아보는 내게 흥미를 느꼈는지 주섬주섬 책장에서 내려오더니 내 옆에 서는 것임. 이제보니까, 이 귀신. 검은 옷을 입고 있었음. 졸라 무서운 유형 베스트5 안에 드는 그 지랄 같던 귀신 중 하나였던 거임.
B : 잉? 얘 땀 흘리는 것 좀 봐. 괜찮냐, 너? C : 야, 속 않좋아? 소화제라도 줄까? 나 : 괘, 괜찮아. A : 너 내일 병원이라도 좀 가야겠다.
내 인상이 완전히 일그러지고 땀도 뻘뻘 흘리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으니 충분히 친구들은 아프다고 생각 할 수 있었음. 하지만 이것들아 그게 아니야!
그 징그러울 정도로 창백하고 눈알이 큰 검은 옷 귀신은 내 옆에 서서 날 내려보는 것 같았
음. 난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오로지 책과 공책만 바라보며 필기를 하고 있었음.
문제풀이 따윈 꿈도 못꾸는 상태임.
속으로 여친이 제발 빨리 오라고 기도만 했음. 핸드폰을 보니 겨우 5분 지났을 뿐임. 1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음. 근데 이 망할 놈의 귀신이 가만히 옆에 서있을 것이지 허리를 숙이더니 바로 내 얼굴 옆 면을 뚫어지게 쳐다 보는 것이 아니겠음?
와, 진짜 무서워 죽는 줄 알았음. 소름은 소름대로 돋고 땀은 땀대로 흘리고. 하여간 환장하기 일보직전까지 갔음. 하지만 나는 끝까지 버텼음. 침착하게 모른 척을 했기 때문임. 내가 반응을 잘 보이질 않고 다시 허리를 피자 난 그 귀신 놈이 포기 한 줄 알았음.
그래서 좀 안심하려던 찰나에 이 ㅅㅂ놈이 내 책상 밑에서 얼굴을 내미는 게 아니겠음? 그것도 나와 정면으로 눈이 딱 마주치면서. 너무 놀라 그대로 뒤로 자빠졌음. 친구들은 왜 그러냐며 호들갑을 떨면서 나를 부축해 주었음. 하지만 나는 그 귀신과 계속 시선을 마주함.
그 귀신 놈이 피식 웃었던 것은 아직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생생했음.
저게 드디어 자길 볼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에 기쁜 것 같았음. 그 뒤로 귀신은 시도때도 없이 날 놀라게 만들었음. 페이지를 넘기는데 그 다음 페이지 속에 얼굴이 그려져 있다던가, 갑자기 내 발목을 잡다던가. 아니면 내 정면에 있는 B의 얼굴을 핥으며 낄낄 거리기도 했음. 그걸 다 보면서 정말 미칠 것 같았음.
다행히 그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음.
여친 : 곰돌아, 나왔어. 나 : 이제 살았다!
드디어 여친, 아니 구세주님께서 온 것임. 난 너무 반가워서 다른 얘들 시선 따윈 무시하고
여친을 꼭 안아버렸음. 친구놈들은 저게 뭔 남새스러운 짓이라며 질폭함.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하라니까. 여친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음.
여친 : 전에 왔을 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 : 그 귀신 놈 있지? 눈탱이 큰 놈. 여친 : 있어. 그거 뿐만 아니라 귀신으로 보이는 것들이 대 여섯은 돼. 나 : 혹시 장발에 붉은 눈깔 가진 놈도 있어? 여친 : 있어. 상당한 귀신들이네.
다행히 그 귀신들은 여친이 가지고 온 벽조목 때문에 구석으로 도망쳤다고 함. 그것 때문에 기운이 약해진 귀신들이 내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음.
나와 여친이 작게 속삭이며 대화하는 것을 불만있게 보던 친구ABC는 여전히 질폭을 일삼았음. 그러니까, 부러우면 부럽다고 하란 말이다.
여친 : 일단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겠네. 나 : 그래야 돼? 여친 : 사람들 보는 앞에서 퇴마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그건 너만 알고 있어. 나 : 응.
결국 여친과 나는 도서관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음. 여친이 옆에 있으니 정말 안심이 되었음. 근데 여친이 서울로 올라가면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되는데 그때도 이런일이 벌어지면 어쩌란 말인겨? 그럴 때마다 여친은 너무 기대려고 하는 내가 안쓰럽다고 했음.
B : 와, 선배가 알려주니까 이해하기 쉽네요. C : 공부 진짜 잘하시네요. A : 근데 선배 남친은 왜 그렇게 공부를 못한데요? 여친 : 않하려고 하니까, 못하는 거지. 맘 먹고 하면 잘 할 거야. 나 : 들었냐, 이 놈들아!
여친이 공부를 봐주었음. ABC는 아주 좋아 죽으려고 함. 나도 좀 의기양양했음. 어느덧 시간은 11시가 되었고 학생들이 우르르 귀가하기 시작했음. ABC도 주섬주섬 짐을 챙겼음.
나 : 야, 너희들 먼저 가라. A : 이 시키, 둘이 남아서 뭐하려고? B : 야, 뻔 한 걸 묻냐? 므흣한 짓이겠지. C : 이거 몰카라도 설치해야 겠군. 나 : 당장 꺼져, 이 생퀴들아!
친구놈들이 낄낄거리며 먼저 나갔음. 이제 도서관에는 나와 여친만이 남았음. 사람이 많았을 때는 몰랐는데 둘 만있으니까, 장난 아니게 무서워졌음. 내 숨소리도 크게 들릴 정도로 적막한 도서관은 정말 영혼이나 귀신들이 모여들 정도로 지독하게 음산했음.
여친 : 곰돌아. 일단 이걸 입구에 걸어 놔. 나 : 잉? 이건 호랑이 그림이잖아.
여친이 가지고 온 가방에 호랑이 그림이 넣어져 있었음. 일단 난 그것을 입구에 걸어놓았음. 여친은 천천히 도서관의 가장 안쪽을 향해서 걸어갔음. 뭔가를 뿌리는 것 같았음.
내가 따라 가려니까 다가오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발만 동동굴렀음. 도서관을 한바퀴 돌고서 여친은 내게로 돌아왔음. 심력이 소모되었는지 여친은 땀을 많이 흘렸음. 그래서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 줌.
여친 : 다시 샤워해야 겠네. 이 사고뭉치 같으니. 나 : 귀신들은 어떻게 되었어? 여친 : 어떻게 된 거냐면....
여친은 소금을 뿌렸다고 함. 소금은 성수와도 같은 것으로 영혼이나 귀신들이 무척 싫어하는 것임. 게다가 벽조목도 가지고 있으니 결국 견디지 못한 귀신들이 입구로 달아나려고 했음. 하지만 내가 걸어 놓은 그림 속의 호랑이가 나와서 모두 그림 속으로 잡아갔다고.
여친은 그것을 가지고 옥상에서 불 태워버렸음. 이제 귀신들은 무사히 하늘로 올라 갈 것임. 다행히 도서관에서의 일은 무사히 일단락 했음. 난 다음부터 한줌이라도 소금을 가지고 다녀야 겠다고 생각했음.
이 일로 난 아직까지도 소금을 가지고 다님. 혹시 모르는 일에 대비하기 위해서임.
도서관에서 나온 나와 여친은 사이좋게 집으로 향했음. 여친이 이렇게 옆에 있어주면 참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거의 2년 정도는 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에 심히 우울해졌음. 이번 도서관 귀신 사건도 그렇지만, 난 진짜 여친이 옆에 없으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유약하다는 걸 깨달았음.
앞으로 어쩌나 싶었지만 그래도 나는 견뎌보겠다고 생각했음. 이번 일로 나는 어르신들에게 보호를 받아 귀신의 위협이 적었었지만 어르신들보다 힘이 강한 귀신들에게 속수무책으로 해를 당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 계기가 되었음.
여친 : 조심하게 지내면 귀신과 엮일 일은 없으니까. 괜찮을 거야. 뭐, 정말 무슨 일이 있으
면 바람처럼 달려와 줄게. 나 : 이거 왠지 입장이 정 반대네. 내가 누날 지켜줘야 하는데 오히려 누나가 날 지켜주고
말이야. 여친 : 난 어른이고 넌 꼬마거든? 괜히 센 척 하지 말거라. 나 : 알았소, 나이드신 어른님. 여친 : 뭐야? 이게!
어쨌든 여친의 도움으로 나는 도서관에서 다시 무사히 공부를 할 수 있었고 기말고사도 제법 잘 치르게 되었음.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방학이 찾아왔음. 여친은 목표로 하던 대학에 합격하여 2003년 2월 말 대학 근처에 제법 큰 원룸을 얻고 상경하게 되었음. 그 동안 나와 여친은 추억을 만들며 서로가 절대로 잊지 않게 끔 사랑을 나누었음.
여친이 떠나고 한동안 휴우증에 시달렸음. 친구들은 혀를 내둘렀다고 함. 저거 진짜 중증이라고. 마약에 중독된 놈 같다고 함. 그게 바로 금단현상이다, 이 놈들아!
여친이 서울로 올라간 뒤로 내 행동은 대단히 조심스러워 졌음. 조금이라도 이상한 느낌이
드는 곳이라면 접근 하길 꺼려했고 밤늦게까지 놀거나 그러지 않았음. 그래서 한 동안 귀신과 접촉하는 일이 없었음. 하지만 그딴 것 보다는 여친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음.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여친이 대학 라이프를 즐길 시기에 나는 2학년이 되었고 어느 덧 4월이 되었음. 여친은 주말마다 간간히 내려와줘서 정말 꼭 붙어다니며 놀았고 헤어질 때 눈물이 다 날 정도였음. 생각하면 생각 할 수록 진짜 입장이 정 반대임. -_-;;;;;
여친이 보고 싶었지만 이 4월은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슬픔을 안겨준 달이기도 했음.
내가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해왔던 할머니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임. 난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 저승사자를 보았음. 그 저승사자는 귀신과 다른 매우 친숙한 분이셨는데, 바로 내가 어렸을 적 돌아가신 할아버지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