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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간과 괴물의 이야기(2)
게시물ID : sisa_2027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코파카바나
추천 : 10
조회수 : 481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2/05/11 14:43:09
5.18 민중항쟁 사건일지 1979.10.26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하여 피살,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전역 계엄령 선포 1979.12.12 보안사령관 전두환 군부내에서 쿠데타.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장군 체포. 휴전선 전방부대가 불법으로 이동. 1980.4.14 혼미정국 계속되는 가운데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함과 동시 보안사령관 겸임을 유지 4월 중순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범위한 학원가 시위와 노동쟁의 시작됨. 5월 초순 데모 계속 확대, 계엄철폐와 전두환 퇴진 요구 5.15 서울중심가 5만명 시위, 신현확 총리 민주화 가속화 약속 5.16 광주금남로에서 3만명의 학생과 시민 평화적 시위 및 횃불 시위. 양김씨 데모자제 요구, 정부측 답변을 듣기로 함. 5.17 전국에 계엄선포. 모든 정치활동 금지, 대학폐쇄, 정치인 재야 지도자 학생 등 체포구금 5.18 광주에서 1,500여명의 학생들 계엄철폐와 전두환 퇴진 요구 시위 시작. 공수부대에 의한 무자비한 진압으로 수십명의 사망자 속출 5.19 광주에 주둔한 군인들의 구타, 총칼질, 무자비한 진압, 학살이 시작됨. 시민들이 군인들의 만행에 충격을 받고 청년·학생에 합세, 이때부터 민중봉기로 바뀜. 5.20 공수부대의 만행에 대한 소식이 퍼져나감. 10만 이상의 광주시민들 항거에 나섬. 5.21 30만명의 대집회 및 항거. 데모대 군차량 징발 및 무기획득. 군대 시내에서 철수. 전화통화 차단됨. 밤 12시경 시위대 도청 점령. 5.22 시민들 광주 장악. 1만여명 군대 광주외곽 포위. 시민위원회 구성, 군부와 협상시작. 전남 전지역으로 시위 확산됨. 수천명 사망설 퍼짐. 5.24 광주의 5만 시민 우중 시위 감행, 광주의 외곽출입 금지 5.25 3만시민 도청 앞 광장에 집결, 시민위원회의 입장 공식화를 위한 집회. 투항이냐 계속 투쟁이냐, 강온으로 갈라져 갈등이 심각해짐. 5.27 수천명의 군인이 탱크를 몰고 시내로 진입, 군부가 통제권 장악 5.28 수천명 체포 연행·구금·수배시작·김대중 등 사형선고 참 세상은 보기보다 살 만한 것 같지 않다...... 행동 짓거리에 상관없이 목소리가 크면 이긴다.. 힘있는 가해자는 죄를 저지른 댓가로 떵떵거리며 살고 힘없는 피해자는 피해를 입은 죄로 똥물을 뒤집어써야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멍청한 머리로 게으른 성격으로 어리석은 성품으로 30년 가까이 세상을 살다보니 배움의 시기에 부렸던 철없는 게으름이 참 후회된다.. 세상이 어떤지 돌아보는 호기심 속에 정말 같지도 않은 인간을, 그런 인간들이 꾸려가는 세상을 본다.. 그래서 머리에 더 많이 담길 원하고 내 양심이 바로서기를 원한다.. 그러다 한번씩 배설하는 이런 배설구가 때로는 위안이 되는 것 같다.. 나보다 앞서 이 세상을 살아갔던 사람들 중.. 누구의 뒤를 따를 지는 스스로가 결정할 문제일 것이다.. 나는 누구처럼 살고 싶고 누구처럼 살고 싶지 않다.. 시원하게 배설했으니 공부하러 가야겠다 ================================ 작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19년 장기집권을 하던 대통령이 죽고 새롭게 시작될 민주화의 조짐에 사회분위기가 술렁술렁한다. 내심 기대도 된다. 그러나 바람은 잠시, 또 다른 군인세력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는다 작은 도시의 사람들은 눈앞에 자행되는 부당함에 아우성을 친다 군인은 작은 도시가 거슬렸다. 자신의 집권으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한방에 잠재울 스파링상대가 필요했다. 군대를 보냈다. 작은도시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쥐를 잡듯 입구와 출구를 봉쇄했다 그리고 모든 언론의 입을 부서뜨렸다. 작은 도시의 8차선 도로에 탱크들이 굴려졌다. 그것은 나라를 지키는 무기가 아니었다. 속에 괴물들을 한가득 태운 괴물이었다. 수십 수백의 가정이 가장과 부인 아이와 형제 자매를 잃었다. 몽둥이에 머리가 부서지고 총기에 휘갈김당하며 내장이 쏟아지고 인간으로서 존엄성이 파괴된채 잡혀 나갔다. 아이를 품은 임산부의 몸에서 태아가 끄집어져 나가고 옷대신 피칠갑을 걸친 시신이 도로위를 나뒹굴었다. 팔다리를 내어준채 목숨을 건졌다면 다행이었다. 장기를 내어준채 심장을 건졌다면 다행이었다.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자들은 학살이 자행되는 그 길가에 나설 수 없었다. 예외는 없었다. 그때 그 시절 만세를 부르던 거리의 일본군도 그만큼 잔인했을까? 그때 그 시절 공산당도 이만큼 잔인했을까? 아픈 상처와 쓰라린 수치를 품에 안은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빨갱이 폭도'라는 오명과 비난 손가락질이었다. 몇십년이 지나 그때의 군작전 통수권자들은 형사처벌이 되었다. 집권을 잡았던 우두머리는 사형을 구형당하고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그리고 풀려나 고향땅에서 위인대접을 받으며 배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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