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한잔 얼큰하게 마시고 취기에 글을 써봅니다. 나름 글의 목적을 염두에는 두고 있었는데, 한잔 두잔 마시다보니 뚜렷한 주제조차도 희미해지는 것 같습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양해해주십시오..
저는 제주도 사람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주도의 근현대사는 일본과 떼려야 뗄 수가 없습니다. 향토사의 자취도 희미한 고대 중세부터, 출륙금지령이 발효되어 제주인들이 섬을 벗어나는 게 금지되었던 출륙금지령을 거쳐 일제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인들은 왜구의 습격에 시달리기도 하고 살아남기 위해 일본을 왕래하기도 하며 좋든 실든 일본인들과 교류해왔습니다. 4.3사건의 광풍과 이후의 빈곤 속에서 수많은 지역 어르신들이 일본에 밀항하신 것만 봐도 제주인들이 느끼는 일본과, 이른바 '육지'분들이 느끼는일본의 의미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조금 더 '막말'을 보태자면, 조선을 위시한 기존의 '육지' 왕조들은 제주도를 소외시켜왔지만, 일본이 육지를 핍박했다고 회자된 것에 비해 당시 제주인들에게는 차라리 일본의 통치가 더 관대한 것이었습니다. 일제시대의 교육과 생활 수준은 조선 등 이전 왕조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까요. 재일동포의 다수가 제주계라는 사실까지 상기해본다면 제가 지금까지 풀어놓은 문장들의 신빙성이 더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명백한 사실이니 만큼 관심 있는 분들은 조사해보시면 제 이야기가 거짓이 아님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외가 가족들도 마찬가지로 제주도 토박이었으나 더 나은 삶을 위해 일본 도쿄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증조할아버지 내외는 도쿄에서 자녀들을 보았습니다.(그래서 저희 외조부님의 출생지도 도쿄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자녀들은 기라성 같이 많았으나 그 자녀들 중 현재 생존해계시는 분은 우리 외할아버지 뿐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외할아버지의 형, 다시 말해 제게는 외종조부님이십니다. 도쿄에 있던 외가 식구들은 후에 제주도로 귀향했지만, 외할아버지의 형님, 저의 외종조부님은 도쿄에 남으셨습니다. 이미 도쿄제국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참 문학을 좋아하는 분이셨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국민학교 교육을 받기도 쉽지 않던 시기에 제국대학을 나와 사치스럽게 문학이라니, 혹자는 저희 외가집안을 가리켜 친일파가 아닌가 의혹을 제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주도 표선을 필두로 많은 땅을 가졌다는 외가의 썰을 들어보면 그런 질책들을 마냥 부정하지도 못하겠습니다. .제가 진실을 명확히 아는 것도 아니고 지주 집안의 수혜(?)를 받아 본 일도 없으니까요. 아는 것이 제한적이기에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없지만, 적어도 외종조부님께서 집안의 유망주셨던 것은 확실해보입니다. 외종조부님 사후 제 외조부님을 비롯한 동생분들이 장성하여 보이신 열폭(...)스런 행태들은 마치 이를 반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사후라는 말을 붙이냐 하면, 제 외종조부님은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외조부님 표현을 빌리자면, 학교 다니다가 1945년 히로시마로 차출된 후 그곳에서 제주도 집에 편지를 부친 것을 끝으로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공부한 게 맞다면 대전말 학병으로 들어가 히로시마로 배치되었고 그곳에서 원자폭탄에 산화하신 게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히로시마에서 의료관련 인력의 90퍼센트가 사망하였다고 하고, 외종조부님 본인도 이후로 소식을 보내오신 일이 없으니..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이, 학병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원자폭탄에 맞고 산화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우리 외종조부님 또한 그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리신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기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 외조부님은 외조모님을 4.3사건 때 만나셨습니다. 그 광풍의 시기, 토벌대에 의해 조직된 민보단 비스무리한 단체에 외조부님이 중학생 나이에 끌려가 죽창 들고 보초를 서다 우물물 떠다주시는 외조모님을 만나시곤 반하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후 집안에서 그 관계를 인정해주시지 않자 인근 무인도로 들어가 버티고서 시위한 끝에 혼인을 승낙 받은 것이랍니다. 그 우여곡절들은 주제와 별 상관이 없으니 구태여 여기서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계층의 차이가 있던지라 외조부님과 외조모님의 상식선은 조금 달랐나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외조부님은 외조모님을 무시하고 외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머니에 의하면, 절이나 점집에 가서 미신에나 기대는 외조모님을 외조부님은 '무식한 년'이라고 백안시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외조부님조차도 말문이 막히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외조부님과 결혼 한 이후 집안의 제사를 모시게 된 외조모님. 외종조부님의 제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외조부님은 그냥 '서울에서 의사생활하다 요절하신 형님' 정도로 설명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외조모님은 곧이 곧대로 믿었죠.. 그런데.. 수년이 흐른 뒤, 외종조부님 제사를 지내기 전날만 되면 외조모님은 이상한 꿈을 꾸시게 됩니다. 캄캄한 밤, 누군가가 집의 대문을 두드립니다. 외조모님이 문을 열어보면.. 곳곳이 타고 그을려 누더기가 된 일본군 우의를 입은 정체불명의 사내가 대문 밖에 서있습니다. 그 얼굴을 자세히 보려하면.. 거의 해골처럼 변해버려 누군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서 외조모님은 놀라 잠에서 깨십니다. 그런 악몽을 꾸고 나면 어찌 견디겠습니까. 외조모님은 절이니 무당이니 곳곳을 찾아다녀 일종의 영적(?) 처방을 받습니다. 신기한건, 어머니 말씀으로는 이때만큼은 미신을 혐오하던 외조부님조차도 가타부타 말씀이 없으셨다고 합니다. 왜였을까요. 혹시.. 히로시마의 형님이 생각난 건 아니셨을지.. 그리고 무엇보다, 외조모님의 꿈 속 누더기 해골의 정체는 무잇이었을까요.. 단순한 개꿈이었을까요? 아니면 진짜 외종조부님이셨을까요? 외조모님의 꿈은 이후로도 매 제사 전날 오래도록 반복되었다고 어머니께서는 전하십니다.
가슴 아프지만 결론적으로 외조부님은 끝까지 본인의 형이 일본군으로서 히로시마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외조모님이나 제 어머니를 포함한 가족 그 누구에게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외조모님은 수년전부터 중증 치매 상태로 요양원에 계시니 영영 진실을 알지 못하실 것입니다. 외조부님은 제 장교 임관이 확정되었던 작년에서야 진실을 제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외조모님의 꿈 이야기만 알고 계시던 제 어머니도 외조부님의 말씀을 제게 전해들으시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셨습니다. 제가 귀신을 믿는 건 아니지만, 과연 외조모님이 꿈예서 보신 그 일본군 우의를 뒤집어 쓴 해골 같은 이의 정체는 무엇일지.. 전쟁이 없었다면 우리 외종조부님은 어떤 삶을 사셨을지 이래저래 물음표가 꼬리를 뭅니다. 그러고보면 외조부님이 저를 아끼시는 것도 본인의 형님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집안의 유일한 기대주였던 형님 사후, 장자의 도의를 잇게 된 입장에서 막상 본인이나 아들(제게는 삼촌)의 성취는 하잘 것 없으니 그것이 자격지심이 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삼촌에 대한 실망으로 장녀의 외아들인 제게 기대를 거신 건 아닐까..
외조부님의 기대와 은혜를 한껏 받고 자란 입장에서, 외종조부님을 참배해 외조부님 마음의 짐을 덜어드리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렇다고 야스쿠니를(...) 가긴 그렇고, 다짜고짜 히로시마를 기웃거릴 수도 없으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말이 길어졌습니다. 두서도 없어서 조금 황당한 글이긴 한데, 이 땅에 부디 전쟁이나 핵 공격에 의한 희생자가 다시 생기지 않기를,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비명을 지르는 이가 다시는 없게 되길 소망합니다. 전란으로 누군가가 죽는다는 건, 그 사람만큼의 가능성이, 그 사람만의 우주가 소멸한다는 것을 뜻하는거니까요. 이만큼 잔인한 일이 또 있을까요.
외종조부님 참배를 어찌해야하는지 의견을 여쭐려는 글이 쓸데없이 길어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넋두리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