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10년도 전이네요. 판타지 소설 동호회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었죠.
대학로에서 했던 정모에서 제옆자리에 앉았던 그녀는
만난지 10분만에 저한테 오빠라고 부르면서 술을 먹이는 화끈한 성격이었습니다.
긴머리에 하얀 피부때문에 처음보면 청순한 여자로 오해하기 딱좋은 그녀는
3자매중 둘째로 술 좋아하고, 노는거 좋아하는 여자 장비였습니다.
그녀와 참 많은 날들을 재미있게 보냈었습니다.
단둘이 만난적은 없었지만, 어느새 친해진 동호회 사람들끼리 일주일에 두어번은 볼정도로 자주 만났습니다.
저도 그녀에게 어느정도 마음이 있었던지라, 술자리에 빠지지 않고 나갔었습니다.
어느날 저녁 집에있던 저에게 한통의 문자가 왔습니다.
"뭐해? 우리집 근처에서 소주한잔 할려?"
그 문자한통에 별일 없던 저는 그녀가 살던 미아리까지 갔고,
그녀와 만나서 처음으로 단둘이 오붓하게 술을 한잔 했습니다.
둘다 얼큰하게 취해서 그녀의 집까지 바래다주던 중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어? 첫눈을 너랑 같이 맞는거야? 아~ 이게 뭐야~"
"뭐래~ 나도 사양이거든요?"
맘에도 없는 말을 뱉어내면서 투닥거렸지만, 그녀와 함께 맞이하는 첫눈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10분밖에 안걸리는 거리를 걸으면서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랬던 제마음을 알았던 것인지
그녀는 말없이 제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집앞 담벼락 그늘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입을 맞췄습니다.
현실감이 전혀 없던 그 달콤한 키스가 끝나고 그녀는 침울한 눈빛으로 말했습니다.
"미안해."
어리둥절해하는 저를 내버려 두고 그녀는 집으로 도망치듯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루동안 연락이 끊겼던 그녀에게서 장문의 문자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사실 그 동호회의 어떤 형님과 사귀고 있었던 사이였죠.
그 형님은 30대였고, 잘생기고 돈도 잘버는 멋진 형님이었으며..... 결정적으로 저와 매우 친한 형이었습니다.
배신감때문인지, 믿기힘든 현실에 대한 슬픔 때문인지
실컷 울고나서 저는 그녀에게 쿨하게 신경쓰지 않는다며 친구로 지내자 했습니다.
아직 어렸던 20대 초반 상처받은 남자의 마지막 자존심이었겠죠.
그러나 사람마음이 어디 그렇게 잘라지나요?
그 이후로도 저는 그녀를 한동안 짝사랑했습니다.
혹시라도 그녀가 그 형과 헤어지고 다시 저에게 와주지 않을까?
그 형이 제가 그녀를 짝사랑하는 걸 알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쓸데없는 고민들을 많이 했었죠.
그녀는 그 형과 그다지 잘지내진 않는 듯 싶었습니다.
나이차가 많이 나서라기 보다는 그 형님이 너무 바빠서였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 형님은 슬슬 결혼을 생각해야 할 나이...
아직 20대 초반이었던 그녀에게는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어느날 동호회 회원들이 모처럼 다같이 모여서 정모를 했던 날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집에가는 그녀를 제가 바래다주게 되었습니다.
그 날 이후 처음으로 둘만 있었던 순간이라 어색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농담을 주고 받으면서 그녀를 집앞까지 바래다주었죠.
그녀의 집은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고, 초록색 철대문이 있었습니다.
"들어가. 나도 이제 가봐야지."
"그래. 고마워. 바래다줘서..."
"그래. 담에 봐."
"안녕."
조금더 그녀를 보고싶던 마음을 억누르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하고 그녀는 철문을 닫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왠지 그 문앞을 떠날수가 없었습니다.
그 철문의 안쪽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녀는 철문의 안쪽에서 쪼그려앉아 하염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너 뭐해. 왜그래."
"나... 너무... 나쁜년이지? 그렇지?"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그녀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어린 감정은 왜 그렇게도 서투르고 어려울까요.
그녀를 좋아하면서도 그 형도 정말 좋아했던 저는 어느 하나를 선택할수 없었습니다.
저는 철문너머의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마음을 정리해 준다면... 기다릴께. 그렇지만, 난 내가 좋아하는 형을 배신하고 싶지 않아."
그녀는 말이 없었고, 저는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얼마후 그녀는 그 형과 헤어졌습니다. 듣기로 그 형도 이미 마음이 떠나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금방 다시 만날수는 없었습니다. 저도 그녀도 너무 바빴습니다.
그 형님에게 미안하다는 핑계로 한동안 연락을 끊고 지낸 어느날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잘 지냈어?"
"어... 그래. 오랫만이네."
시시콜콜한 안부를 묻던 우리는 어느순간 말이 없어졌습니다.
서로 꺼내지 못하는 말이 있었던 것이었죠.
"우리집... 아빠가 피시방 차렸어. 요즘 잘된다고 하더라고..."
"아... 그래? 축하해. 너도 게임하는거 좋아하지? 그 뭐더라... 디아블로인가?"
"응 맞아..."
그녀는 수줍게 웃으면서 디아블로를 잡았던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블리자드사에서 만든 디아블로는 기존의 턴제형 컴퓨터 판타지게임에서 벗어나
실시간 핵앤 슬래쉬 형태의 액션게임을 크게 흥행시킨 일등공신이며,
2000년 6월에 발매한 디아블로2는 전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RPG게임의 전설입니다.
이 디아블로 시리즈는 2017년 현재 3편과 2개의 확장팩까지 발매되었지만,
아직도 17년전에 발매된 디아블로2편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을정도로 잘만들어진 게임성을 자랑합니다.
얼마전 스타크래프트 1편의 리마스터링으로 게이머들의 큰 호응을 이끌어낸 블리자드가
과연 디아블로2의 리마스터링도 발매할지에 게이머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