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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인 학살 번외, 노비사드-보이보디나 학살
게시물ID : history_2844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역둔토
추천 : 3
조회수 : 104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6/29 22:00:24



Hungary_1941-44_Administrative_Map.png

2차 대전기의 헝가리 왕국 영토, 유고슬라비아에게서 보이보디나를 획득하였고, 루마니아로부터 헝가리인 거주지역을 강탈했다.



보이보디나 지역은 전통적으로 세르비아인들이 많이 살았지만 1차 세계대전 패배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파멸할 때까지 헝가리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보이보디나 지역은 보이보디나에 거주하는 다수민족인 세르비아인들의 바람대로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보이보디나의 헝가리인들은 유고슬라비아 편입에

불만을 가졌다. 후에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사이에 균열이 생기자 다른지역의 크로티아티아인들처럼

보이보디나의 3번째 민족인 크로아티아인들도 유고슬라비아-세르비아인의 보이보디나 지배에

상당한 불만을 품었다.


2차 세계대전 와중,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침공으로 붕괴하자

추축국의 일원인 헝가리와 추축국에 대한 협력을 약속하고 독립한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보이보디나를 분할했다.

보이보디나의 크로아티아인 거주지역과 크로아티아-보이보디나 접경지역은 크로아티아가 가져갔지만

보이보디나 거의 대부분은 다시 헝가리의 손에 들어갔다.


헝가리는 보이보디나를 접수함과 동시에 보이보디나에서 분란의 소지를 완전히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헝가리인들은 보이보디나의 주요민족인 세르비아인을 약화시켜 보이보디나 지역을 영구히 헝가리의 일부로

만드려는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보이보디나 지역의 민족 구성 재조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보이보디나를 접수하면서 시작된 이 '재조정'은 1941년 4월 14일 500여명의 세르비아인과 유대인이

보이보디나로 진주하는 헝가리군에게 살해된 것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보이보디나를 완전히 접수하고 유고슬라비아 행정기구와 군대를 제압한 헝가리는 보이보디나 지역에 거주하는

세르비아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세르비아인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헝가리는 1941년동안 최소한 15만명의

세르비아인을 보이보디나에서 독일의 보호령으로 전락한 세르비아 영내로 추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헝가리에 앞서 크로아티아에서도 세르비아인이 추방되어 세르비아로 몰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에

세르비아 지역의 치안 악화, 파르티잔 가담 우려, 식량 부족 등으로 독일 사령부가 15만명을 받을 수 없다고

거부하자  6만명을 추방하였다. 세르비아인이 추방된 지역에는 헝가리인을 조직적으로 이주시키고

헝가리어의 사용을 강제하여 보이보디나의 헝가리화를 획책하였다.


세르비아인들은 탄압이 노골화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1941년 6월에서 7월 이후부터 보이보디나 전역에서 세르비아인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을 지키기 위해

무장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이시기 보이보디나 세르비아인의 무장투쟁은 지역에 기반한

소규모 무장투쟁이었기 때문에 헝가리군의 공격에 취약하였다.


헝가리는 세르비아인의 저항을 분쇄함과 동시에 세르비아인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세르비아인 정치범 수백명을 적법한 재판 없이 비밀처형했다. 이어 세르비아인 게릴라,

게릴라에 동조할 수 있는 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강제수용소가 보이보디나에 세워졌다.

이 수용소들에는 세르비아인들 뿐 아니라, 유대인, 집시, 몬테네그로인들도 수용되었다.

헝가리 치하 보이보디나에서 세르비아인들 만큼 고통받았던 유대인들은 

1941년 동안 재산 몰수, 추방, 수용소행을 통보받았다.


1941년 말, 1942년 초에 접어들자, 다른 유고슬라비아 지역과 달리 보이보디나 지역의 무장투쟁은

사실상 실패한 것과 다름 없었다. 그러나 헝가리인들은 이미 저항능력을 상실한 보이보디나 세르비아인들과

기타 소수민족을 더 강하게 옥죄어 보이보디나를 '정화'하고자 하였다.


1942년 1월 6일부터 3일 동안 헝가리군 약 8천명은 보이보디나를 돌아다니며 여성과 어린이가 포함된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다. 이들 중 일부는 게릴라 활동이나 유고슬라비아 왕국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살해된 것이지만 대부분은 무고한 민간인이었다. 이들은 영문도 모른채, 집, 직장, 길에서 끌려와 죽었다.

가장 비극적인 사례는 결혼식 중이던 신랑을 게릴라 용의자로 잡아가 처형한 것이다.


1월 3일부터 보이보디나 교외, 농촌지역에서 학살을 자행한 헝가리인들은 1월 20일, 보이보디나 최대의 도시

노비사드를 포위했다. 포위와 동시에 노비사드의 상황을 외부에 알리지 못하도록 전화선괴 전신선이 끊어졌다.

포위망을 완성한 후, 헝가리군은 노비사드 시내로 진입했고 도시에 계엄령과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헝가리군은 이미 헝가리인과 독일인이 장악한 행정기관관 협조하여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1만 여명을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체포했다.  체포된 세르비아인들 중 일부는 심문 과정에서 자행된 잔혹한

고문으로 사망했다.


행정기관이 세르비아인을 색출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와중에 헝가리군은 노비사드 시내를 돌아다니며

세르비아인들을 죽였다. 헝가리군은 주택을 돌아다니며 종교와 민족을 물었고 세르비아인이나 정교도라고

밝힌 이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세르비아인 어머니가 자신을 정교도라고 밝히자 '더러운 세르비아인'이라며

그녀의 아들 5명을 그 자리에서 죽인 사례도 있다.


1942년 5월까지, 헝가리군은 행정기관의 도움으로 위협이 될만한 세르비아인들, 지식인, 경찰 출신,

공무원 출신 등을 색출하여 처형했다. 3천명에서 5천명 사이의 세르비아인과 천 여명의 유대인이

노비사드 학살에 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대부분 헝가리군의 총살이나 직접적인 고문으로 죽었으며

일부는 헝가리군이 1월과 2월 혹한의 날씨에 발가 벗겨 영하의 다뉴브강에 밀어 넣은 것 때문에 얼어죽었다.


보이보디나에서 세르비아인 탄압과 유대인을 독일로 협조적으로 인도하는 것은 1945년, 헝가리가 동쪽에서

밀려오는 소련군에 의해 패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보이보디나 지역의 유대인 수만명이 나치 독일에 협조적인

파시스트 헝가리에 의해 독일 강제수용소로 보내졌고, 대부분은 거기서 사망했다.


헝가리는 1944~1945년 사이 추축국의 패색이 짙어지고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영향을 받은

공산주의 파르티잔이 보이보디나에서 반 추축국 게릴라에 본격적으로 나서자 보이보디나 전역에서

게릴라에 협조할 수 있다는 이유로 약 4만 여명의 세르비아인을 죽였다.


공산 헝가리가 수립된 후, 파시스트 헝가리에 협조했고 세르비아인,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많은 자들이

처벌받았지만, 일부는 교황청의 지원 아래  남미로 도주했다. 그 중 일부는 다시 헝가리로 돌아와 천수를 누렸다.


330px-Sandor_Kepiro.jpg

남미로 도주했다 헝가리로 돌아와 천수를 누린 대표적인 전범, 산도르 케피로

헝가리 헌병으로 세르비아인, 유대인 등의 색출과 구금, 이송, 집결 등에 관여했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학살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학살을 몰랐다고 주장했다. 2011년 97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2013년, 헝가리 대통령 야노스 아더는 헝가리의 세르비아인 학살,  홀로코스트 협조,

세르비아인에 대한 헝가리화 작업 등을 베오그라드에서 사과했다. 같은 시기 헝가리 의회는 보이보디나에서

자행된 세르비아인, 유대인 학살에 대한 헝가리의 책임과 사과, 과거의 잘못을 규탄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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