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봉니문제
-유물 가운데 봉니는 가장 논란이 많은 것이다. 봉니란 문서가 수신자에게 안전하게 전해질 수 있도록 봉함하는 진흙이다. 죽간이나 나무에 글을 쓰고 상자에 넣어 묶은 다음 끈을 진흙으로 봉하고 도장을 찍은 것이다. 1918년부터 1937년 사이에 대동강 유역에서 봉니 200여 개가 발견되었다. 모두 일제시대에 발견된 것들이다. 그 이전이나 이후에 발견된 것은 한 개도 없다. 북한에서 1969년에 봉니가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하는 곳을 300여 평방미터나 발굴하였으나 단 한 개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역사학자 정인보(鄭寅普, 1893년-1950년 납북)는 봉니의 보존상태가 너무 좋고 서체가 비슷하며 발견 사례가 너무 많다는 점 등을 들어 조직적인 조작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재야사학자 이덕일은 일제시대에 발견된 봉니가 모두 한나라 것이라는 점을 들어 의문을 표한다. 낙랑군은 전한, 신, 후한, 삼국시대, 진, 오호 16국 시대에 걸쳐 존재하였는데 오로지 한나라 것만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북한의 박진욱은 관직명이 당시 관직제도와 맞지 않고 크기가 제각각이라는 점 등을 들어 봉니가 위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2. 고분문제
-소위 주류 역사학자들은 대동강 유역 고분 100여기를 모두 낙랑군의 고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대동강 유역 고분 2600여 기를 발굴하여 연구한 결과 낙랑군과 대방군의 고분으로 알려진 것들이 대부분 낙랑군이 설치되기 200년전에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북한의 리순진은 정백동 2호와 37호 무덤의 상한은 서기전 7세기까지 올라가고 하한은 서기전 1세기로 보았다. 고분은 낙랑군과 관계없이 축조된 것들이며 낙랑군의 설치 이후에는 더 이상 축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한은 일제시대에 발굴한 100여 기의 고분보다 26배나 많은 2600여 기에 달하는 고분을 발굴하여 그 결과를 보고한 것이므로 보다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3. 점제현신사비 문제
-1913년 평안남도 온천군에서 일제의 역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점제현신사비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점제현은 <한서 漢書> (지리지)에 수록된 낙랑군 25개현 가운데 하나이다. 이로써 온천군이 점제현이 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김교정과 정강철이 신사비의 화강석 성분을 분석한 결과 부근의 화강석과는 크게 다르고, 요하 지방의 화강석과 비슷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발굴 과정에서 신사비의 기초에 시멘트를 쓴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전 연세대학교 교수 손보기는 신사비가 있는 곳은 2천 년 전에는 물이 들어왔던 곳이므로 비를 세울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모두 이 신사비가 일제에 의해 조작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4. 목간문제
-유일하게 조작시비가 없는 낙랑유물이다. 대동강 유역의 한 무덤에서 낙랑군의 호구와 인구수를 적은 목간이 발간되었다. 소위 주류 역사학자들은 이를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강력한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유물은 어디나 갈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의 정창원에 신라장적이 있다고 해서 그곳에 신라가 있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시대에는 문헌사료가 주(主)가 되어야 하고, 유물은 종(從)이 되어야 한다.
북한의 손형종은 논문에서 “목간의 호구 통계가 얼핏 서북한에 낙랑군이 있던 것처럼 보이나 자세히 검토하면 요동반도 천산산맥 일대에 위치했다는 확고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목간에 나온 낙랑군을 평안, 황해도 지역으로 가정할 경우 인구가 밀집한 곡창 지대인 황해도 중심에 해당하는 군 남쪽 관할(남부도위) 3개현 인구수가 6000여명에 불과한 것으로 기록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요동반도 남단이 인구통계에 걸맞는 지리 경제적 조건을 지녔다면서, 요하 부근의 별도 낙랑군 주재설을 입증하는 근거로 뒤집어 보고있다. 목간 출토지가 평양인 것은 요동 낙랑군의 관리가 목간을 들고 도망해왔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국내 재야사학계에선 조작설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음)
5.와당
-한나라 이전의 양각문이요. 그것도 중국계와 토착계가 섞여있고, 글씨와 문양도 당시 글자와 아주 다르거나 미묘하게 다른 건 어찌할 것인가?
6.대방태수 장무이묘
-강단주류사학계 정인성 교수는 한국 고고사학계의 권위자인데 이이가 이 무덤이 대방태수 무덤이 아니라 고구려 무덤이라고 입증하였다.
단국대학교 교수 윤내현은 대동강 유역에서 발굴된 중국계 유물이 낙랑군이 설치된 전한(前漢) 때의 것은 거의 없고 대부분 후한(後漢) 때의 것이라는 점을 들어 낙랑군의 유물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제작 연대가 표시된 기와나 벽돌 중에는 낙랑군이 고구려의 공격으로 멸망한 이후인 서기후 353년과 405년에 제작된 것도 있다.
대동강 유역에서 발굴되는 중국계 유적 유물과 관련하여 중국인 집단거주지였다는 견해도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고구려 미천왕 재위 3년(서기후 302년)에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공격해 8,000여 명을 사로잡아 평양에 옮겼다”는 기록이 있고, “재위 14년(서기후 313년)에 낙랑군을 공격해 남녀 2,000여 명을 사로잡아 왔다”는 기록도 있다. 고구려 태조대왕이 요동 서안평을 침범하여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 처자를 사로잡았다는 기록도 있다. 전쟁포로들은 국경에서 먼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것이 상례였음을 볼 때 이들을 대동강 유역으로 집단 이주시켰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전쟁포로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집단으로 망명한 사례도 많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고국천왕 19년(서기후 197년)에 중국에 대란이 일어나서 한인(漢人)들이 난을 피해 내투하는 자가 심히 많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중국은 후한 말기로 군벌들간의 전쟁이 격화되는 시기였다. 또 같은 책에 “고구려 산상왕 21년(서기후 217년)에 한나라 평주 사람 하요가 백성 1,000여 가를 이끌고 와서 의지하므로 왕은 그들을 받아들여 책성에서 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1,000여 가라면 최소한 5,000명이 넘는다. 황해도 안악군 오국리 안악3호분의 주인인 동수(冬壽)는 연나라 귀족으로서 내란이 일어나자 곽충이라는 사람과 함께 고구려로 도망쳤다. 평남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고분의 주인 동리(佟利) 역시 현도태수령을 지낸 인물이었다.
선사시대는 유적이나 유물과 같은 고고학 자료에 의존하여 연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사시대로 접어들면 문헌자료가 고고학 자료에 우선한다. 아무리 많은 고고학 자료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갖는 의미는 최종적으로 문헌자료에 근거해야 한다. 고고학 자료는 이동이 자유롭고 불확실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대동강 유역에서 발굴된 유적과 유물이 낙랑군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 위해서는 문헌자료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낙랑군의 설치시기와 근접한 시기에 작성된 문헌자료는 대부분 낙랑군이 한반도 있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새로 발굴된 요서 지역의 고고학 자료도 이들 문헌자료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낙랑군 유물은 엄격한 재검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