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이미 기원후 55년 요서 10성을 쌓으면서
태조대왕시기에 대국의 위치에 오르지만
5세기 광개토태왕에 의해 만주일대를 석권하면서
진정한 동방문명권의 패자로 군림.
뒤를 이은 장수태왕이 반석을 굳건히 다지면서
전성기를 구가하며 오랜시간 지속적인 강대국의 면모를 보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 서토 사서등을 상당 부분 가져와 편찬한
삼국사기의 기록등을 보면 북위에게 조공 조공 어쩌고 이야기들이 쉴새 없이
나오는데(특히나 장수태왕시기 43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죠.
과연 북위는 고구려를 어찌할 정도의 상국이였을까??
1. 북연의 멸망
한반도와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구제질서를 확립하여 그 중심국이 된 고구려는 남북조시대의 북조 나라들과의 관계에 힘을 는다.
광개토대왕 시절, 고구려의 속국이 된 북연은 북조 나라들과의 완충지대였다.
그러나, 북연은 436년에 이르러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의 공격을 받아 멸망의 지경에 이른다.
만리장성을 넘어 북위의 세력이 뻗어 나오자, 고구려는 더 이상 북연이 완충국가로서의 의미가 없어졌다고 판단하여 북연을 완전히 접수하기에 이른다.
북연은 북위의 공격을 받자 고구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에 고구려는 장군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을 보내 2만의 군사로 북연의 수도인 화룡(조양지방)에 이르러 북연 왕을 맞이한다.
또한 고구려군은 북연의 병사들을 데리고 성에 들어가 무기고에서 병장기를 꺼내 북연 군사들에게 내주고 성을 비운다.
또 북연의 백성들을 전부 동쪽으로 옮기고, 궁성마저 불태웠다.
북연의 백성들을 고구려로 옮기는 이 작전에 고구려군이 좌우에 포진하고 행군하니, 이를 보고 있던 북위군 지휘관 고필(古弼)은 두려워서 감히 나서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 북연은 고구려에게 완전히 투항한 것이다. 수많은 백성들도 고구려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고구려로 옮겨갔다. 고구려군이 강제로 점령한 것이 아니라, 북연의 요청을 받고서 행한 것이다.
북연은 고구려의 속국으로서 본국에 구원요청을 한 셈이다. 북연을 차지하려던 북위군이 고구려의 북연 접수를 그저 바라보며 공격하지도 못한 것은 고구려의 위세를 겁냈기 때문이다.
북연은 작은 나라라 공격할 수 있었지만, 감히 고구려와는 정면 대결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보더라도 고구려가 북연을 속국으로 만들어 북조 국가들과의 완충지대로 삼았음이 확인된다.
2. 조공의 진실
이로써 북위와 직접 국경을 마주 대하게 된 고구려는 북으로 유연, 남으로 송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북위를 더욱 압박한다.
그런데 당시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에 대해서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가 북위에게 수없이 조공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공(朝貢)이란 말은 본래 서주(西周-기원전 770-250년)의 종법(宗法)적 봉건제도 내에서 제후가 천자에게 행한 일종의 임금과 신하간의 예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사대(事大)란 말은 제후간의 상호 우의 돈독과 결속 강화를 도모하기 위해 강구되었던 것으로, 큰 것을 받들고 작은 것은 스스로 적다고 하며 아래에 자리하는 상호 사귐의 예에서 유래된 것이다.
조공과 사대는 고대 동아시아 여러 나라 간의 국제질서로 확대되어 중국의 정통국가가 중심국이 되어 주변 국가에서 조공을 바치고, 중국은 이에 상응하여 책봉(冊封)과 사여품(賜與品)을 내려주는 관계로 정리되어 왔다.
조공과 책봉관계는 중국문명의 외적인 표현이었다.
천자가 다스리는 세계는 바로 중국이고, 천자는 중국 외부의 세계에 대해서도 똑같이 지배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야만 하늘을 대행해서 천하 만민을 다스리는 천자의 사명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의 백성들은 천자의 직접적인 다스림을 받는 선택된 사람이므로, 천자의 지배조차 받지 못하는 야만인(문명의 혜택에서 벗어난 사람)들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믿었다.
즉 조공과 책봉관계의 실현은 그들의 세계관을 외부세계에 구현하기 위한 논리였다.
조공관계에서도 긍정적인 면은 있다. 조공관계는 약소국에게는 자국의 안전을 보장하고, 나아가 보다 높은 문화를 수용하여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또한 조공관계는 많은 물자의 교류를 가져왔고, 보다 다양한 국제관계 속에서 한 국가의 행동폭을 넓히는 효과도 있다.
또한 중심국의 직, 간접적인 압박에 의해서 주변국들이 조공하는 관계가 된 것많은 아니다.
조공국이 자신들의 세력이 성장하여 보다 큰 국제질서에서 스스로의 위상을 찾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럴 경우 중심국이 조공국에게 내려준 봉책의 등급에 의해 조공국의 위상이 결정되기도 한다.
조공관계는 여러 나라 간의 외교관계와 상거래 속에서 서로 명분을 얻는 관계에 불과했다.
따라서 명분을 포기하고 실리를 얻고자 할 때는 명분상의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조공관계에서 중심국임을 자부하는 중국에서는 실리보다는 명분을 더욱 중하게 여겼다.
따라서 저들의 역사서에는 명분론에 입각하여 외교관계를 사실과 다르게 포장한 경우가 많았다.
중국문명이 강력한 힘을 가졌을 때는 조공과 책봉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문명이 약화 되었을 때 조공과 책봉관계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도리어 중국이 외부세계에 조공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나라 초기의 흉노와의 관계였으며, 송과 요(遼), 송과 금(金)의 관계도 그러했다.
북위와 고구려의 관계도 북위가 고구려에 도리어 조공을 했다고 믿어진다.
즉 힘의 강약에 따라 조공과 책봉관계의 현실적 실현 여부가 좌우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조공을 했다는 기록이 너무나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중국인의 명분론에 입각한 글들을 <<삼국사기>>에서 그대로 인용했기 때문에 생긴 것 뿐이다.
고구려의 경우도 적국의 힘이 강력했던 시기, 즉 모용선비에게 굴복한 후 왕의 어머니 주씨가 돌아올 때 까지는 저들에게 조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강력해진 상태에서는 조공관계가 역전되었으며, 고구려문명의 외적인 표현으로 조공관계가 구현되었다.
고구려는 조공을 받는 중심국이 되었고, 조공을 바치는 국가에서 책봉을 하거나 하사품을 주게 된 것이다.
고구려가 북연의 왕으로 고구려 출신의 고운이 된 것을 축하하는 사절을 보낸 것, 신라왕에게 의복을 하사품으로 준 사례 등이 그것이다.
광개토 대왕 이후에 두드러지게 이 같은 상황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제질서의 한 표현이다. 고구려는 동부여, 숙신, 백제 등이 조공을 바치지 않는다고 정벌을 하기도 했다.
조공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언제나 조공국은 아니었다.
역사는 늘 변화했기 때문이다. 힘의 강약에 의해서 시대마다 그 명분과 실제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북위와의 관계도 어디까지나 힘과 현실정치에 의해 좌우된 관계였다.
3. 고구려에 대한 북위의 대우
당시 북위에서는 각국의 사신이 머무는 숙소를 두었는데 고구려가 강했으므로, 남제의 사신 다음으로 고구려를 2번째에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남제서>>에서는 장수왕 77년(489년)에 남제의 사신이 북위에 갔더니 북위에서 남제의 사신을 고구려 사신과 같은 자리에 배치했다고 하니, 실제 북위에서 고구려를 제 1위의 주변국가로 대접했음을 알 수 있다.
북위가 남제를 그나마 대접한 것은 서로 중화문명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경쟁의식 대문이다.
남제인들이 자신들을 높이고자 하는 입장을 고려한다면, 실제로 북위는 고구려를 가장 높게 우대한 것이다.
북위는 적대관계인 남제를 비롯하여 북방의 강자인 유연이나, 서역의 여러 나라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고구려를 가장 두려워했다.
북위가 장수왕에게 준 작위(爵位)는 "차기대장군태부~고구려왕"이란 것이었는데, 차기(車騎)대장군은 북위가 다른 국가에게 관직으로 내려준 최고위(정1품하) 장군의 호칭이었고, 태부(太傅)는 북위의 최상위(정1품상) 관직이었다.
이것은 북위가 주변국가들에게 내린 작위 중 가장 파격적인 것으로 고구려를 특별히 대우했음을 뜻한다.
<<위서>>에는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芮悉弗)을 맞이했던 북위의 세종(世宗)이 "고구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해외를 마음대로 제어하여 오랑캐들을 모두 정복하여 왔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당시 고구려가 동방지역에서 주변국가들을 모두 정복한 최강국이었고, 고구려 중심의 세계가 전개되고 있음을 북위가 인정한 것이다.
4. 고구려와 북위의 실질 관계
그러면 북위와 고구려의 실질적인 관계는 어떠했는가.
장수왕 23년(435년)에 고구려는 북위에 사신을 보내 북위 역대(歷代) 왕의 계보를 바치라고 요구했다.
장수왕 23년이면 북위가 북연을 멸망시키기 1년 전의 일이다.
이 때 북위에서는 논란이 많았지만, 결국 자신들의 역대 왕의 계보와 그 이름을 적은 것을 사신을 통해 고구려에 바쳤다.
역대 왕의 계보와 이름을 적은 것은 곧 그 나라의 역사를 바치는 것으로 신하의 나라가 임금의 나라에게만 하는 행위이다.
그 예를 북위가 고구려에 대해 행한 것이다.
당시 사신으로 온 이오(李敖)는 고구려가 삼국시대 위나라 때보다 3배나 인구가 많아졌고 궁궐이 대단히 화려하다고 했다.
북위가 고구려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는 것을 더욱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장수왕의 죽음이었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구제질서를 확립하여 그 중심국이 된 고구려는 남북조시대의 북조 나라들과의 관계에 힘을 는다.
광개토대왕 시절, 고구려의 속국이 된 북연은 북조 나라들과의 완충지대였다.
그러나, 북연은 436년에 이르러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의 공격을 받아 멸망의 지경에 이른다.
만리장성을 넘어 북위의 세력이 뻗어 나오자, 고구려는 더 이상 북연이 완충국가로서의 의미가 없어졌다고 판단하여 북연을 완전히 접수하기에 이른다.
북연은 북위의 공격을 받자 고구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에 고구려는 장군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을 보내 2만의 군사로 북연의 수도인 화룡(조양지방)에 이르러 북연 왕을 맞이한다.
또한 고구려군은 북연의 병사들을 데리고 성에 들어가 무기고에서 병장기를 꺼내 북연 군사들에게 내주고 성을 비운다.
또 북연의 백성들을 전부 동쪽으로 옮기고, 궁성마저 불태웠다.
북연의 백성들을 고구려로 옮기는 이 작전에 고구려군이 좌우에 포진하고 행군하니, 이를 보고 있던 북위군 지휘관 고필(古弼)은 두려워서 감히 나서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 북연은 고구려에게 완전히 투항한 것이다. 수많은 백성들도 고구려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고구려로 옮겨갔다. 고구려군이 강제로 점령한 것이 아니라, 북연의 요청을 받고서 행한 것이다.
북연은 고구려의 속국으로서 본국에 구원요청을 한 셈이다. 북연을 차지하려던 북위군이 고구려의 북연 접수를 그저 바라보며 공격하지도 못한 것은 고구려의 위세를 겁냈기 때문이다.
북연은 작은 나라라 공격할 수 있었지만, 감히 고구려와는 정면 대결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보더라도 고구려가 북연을 속국으로 만들어 북조 국가들과의 완충지대로 삼았음이 확인된다.
2. 조공의 진실
이로써 북위와 직접 국경을 마주 대하게 된 고구려는 북으로 유연, 남으로 송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북위를 더욱 압박한다.
그런데 당시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에 대해서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가 북위에게 수없이 조공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공(朝貢)이란 말은 본래 서주(西周-기원전 770-250년)의 종법(宗法)적 봉건제도 내에서 제후가 천자에게 행한 일종의 임금과 신하간의 예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사대(事大)란 말은 제후간의 상호 우의 돈독과 결속 강화를 도모하기 위해 강구되었던 것으로, 큰 것을 받들고 작은 것은 스스로 적다고 하며 아래에 자리하는 상호 사귐의 예에서 유래된 것이다.
조공과 사대는 고대 동아시아 여러 나라 간의 국제질서로 확대되어 중국의 정통국가가 중심국이 되어 주변 국가에서 조공을 바치고, 중국은 이에 상응하여 책봉(冊封)과 사여품(賜與品)을 내려주는 관계로 정리되어 왔다.
조공과 책봉관계는 중국문명의 외적인 표현이었다.
천자가 다스리는 세계는 바로 중국이고, 천자는 중국 외부의 세계에 대해서도 똑같이 지배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야만 하늘을 대행해서 천하 만민을 다스리는 천자의 사명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의 백성들은 천자의 직접적인 다스림을 받는 선택된 사람이므로, 천자의 지배조차 받지 못하는 야만인(문명의 혜택에서 벗어난 사람)들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믿었다.
즉 조공과 책봉관계의 실현은 그들의 세계관을 외부세계에 구현하기 위한 논리였다.
조공관계에서도 긍정적인 면은 있다. 조공관계는 약소국에게는 자국의 안전을 보장하고, 나아가 보다 높은 문화를 수용하여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또한 조공관계는 많은 물자의 교류를 가져왔고, 보다 다양한 국제관계 속에서 한 국가의 행동폭을 넓히는 효과도 있다.
또한 중심국의 직, 간접적인 압박에 의해서 주변국들이 조공하는 관계가 된 것많은 아니다.
조공국이 자신들의 세력이 성장하여 보다 큰 국제질서에서 스스로의 위상을 찾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럴 경우 중심국이 조공국에게 내려준 봉책의 등급에 의해 조공국의 위상이 결정되기도 한다.
조공관계는 여러 나라 간의 외교관계와 상거래 속에서 서로 명분을 얻는 관계에 불과했다.
따라서 명분을 포기하고 실리를 얻고자 할 때는 명분상의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조공관계에서 중심국임을 자부하는 중국에서는 실리보다는 명분을 더욱 중하게 여겼다.
따라서 저들의 역사서에는 명분론에 입각하여 외교관계를 사실과 다르게 포장한 경우가 많았다.
중국문명이 강력한 힘을 가졌을 때는 조공과 책봉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문명이 약화 되었을 때 조공과 책봉관계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도리어 중국이 외부세계에 조공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나라 초기의 흉노와의 관계였으며, 송과 요(遼), 송과 금(金)의 관계도 그러했다.
북위와 고구려의 관계도 북위가 고구려에 도리어 조공을 했다고 믿어진다.
즉 힘의 강약에 따라 조공과 책봉관계의 현실적 실현 여부가 좌우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조공을 했다는 기록이 너무나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중국인의 명분론에 입각한 글들을 <<삼국사기>>에서 그대로 인용했기 때문에 생긴 것 뿐이다.
고구려의 경우도 적국의 힘이 강력했던 시기, 즉 모용선비에게 굴복한 후 왕의 어머니 주씨가 돌아올 때 까지는 저들에게 조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강력해진 상태에서는 조공관계가 역전되었으며, 고구려문명의 외적인 표현으로 조공관계가 구현되었다.
고구려는 조공을 받는 중심국이 되었고, 조공을 바치는 국가에서 책봉을 하거나 하사품을 주게 된 것이다.
고구려가 북연의 왕으로 고구려 출신의 고운이 된 것을 축하하는 사절을 보낸 것, 신라왕에게 의복을 하사품으로 준 사례 등이 그것이다.
광개토 대왕 이후에 두드러지게 이 같은 상황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제질서의 한 표현이다. 고구려는 동부여, 숙신, 백제 등이 조공을 바치지 않는다고 정벌을 하기도 했다.
조공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언제나 조공국은 아니었다.
역사는 늘 변화했기 때문이다. 힘의 강약에 의해서 시대마다 그 명분과 실제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북위와의 관계도 어디까지나 힘과 현실정치에 의해 좌우된 관계였다.
3. 고구려에 대한 북위의 대우
당시 북위에서는 각국의 사신이 머무는 숙소를 두었는데 고구려가 강했으므로, 남제의 사신 다음으로 고구려를 2번째에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남제서>>에서는 장수왕 77년(489년)에 남제의 사신이 북위에 갔더니 북위에서 남제의 사신을 고구려 사신과 같은 자리에 배치했다고 하니, 실제 북위에서 고구려를 제 1위의 주변국가로 대접했음을 알 수 있다.
북위가 남제를 그나마 대접한 것은 서로 중화문명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경쟁의식 대문이다.
남제인들이 자신들을 높이고자 하는 입장을 고려한다면, 실제로 북위는 고구려를 가장 높게 우대한 것이다.
북위는 적대관계인 남제를 비롯하여 북방의 강자인 유연이나, 서역의 여러 나라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고구려를 가장 두려워했다.
북위가 장수왕에게 준 작위(爵位)는 "차기대장군태부~고구려왕"이란 것이었는데, 차기(車騎)대장군은 북위가 다른 국가에게 관직으로 내려준 최고위(정1품하) 장군의 호칭이었고, 태부(太傅)는 북위의 최상위(정1품상) 관직이었다.
이것은 북위가 주변국가들에게 내린 작위 중 가장 파격적인 것으로 고구려를 특별히 대우했음을 뜻한다.
<<위서>>에는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芮悉弗)을 맞이했던 북위의 세종(世宗)이 "고구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해외를 마음대로 제어하여 오랑캐들을 모두 정복하여 왔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당시 고구려가 동방지역에서 주변국가들을 모두 정복한 최강국이었고, 고구려 중심의 세계가 전개되고 있음을 북위가 인정한 것이다.
4. 고구려와 북위의 실질 관계
그러면 북위와 고구려의 실질적인 관계는 어떠했는가.
장수왕 23년(435년)에 고구려는 북위에 사신을 보내 북위 역대(歷代) 왕의 계보를 바치라고 요구했다.
장수왕 23년이면 북위가 북연을 멸망시키기 1년 전의 일이다.
이 때 북위에서는 논란이 많았지만, 결국 자신들의 역대 왕의 계보와 그 이름을 적은 것을 사신을 통해 고구려에 바쳤다.
역대 왕의 계보와 이름을 적은 것은 곧 그 나라의 역사를 바치는 것으로 신하의 나라가 임금의 나라에게만 하는 행위이다.
그 예를 북위가 고구려에 대해 행한 것이다.
당시 사신으로 온 이오(李敖)는 고구려가 삼국시대 위나라 때보다 3배나 인구가 많아졌고 궁궐이 대단히 화려하다고 했다.
북위가 고구려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는 것을 더욱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장수왕의 죽음이었다.
七十九年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秋九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二月 王薨 年九十八歲 號長壽王 魏孝文聞之 制素委貌布深衣 擧哀於東郊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장수왕 79년(서기 491) -
491년 장수왕이 죽자 북위의 고조(高祖, 471~499년)는 소위모라는 흰색 모자와 포심의라는 상례(喪禮) 때 입는 베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동쪽 교외에 나가 애도(哀悼)를 표하는 의식을 거행했고, 사신과 온갖 물건들을 고구려로 보냈다고 한다.
二十八年 王薨 號爲文咨明王 魏靈太后擧哀於東堂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명왕 28년(서기 519) -
뿐만 아니라, 519년 문자왕이 죽었을 때도 북위에서는 전왕(前王) 세종(世宗)의 부인이며 숙종(肅宗)의 어머니로 정권을 쥔 영태후(靈太后)가 슬퍼하며 동쪽 사당에서 애도를 표시했고, 조문사절을 고구려로 보내기도 했다.
또한 508년에는 당시 북위의 세종이 청주(淸州-산동성지역)에 고구려 시조를 제사지내는 고려묘(高麗廟)라는 사당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508년에는 당시 북위의 세종이 청주(淸州-산동성지역)에 고구려 시조를 제사지내는 고려묘(高麗廟)라는 사당을 세우기도 했다.
신라 무열왕(武烈王)이 죽었을 때 당 고조(高祖)가 애도식을 거행한 적은 있다. 그러나, 사당까지 세우고, 임금이 직접 행하지는 않았다.
중국의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의 왕이 죽었다고 상복을 입고 왕이 직접 애도식을 주관하고 그 나라의 시조를 제사하는 사당을 지어준 사례는 없었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고구려는 중국의어떤 황제가 죽었어도 왕이 직접 상복을 입은 적이 없다.
남북조 시대에 막강했던 북위가 고구려에게 이렇게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당시 북위의 내부사정과 고구려의 국력을 좀 더 깊게 파헤쳐 본다면 고구려에 대한 북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시 고구려와 북위의 국경은 일시나마 오늘날의 만리장성을 넘어 선 것으로 보인다.
북위와 적대관계에 있었던 송은 장수왕을 영,평이주(營,平二州)의 지배자인 고구려왕이라고 불렀다.
<<송서>>에 장수왕 12년(424년)과 51년(463년)에 이러한 칭호가 보이고 있다.
그것은 송(420~479년)나라 시절, 고구려가 영주와 평주에 지속적으로 세력을 뻗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북위 시절의 영주는 대릉하 유역의 조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고, 평주는 만리장성 이남의 창려와 비여현을 중심으로 한 난하 하류와 북경에 이르는 지역이다.
송에서는 이 지역을 고구려가 지배했다고 보고 있다.
북연의 멸망 당시 북위와 대치했던 고구려는 북위와의 국경을 만리장성 이남에서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즉 오늘날 북경 인근까지 고구려의 영토일 가능성도 있다.
<<양서>><고구려전>에서는 고구려가 평주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광개토대왕 시절부터 안장왕(519~531년)까지 계속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고구려왕에게 평주의 지배자라는 칭호를 부여한 나라들은 당시 북위와 적대관계에 있던 남조의 나라들인 만큼, 실제 북위가 다스리는 지역임에도 고구려가 평주지역을 차지하고자 하는 야심을 알고 부여한 상징적인 칭호에 불과하므로 실제 상황에 대비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구려가 평주지역에 전혀 연고가 없는데 이들 국가들이 그러한 호칭을 사용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는 충분히 이 지역까지 진출할 수 있는 국력이 있었다.
역시 당시 최강국이였던 고구려가
북위에게 굽신하며 조공할 이유가 없죠.
장수왕이 조공했다는 북위시각에서 적은 무역및 교류 불과하다고 봅니다.
출처 : 김용만의 '고구려의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