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말에서 19세기초에 걸친 서세동점(西勢東占)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 서양제국주의에 굴복하여 먼저 개화(開化)의 눈을 뜬 일본은 그 스스로 서양제국주의를 본 따서 그들의 세력 확장 야욕이 대륙을 향하니 자연히 그 제1의 목표는 지리적으로 대륙에 이르는 통로가 될 한반도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대륙 특히 한반도 침략의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역사 조작을 착수한 것이다. 역사 조작은 그 기록과 역사적 유물이 희소한 상고사에 손을 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조작한 역사가 한사군의 위치 조작과 임나 일본설이다.
그들은 '한반도 조선은 상고시대부터 자립하지 못하고 중국과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민족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하며 이 시대에는 그 보호자가 일본이라는 것'을 합리화하는 것이 역사 조작의 목적이었다.
평양지역과 황해도 일원에서 많이 출토된 낙랑국(樂浪國)과 대방국(帶方國)의 유물들을 그들은 중국 한무제가 설치한 한사군(漢四郡)의 낙랑군(樂浪郡)과 한(漢)의 대방군(帶方郡) 유물로 조작하여 조선은 이미 고조선 때부터 중국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려 했던 것이다.
그들의 역사 조작에 동원된 유물들은
① 대동강 남쪽 구두진에 있는 토성(土城),
② 평양지역에서 70여 개나 집중적으로 수집된 봉니(封泥),
③ 용강에서 발견했다는 점제현신사비(粘제현신사비),
④ 제9호 고분에서 출토된 동종(銅鐘)
⑤ 왕간묘(王旰墓)에서 출토된 칠기(漆器)
⑥ 정백리 1호 고분에서 출토된 화폐 화천(貨泉)
⑦ 사리원 부근과 고분에서 출토된 벽돌 장무이전(張撫夷塼)
⑧ 재령군 부덕리에서 나온 좁은놋창
⑨ 옥도장, 벽돌, 칠기묶음, 막새기와
- 1887년에 동경제국대학에 사학과를 설치하고, 1889년에 독일의 실증사학의 거두인 랑케(Ranke)의 제자 리스(Riess)를 주임으로 초빙하여 사학회(史學會: 회원40명)를 조직하고, 사학회잡지를 발간하였는데 이 잡지에 요시다, 하야시, 스가, 나까, 시라도리, 쓰보이, 시데하라 등이 한국 관련 저서와 논문을 발표하였다.
- 1907년에 일본의 만주철도주식회사가 일본 정부의 명령에 따라 「만주역사지리조사실」을 만들고 동경제대 교수 시라도리, 쓰다, 센나이, 마쓰이, 이나바, 이게우찌 등을 참여시켜 「만주지리역사연구」, 「만주역사지리」, 「조선역사지리」등을 간행하였는데 이 들은 하나같이 한민족의 주체적 발전을 부정하고, 한국사를 대륙사에 부속시킴으로서 한국사의 타율성만을 강조하는 만선사(滿鮮史)를 주장하였다.'
- 1909년 동경제대 교수 도리이를 중심으로 「한낙랑(漢樂浪)시대의 고적학술조사대」를 조직하여 남만주에 파견하여 이들의 활동 결과「남만주조사보고서」를 제출하였다.
- 한편 조선통감부는 동경공대 교수 세끼노에게 조선의 고적조사를 의뢰하여 「고구려고적조사반」을 조직하여 평양지역 고분 2기를 발굴하였다. 1910년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한대 낙랑유적 학술조사'를 끝낸 도리이의 제언에 따라 총독부는 「고구려 고적조사사업」을 「한대 낙랑군 유적조사사업」으로 개칭하고 평양지역의 고분을 2차로 발굴하여 벽돌로 쌓여진 현실(玄室)내에서 한 대(漢代) 양식의 동경(銅鏡), 칼, 창, 도기 등을 얻었는데 이것이 평양지역의 유물을 '한(漢)의 낙랑군(樂浪郡) 유물'로 조작하는 시초 작업이었다.
- 1911. 10월 세끼노가 황해도 사리원 부근에서 '대방태수 장무이전'을 발견하였는데 이를 근거로 황해도 지역을 대방군(帶方郡)지역이라 주장하고, 1912. 4. 9 사리원 부근 고분을 발굴하였다.
- 1913. 9. 23 세끼노는 대동강변의 고분지역 중앙 강 언덕의 구두진(狗頭津) 부근에 '토성'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을 알고 그 곳에 있는 토성(土城)을 답사해 기와 파편을 채집하였는데 그들은 이 토성을 한(漢)의 낙랑군(樂浪郡) 치소(治所)라고 주장하였다.
- 1913, 9, 30 조선총독부 촉탁인 이마니시가 5회 고적조사 때 편남 용강에서 '점제현신사비'를 발견하였는데 이로써 용강이 낙랑군 소속의 점제현(粘제縣)이라고 주장하였다.
- 1915년 조선총독부는 중추원에 「편찬과」를 설치하여 조선반도사의 편찬에 착수하여 3월에 「조선고적도보」를 발간하고, 12월에 「조선총독부박물관」을 개관하였으며, 1916. 7월에 「고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1919. 2월에 조선총독부 명의로 「조선금석총람」을 발간하였다.'
- 1920년 야마다는 봉니(封泥)에 대한 그 가치를 강조하기 시작하더니,
- 1921년 가을에 세끼노는 야마다가 수집한 '낙랑태수장'이란 봉니가 출토되었다는 지역을 정밀 조사하였으나 단 한 점의 봉니도 더 얻지 못하였고,
- 1922. 10. 30 조선총독부박물관은 '낙랑태수장'이란 봉니를 150원의 고가로 매입하였고,
- 1923년에 평양법원 검사장 세끼구찌가 토성리 부근에서 촌부로부터 '조선우위'라는 봉니를 얻었고,
- 1926년 평양경찰서 경부보 우시무라와 상공회사 기사인 모리오가 등이 완전한 봉니와 파편 및 여러 개의 단편을 입수하였으며,
- 1931.12월에 조선총독부박물관은 '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이라는 봉니를 100원에 사들이고,
- 1934. 2월에 조선총독부박물관은 '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이라는 봉니를 100원에 사들였다.
- 제사화 석유환인의 '본격적인 조선역사 조작작업'과 동 -
1913년에 세끼노가 대동강 남쪽 구두진에 있는 토성을 답사하고 "토축(土築)의 성벽이 위요한(圍繞: 둘러싼) 흔적이 완연하다"고 말하였는데 그 12년 후에는 "과연 토축의 성벽이 상존할 뿐만 아니라 그 내부에서 한(漢) 식(式)의 기와 수십개를 채집하였고---토성이 협소한 구릉에 얕게 쌓여져 있다"고 앞뒤가 모순되는 말을 하면서 마치 이 곳이 한의 낙랑군(樂浪郡)의 치소(治所)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그들이 조선 역사의 맥을 고조선-위만조선-낙랑군으로 엮음으로서 낙랑의 치소는 곧 위만조선과 고조선의 치소인 왕검성으로 조작하였으나 다음과 같은 많은 모순이 있다.
(1) 역사서에 '왕검성(王儉城)은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다' 하였는데 만약 대동강을 패수로 본다면 그들이 낙랑군의 치소로 조작한 토성은 패수(대동강)의 남쪽에 있어서 왕검성이 될 수 없다.'
(2) 역사서에 '왕검성은 물이 깊고 험하여 공격하기 힘들다' 하였는데 이 토성은 물이 얕고, 나즈막한 구릉에 위치하여 적의 공격이 용이하다.
(3) 이 토성은 동서 709미터, 남북 599미터, 면적 396,650평방미터(약 만평)인데 기록에 의하면 낙랑군 치소는 가구가 62,812호이고, 인구가 406,748명이었다 함으로 이곳은 이를 수용할 수 없을 만큼 좁다.
이상의 제 이유로 이 토성은 한(漢)의 낙랑군 치소가 아니라 어울동토성(평남 온천군), 운성리토성(황해 은율군), 청산리토성(황해 신천군), 소라리토성(함남 영흥군) 등과 함께 BC3-2세기경의 것으로 BC1000년경의 전반기 고조선문화(비파형동검문화)를 계승한 세형동검문화(細形銅劍文化)의 유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특히 이 토성은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도와 황해도에 걸쳐 있었던 막조선(莫朝鮮)과 낙랑국(樂浪國)의 유적으로 한(漢)의 유물들이 출토되는 것은 낙랑국이 멸망당한 후(고구려 대무신왕 20년, AD37년) 고구려가 생포한 한인(漢人) 포로수용소로 사용된 때문인 것으로 보고있다.
* 고조선전반기의 문화로 보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은 (1) 요서지역-하북성 북경과 당산지역, (2) 내몽고 동부와 요녕성 서부지역, (3)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지역에 넓게 출토되는데 세형동검(細形銅劍)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지역(3)에서만 출토되는데 이는 목축을 위주로 하는 (1)과 (2)에서는 기병을 위주로 하므로 비파형(琵琶形)의 '자르는 칼'이 필요한데 고조선 후기-부여로 이어지는 BC 3-2세기는 철기문화가 시작되면서 동검이 사라졌으나 농경정착생활을 하는 (3)에서는 보병을 위주로 하므로 세형(細形)의 '찌르는 칼'이 효과적이기 때문에 유독 이 곳에서만 비파형동검이 세형동검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고있다.
봉니는 한인(漢人)들이 물건이나 문서를 넣고 봉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보통 나무를 깎아 글을 적은 후 덮개를 대고 노끈으로 묶은 다음 촛농을 붓고 채 굳기 전에 그 위에 인장을 눌러 봉한 것이다. 따라서 글을 받은 사람이 봉한 것을 열면 봉니는 부서지게 된다.
평양지역에서 70여개씩이나 봉니가 집중적으로 나타났는데 그들은 이를 이곳이 한(漢)의 낙랑군이라고 조작하는 중요한 단서로 삼았으나 다음과 같은 모순이 있다.
(1) 봉니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중국 본토의 옛 군현지역에서도 이렇게 많은 양이 나타난 곳은 없다. 그 것은 글을 받은 군현의 수령이 봉니를 열면 부서져 버리기 때문에 개봉하지 않은 채 봉니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
(2) 모든 속현이 군의 태수부로 문서를 올리고, 태수가 상부(자사), 인접 군, 그리고 속현(屬縣)에 문서를 내릴 때 봉니를 사용하는 것이므로 태수부에 태수의 인장이 찍힌 봉니가 나올 수 없는 데 소위 그들이 말하는 낙랑군 지역에서 '낙랑태수장'이란 봉니가 나타난 것.
(3) 또 낙랑태수는 상부인 유주자사(幽州刺史)와 다른 군(郡)으로부터 받은 봉니는 한 점도 없고 오직 속현의 봉니만 나온 것.
(4) 문헌에 없는 현의 이름이 찍힌 봉니가 다수 나왔다는 것.
(5) 2천여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었던 봉니가 그 형태가 완전하고, 인영(印影)이 갓 찍은 것처럼 선명하다는 것.
(6) 그들이 봉니를 수집할 당시 그것이 매우 비싸게 팔리는 것을 알자 이 지방 사람들이 전력을 다해 채집에 열을 올렸다는 것.
(7) 봉니는 그 주조와 그것이 묻힌 토질에 따라 색깔이 다른 법인데 모든 봉니가 거의 동일하다는 것.
(8) 후한 광무제 때 복파장군 마원(馬援)이 인장에 새긴 글씨가 서로 달라 이것을 하나로 획정하기를 청한 기록이 있는데 이곳 봉니에 찍힌 인장의 글씨는 한사람의 솜씨처럼 같다는 것.
(9) 전한(前漢)을 멸망시킨 왕망은 전한 때 사용한 지명을 거의 다 바꾸면서 낙랑(樂浪)은 낙선(樂鮮)으로 바꾸고, 태수(太守)는 대윤(大尹)으로 바꾸었는데 '낙랑대윤(樂浪大尹)'이란 봉니가 나왔다는 것.
(10) 한대 중국의 큰 현에는 영(令), 승(승), 좌위(左尉), 우위(右尉)가 각 1인이 있고, 작은 현에는 장(長), 승(丞), 위(尉)가 각 1인이 있다. 「遂 ○ 長印」,「 ○ 成 ○印」,「○ 成 ○尉」로 적힌 3개의 봉니의 첫째와 둘째는 「수성장인(遂成長印)」으로 풀이하여 작은 현이 분명한데, 셋째 봉니 「수성좌위(遂成左尉)」또는 「수성우위(遂成右尉)」로 풀이되는데 작은 현에는 좌위(左尉) 또는 우위(右尉)가 없다는 것.
(11) 한서 예문지에 「동시령(東Ɦ令)」이란 직책이 나오고 있어서 동시는 큰 현이 분명한데 수집된 봉니 중에는 작은 현을 나타내는 「동시장(東 Ɦ長)」이 있다는 것.
(12) 영변(寧邊)에서 임회태수(臨淮太守)의 인장이 나왔다고 하는데 어느 기록에도 영변을 한(漢)의 임회군(臨淮郡)으로 기록된 것은 없다는 것
이상의 제 사실들은 이곳에 수집된 봉니는 고의로 조작했거나 이 지역 사람들이 돈벌이 목적으로 만들어 비싼 값으로 판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1913년 이마니시가 용강에서 발견했다는 점제현신사비가 1915년 3월에 「조선고적도보」제1호에 3매의 사진이 나왔는데 2매의 사진에는 1행이「○○○○○ 十粘單 ○○○」로 되었고, 동경공과대학장이라 된 1매는 1행이 年, 四, 月, 戊, 4자가 추가되어「○年四月戊十粘單○○○」로 되어 있었다.
그후 일제 식민사관 사학자들은 이 3매의 사진을 근거로 하여 漢, 章, 帝, 元, 和, 二, 6자를 추가하여 「漢章帝元和二年四月戊午粘제 ○○○」라 해석하고 이 비를 발견한 용강이 바로 낙랑군 속현 점제현이라 주장하였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모순과 조작 의혹이 있다.
* 낙랑군 속현으로 밝혀진 현: 누方(누방), 長岑(장잠), 海溟(해명), 朝鮮(조선), 沃沮(옥저), 樂浪(낙랑), 黏제(점제), 含資(함자), 渾彌(혼미), 提奚(제해), 東日施(동시), 帶方(대방), 遂城(수성), 增地(증지)
- 위 3매의 사진 중 동경공과대학장으로된 것과 나머지 2매를 비교 해 보면 6행 3번째 글자 ' X '와 7행 3번째 글자 '出'자가 서로 다른 것을 쉽게 알 수 있어서 이는 당시 식민사관의 거두이며 동경공과대학장인 세끼노가 사진 기술을 동원하여 제3의 사진을 조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정인보선생의 해석에 의하면 2행의「○ 建丞屬國會(건승속국회) ○○○○○」는「 ○建丞屬國攘烏冠遼西(건승속국양오관요서)」로 보았고, 4행의「 ○○山君德配岱嵩(산군덕배대숭) ○○○○」「 ○○無山君德配岱嵩(무산군덕배대숭) ○○○○」으로 밝혀 전체적인 해석은 '오환이 요동(또는 요서)을 쳐들어 오니 점재의 장, 위, 승이 군사를 모아서 구원 해 물리쳐 몰아낸 후 의무려산을 지나가는 길에 신사에 풍요를 빌었다'는 뜻이다.
* 무산(無山): 요서지방에 있는 의무려산(醫無慮山)을 말함.
덕배대숭(德配岱嵩): 덕이(또는 크기가) 태산과 숭산에 짝한다.
이 글의 문맥으로 보면 용강이 점제현이라는 것은 전혀 맞지 않으며, 설사 그들이 주장하는 이 비의 건립연대를 원화(元和) 2년을 믿는다 해도 이는 AD 85년으로 후한시대가 되는데 평양지역의 낙랑은 고구려 대무신왕 20년, AD 37년에 멸망하였으니 이 또한 맞지 않는 것이다.
실제 점제현(粘單縣)은 동부 낙랑군지역으로 의무려산과 요하 사이에 있었던 한의 낙랑군 속현이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발견된 비석을 그들의 목적 '낙랑군 위치가 평양지역이었다'고 조작하기 위하여 은밀히 옮겼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1910년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고구려고적조사사업」을「한대낙랑군유적조사사업」으로 개칭하고 2차로 평양지역 고분 발굴작업 때 제9호 고분에서 동종(銅鐘)이 출토되었다고 하였다. 그 동종에는 전한 원제때의 연호 영광(永光) 3년(BC41년)으로 되어 있으며 효문묘(孝文廟)에 있던 것으로 평양지역이 전한(前漢)의 강역에 속했었다는 주장이다.
- 전한의 문제(文帝)의 시호가 효문제(孝文帝)이고, 묘호(廟號)는 태종묘(太宗廟)이므로 '효문묘(孝文廟)'란 말은 성립이 안된다.
- 중국에서 군국묘(君國廟)는 그 황제가 임행한 곳이라야 세울 수 있는데 낙랑군에 황제가 임행했다는 기록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고, 전한의 군국(君國)의 총수는 103개인데 군국묘(君國廟)가 설치된 곳은 68개소로서 낙랑군은 포함되어있지 않다.
- 원제 영광4년(BC40년)에는 군국묘가 모두 폐지되었으니 동종이 출토된 곳이 낙랑군의 효문묘라면 이는 영광 3년(BC41년)에 설치하여 다음해에 폐지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왕간묘(王旰墓)에서 출토된 칠기에 '永平 十二年' (영평 12년, AD 69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있고, '蜀郡西工(촉군서공)'에서 만든 칠기도 있어 한의 낙랑군 지역이라는 주장이다.
- 이 고분에서 수집한 목재의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 결과 AD 133년 것으로 밝혀졌으니 칠기가 AD 69년에 만들었다는 것이 모순된다.
- 당시 평양지역의 낙랑국 귀족들은 한(漢)나라의 값진 물건들을 무역을 통해 입수하여 소유하면서 호화생활을 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 고분에서 출토된 중국의 '촉군서공'에서 만들었다는 칠기도 무역을 통해 입수한 것을 낙랑국 귀족이 소유하고 있던 것일 가능성이 크다.
평양지역 고분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밝혀진 정백리 1호고분에서 전한을 멸망시킨 왕망(王莽) 천봉(天鳳) 원년(AD 14년)에서 왕망의 몰락시(AD 23년)까지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화폐인 화천(貨泉)이 출토되었다.
- 그러므로 정백리 1호고분을 비롯한 평양지역의 고분군의 조성연대는 왕망이후 즉 후한시대인 것으로 밝혀진 셈이니 이들이 한(漢)의 낙랑군 유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1912년 10월 15일 세끼노가 황해도 사리원역 동남방 1.5Km 지점에서 '漁陽張(어양장)'이란 명문이 있는 벽돌조각을 여러 개 얻었고, 그 부근 고분을 발굴하여 현실(玄室, 북쪽방)을 구축하고 있는 벽돌 중에 '帶方太守 張撫夷 (대방태수 장무이)'라 적힌 벽돌이 발견되어 그들은 이를 「조선고적도보」에 사진을 실었고, 그 해설에는 그 전편(全片)의 3개 문장을 실으면서 이를 근거로 황해도 일대가 한(漢)의 대방군(帶方郡) 지역이었다고 주장하였다.
① 「天人小人 供養君子 千人造塼 以葬父母 旣好旦堅 典覺說文 使君帶方太守張撫夷」
(천인소인 공양군자 천인조전 이장부모 기호단견 전각설문 사군대방태수 장무이)
하늘이 소인을 낳으시와 /군자를 공양하게 하였도다./
천명의 사람들이 벽돌을 만들어 /부모로 장사지내나이다/
이미 좋고 또한 견고하니 /이에 글을 새겨 예를 밝히노라./
사군대장태수장무이시여
② 「哀哉大人 奄背百姓 子民憂戚 夙夜不寧 永則玄宮」
(애재대인 엄배백성 자민우척 숙야불녕 영칙현궁)
슬프다 대인이여 /문득 백성을 버리셨도다. /백성들이 슬퍼하여 /아침저녁 편안하지 못하나이다. /길이 현궁 곁에서 원통한 마음을 다할 바를 모르나이다.
③「趙主簿 令塼 懃意不臥○」
(조주부 영전 근의불와○)
조주부가 명령하여 이 벽돌을 만드니 은근한 뜻을 마지 아니 하도다
-③번 문장의 '주부(主簿)'는 그 당시 중국에는 없는 관직이며 고구려의 5등관의 하급관직명이다.
이러한 고구려 하급관리의 명에 의하여 천명의 인부가 무덤 축조에 쓸 벽돌을 만들었다는 것은 대방태수 장무이가 고구려의 포로가 되어 있다가 죽은 것이고, 벽돌을 만든 사람들도 포로들이었을 것이다.
- 좌씨전(左氏傳)에 따르면 양공 25년에 '최씨가 장공(莊公)을 북곽(北郭)에 매장(側)하였다가 정해(丁亥)일에 사손이란 마을에 장사했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 '側(측)'은 장공이 시해를 당했기 때문에 예(禮)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임시로 그 곁(側)에 두었다는 뜻이다.
②번에서 '則(칙)’ 역시 장무이도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구(柩:시체)를 북쪽 방(玄宮) 한쪽 곁(側)에 묻었다는 뜻이다.
이 역시 대방태수 장무이가 자기가 다스리던 대방군에서 정상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이역 땅에 포로가 되어 있다가 죽었기 때문에 예를 갖춘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사리원을 비롯한 황해도 지방이 장무이가 다스리던 한(漢)의 대방군이 있던 곳이 아니라 장무이를 비롯한 한의 천 여명의 군사들이 고구려에 포로가 되어 이 곳에 수용되었다가 장무이가 죽자 이곳 수용소의 고구려 관리 조주부가 명하여 포로 천여명으로 하여금 위 3개 문장을 새긴 벽돌을 만들어 고분 현실(玄室:세끼노가 발굴)을 쌓고 이곳에 곁 붙여 묻어주었던 것이다.
황해도 재령군 부덕리에서 「○○皇朝用(황조용)」이란 명문(銘文)이 새겨진 좁은 놋창(細形銅矛)가 나왔는데 이는 '좁은 놋검(細形銅劍)'과 함께 중국의 한족(漢族) 문화권에서는 볼 수 없고,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것인데 비파형동검에서 이어 받아 발전시킨 고조선 후기 문화의 소산인 것이다.
① 토성동(토성이 있는 마을)의 귀틀무덤에서 국왕 또는 그와 대등한 신분을 말해주는 '永壽康寧(영수강녕)'이란 길상어(吉祥語)가 새겨진 옥도장이 나왔고,
② 마주 놓인 벽돌 무덤에서는 '大王(대왕)'이란 글자가 새겨진 벽돌이 수집되었으며,
③ 정오동 5호 및 왕광무덤에서는 '巨王(거왕)'이라 쓰여진 칠기 묶음이 나왔으며,
④ 평양의 토성에서는 '樂浪禮宮(낙랑예궁) 樂浪富貴(낙랑부귀) 千秋萬歲(천추만세)' 등이 새겨진 막새기와가 나왔다.
- 이러한 유물들은 한(漢)시대 먼 변방의 태수(太守) 정도로는 감히 쓸 수 없는 王(왕)급을 표시하는 유물로서 평양, 황해도 지역에는 지방 군현이 아니라 국가수준의 권력기구와 통치체제를 갖춘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존재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연대 | 적 요 |
BC350 | 번조선(番朝鮮)이 북막(北漠: 東胡)와 함께 연(燕)의 상곡(上谷)을 쳤다 |
BC343 | 연이 번조선에 화친을 청해 오므로 조양(造陽)을 경계로 삼다 |
BC341 | 연이 자객을 보내 번한인(番韓人) 해인(解仁)을 살해하다 |
BC339 | 연이 안촌홀(安寸忽: 安市城)을 돌파하고 험독(험독: 번조선의 도읍)을 치자 수유인(須臾人: 箕子의 후손들) 기후(箕詡)가 5천으로 진한, 번한의 군사와 함께 격파하고, 연의 도읍인 계성(薊城)의 남쪽에 이르니 연이 화친을 청하면서 자제를 인질로 보냈으며 연의 장수 진개가 번조선의 포로가 되었다. |
BC323 | 번조선의 왕 수한(水韓)이 죽고 후사가 없어 기후(箕詡)가 계승하여 번조선왕이라 칭하고 번한성(番汗城)으로 천도하였다. |
BC305 | 번조선이 북호(北胡: 東胡)와 함께 연의 상곡을 공격하자 연이 진개를 보내 대항하였다. |
BC300 | 연의 진개가 번조선과 동호를 쳐서 조양에서 양평(襄平)까지 장성을 쌓은 후에 그 안쪽에 상곡군(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요서군(遼西郡), 요동군(遼東郡) 등 5군을 설치하였는데 장성의 동쪽 끝을 만번한(滿番韓)이라 한다. *번한(番韓)은 전에 번조선의 도읍지였던 昌黎를 말함 |
연대 | 적 요 |
BC226 | 진시황이 연을 치자 연와 희(喜)가 요동으로 달아나다. |
BC222 | 연이 멸망하다. |
BC215 | 진시황이 갈석산(碣石山)을 방문하다. |
BC214 | 진시황은 임조에서 요동까지 지난날 중국 북부에 위치했던 진(秦), 조(趙), 연(燕)의 장성들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축조하다. |
BC209 | 진의 2대 황제 호해가 요동에 와서 그 아비(진시황)의 공덕비를 세우게 하였는데 요동의 갈석산이다.(주) |
* 갈석산: 진서 당빈전에 '진장성(秦長城)의 요새를 다시 쌓았는데 온성으로부터 갈석(碣石)에 닿았다'고 하였고, 통전(通典)에는 '갈석산은 한의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 있는데 이 산에서부터 장성이 시작된다'했으며, 진서(晉書)에도 '수성현은 진의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하여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갈석산임을 말해주고 있다.
연대 | 적 요 |
BC202 | 한고조(漢高祖: 유방)가 항우를 멸한 후 연왕인 장다를 없애고 노관(盧綰)으로 연왕을 봉하다. |
BC195 | 한고조가 죽자 노관은 흉노로 달아나고 그의 부하인 위만(衛滿)은 번조선으로 망명하였는데 번조선 왕 기준(箕準)이 위만으로 하여금 중국과의 변방인 상하운장(上下雲障)을 지키게 하다. |
BC194 | 위만이 당시 이곳에 중국의 난리를 피해 망명하여 수용된 연(燕), 제(齊), 조(趙)의 무리를 이끌고 처 들어와 번조선을 멸망시키다. |
BC | 상하운장의 서쪽 중국 국경에는 진나라 당시 초소인 요동외요(遼東外요)가 있었는데 한이 건국된 후에는 너무 멀어서 지킬 수가 없어 옛날 연(燕)과 진(秦)의 옛 요새였던 요동고새(遼東故塞)로 물러났는데 이 곳이 지금의 산해관(産海關)이다. |
BC | 위만은 도읍을 새(塞) → 패수(浿水) →상하운장(上下雲障) → 왕검성(王儉城)으로 옮겨갔다. * 왕검성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고 요서지망의 광녕(廣寧)이다. |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설치했다는 한사군의 낙랑군은 동으로는 요하에서 서로는 난하 사이에 발해만 해안에 연하여 있었다. 낙랑군의 북쪽 즉 내륙에는 서쪽은 요동군, 동쪽은 낙랑군의 속현이었던 대방현이 분리, 승격한 대방군 위치하였다.
한서에 전하는 낙랑군의 속현은 모두 25개였는데 후한서에는 18개로 줄고, 진서에는 6개로 줄고, 6개가 대방군으로 나온다.
縣 名 | 朝鮮 조선 | 屯有 둔유 | 渾彌 혼미 | 遂城 수성 | 누方 누방 | 駟望 사망 | 帶方 대방 | 列口 열구 | 長岑 장잠 | 提奚 제해 | 含資 함자 | 海 冥 해명 | 남 邯남감 | 浿水 패수 | 粘제 점제 | 增地 증지 | 昭明 소명 | 呑列 탄열 | 東시 동시 | 不而 불이 | 蠶台잠태 | 華麗 화려 | 邪사頭두昧매 | 前莫 전막 | 夫租 부조 |
漢書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後漢書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x | x | x | x | x | x | x |
晉書 | ○ | ○ | ○ | ○ | ○ | ○ | 대방군 | 대방군 | 대방군 | 대방군 | 대방군 | 대방군 | x | x | x | x | x | 대방군 | x | x | x | x | x | x | x |
x는 대부분 요하지역에 있는 현으로 고구려에 복속 된 것으로 추정됨
한의 낙랑군은 요하서쪽 난하 동쪽의 발해만 해안지방에 있었는데 일제는 그들의 대륙 침략목적을 위하여 평양, 황해도 지역에서 출토된 낙랑국과 대방국의 유물을 조작하여 이 지역이 한사군의 낙랑군과 대방군이 있던 지역이라고 역사를 조작한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역사 조작 내지 왜곡(歪曲)은 일제시대로서 끝난 것이 아니라 해방 후에도 일제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주구(走狗) 노릇을 하던 조선사람들에 의하여 계속되었고, 오늘날에도 일본의 우익분자들에 의하여 역사교과서 왜곡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병도(李丙燾)저「韓國古代史硏究(한국고대사연구)」(1976. 3. 博英社)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사학계의 한사군에 대한 견해는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하고 그 땅에 낙랑군(樂浪郡), 현도군(玄菟郡), 진번군(眞番郡), 임둔군(臨屯郡) 4개 군(郡)을 설치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은 한반도 중북부에 있었다'는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에는 '한무제(漢武帝)는 양복으로 하여금 해군을 이끌고 제(齊)에서 발해(渤海)를 건너게 하고, 순체(荀彘)는 육군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으로부터 위만을 쳤다 '고 하였다.
제(齊)는 산동반도에 있던 나라이고 발해(渤海)는 당시나 지금이나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에 있는 바다이므로 해군은 산동반도를 출항하여 발해를 건너 위만조선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왕검성(王儉城)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또 요동(遼東)은 지금의 난하와 만리장성 사이를 말하는 것으로 한의 육군은 최 동단 요동고새(遼東故塞) 즉 지금의 산해관(山海關)을 출발하여 왕검성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위만의 마지막 도읍지 왕검성(王儉城)은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패수는 지금의 대능하(大凌河)이며,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 따르면 왕검성은 광녕현(廣寧縣) 동남에 있다고 하였다.
* 사학계는 패수를 대동강으로 보아 왕검성을 평양이라 주장한다.
한(漢)과 위만과의 전쟁 결과에 대한 사마천의 사기에는 '우거(우거: 위만의 손자)는 지세가 험하고 견고한 것만 믿다가 나라의 대를 끊어지게 하였고, 섭하(涉河)는 공(功)을 도둑질하였다가 적의 군사에게 머리를 잃었으며(戰死), 누선(樓船: 양복)은 장졸이 적은 것을 가지고(핑계로) 어려운 일을 당해서 벗어나려 했다. 그리하여 번우를 잃고 도리어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공손수(公孫遂)와 더불어 전공을 다투다가 다 함께 죽임을 당해서 양쪽(한과 위만)의 군사 모두가 욕되었으며 장수로서 후(侯)에 봉해진 사람이 없었다 '고 하였다.
한과 위만 간의 전쟁은 위만조선의 왕 우거는 죽고 나라는 멸망하게 되었으며, 한(漢)의 장수 섭하는 공에 욕심을 내다가 전사하고, 공손수와 순체는 역시 전공을 다투다가 사형 당하였으며, 양복은 전투에서 꽁무니를 뺏기 때문에 폐 서인이 되는 처벌을 받아 전쟁을 치르고도 포상된 사람이 없으니 결국 이 전쟁의 결과는 한(漢)도 위만조선의 우거도 모두 함께 패한 셈이다.
북부여기(北夫餘記) 상편 4대 단군 고우루 13년조에 '한(漢)의 유철(劉철: 武帝)이 평나(平那)를 처들어와 우거를 멸하고 사군(四郡)을 두고자 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 이에 동명(東明) 고두막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의 침략군을 연파하자 그 지방의 유민들이 사방에서 응하여 도우므로 군보가 크게 떨쳤다 ' 고 하였다.
이 상의 두 기록을 종합하면 한무제가 해로과 육로로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을 공격하여 위만조선을 멸하자 동명 고두막이 군사를 일으켜 전의 번조선 유민을 이끌고 한의 군사를 격파하니 결국 이 전쟁의 승자는 번조선의 유민을 이끌고 군사를 일으킨 동명 고두막인 것이다.
한편 한(漢)의 위만조선 정벌시 한에 투항한 자들이 한의 후(侯)에 봉해졌는데 다음표와 같다.
한에 투항한 위만조선인의 후(侯) 책봉
작위 | 이름 | 위 치 | 적 요 |
畫淸侯 획청후 | 參(삼) | 제(齊) | 한한 2년(BC 99년)에 조선의 망노(亡虜: 도망친 포로)를 감춰 주어 옥에 갇혀 병사함 |
平州侯 평주후 | 夾(협) | 양부(梁父) | 원봉 4년(BC 107년)에 죽은 후 후사(後嗣)가 없어 봉작을 없앰 |
溫陽侯 온양후 | 最(최) | 남양(南陽) | 태초 3년(BC 102년)에 죽은 후 후사(後嗣)가 없어 봉작을 없앰 |
秋苴侯 추저후 | 陰(음) | 발해(渤海) | 정화 2년(BC 91년)에 죽은 후 후사(後嗣)가 없어 봉작을 없앰 |
幾侯 기후 | 長(장) | 하동(河東) | 원봉 6년(BC 105년) 조선과 결탁하여 모반을 꾀하여 죽임 |
한에 투항하여 후(侯)에 책봉된 사람은 모두 5명인데 3명은 수명을 다하고 죽었으나 후사가 없어 작위가 업어지고 2명은 조선(朝鮮)과 내통했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여기서 조선(朝鮮)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漢)을 격파하고 요하 동쪽 지역에 세운 졸본부여(卒本夫餘)를 말하는 것이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전 한(韓)조에 '위략에 이르기를 우거가 멸망하기 전에 조선 상 역계경(歷谿卿)이 우거에게 간했으나 우거가 말을 듣지 않자 동쪽에 있는 진국(辰國: 辰, 番, 莫의 三朝鮮의 통칭)으로 가니 그를 따르는 자가 2천여 호나 되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진국(辰國)은 위만조선의 동쪽인 요하 동쪽에서 진조선(辰朝鮮)을 이어 받은 북부여(北夫餘)를 말하는 것이다. 그 북부여의 일파인 동명 고두막이 한에 저항하여 한을 격파하고 졸본부여를 세운 것이다.
이상의 요동을 중심으로한 정세 기록을 본다면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그 땅을 다스리기 위하여 4군(四郡)을 설치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사군은 한이 위만조선을 정벌하고 그 땅을 다스리기 위하여 세웠다는 군현으로 중국측에서는 매우 자랑스러운 중국의 역사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史記) 조선전에는 한사군(漢四郡: 樂浪郡, 玄菟郡, 眞番郡, 臨屯郡)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니 실제 한사군이 설치되었는지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는 첫째 이유다.
왜냐하면 만일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면 한무제 당시의 인물이었던 사마천이 쓴 그 당시의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가장 권위 있는 사기(史記)의 기록에 누락 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한사군의 이름은 후한서(後漢書)에 그 4개 군의 이름이 나오고, 무능서(茂陵書)에 임둔의 이름이 나온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 표와 같다.
역사서 | 연대 | 적 요 |
後漢書(후한서) | BC108년 | 낙랑(樂浪), 진번(眞番), 임둔(臨屯) 3군을 설치했다. |
BC107년 | 현도(玄菟)를 설치하였다. | |
BC 86년 | 낙랑을 남부도위(7현)와 동부도위(7현)로 나누었다. | |
茂陵書(무능서) | BC 81년 | 진번을 폐하여 현도에 포함시켰다. |
후한서(後漢書)는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친 시기보다 120년 후에 저작된 것으로 사기에 비하여 신빙성이 떨어지며, 무능서(茂陵書)를 쓴 사마여상은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치기 10년 전인 원봉 6년(BC 117년)에 죽은 사람이니 10년 후의 미래를 내다보고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 한서지리지(漢書地理誌)에는 진번과 임둔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가연전(賈捐傳)에는 '무제가 갈석(碣石)을 지나 낙랑과 현도로써 군을 삼았다'고 하여 여기에도 진번군과 임둔군이 나오지 않음으로써 이들은 아예 설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위만이 번조선을 멸망시킨 후 한의 요동태수에게서 재물과 병사를 얻어 그 옆에 있던 진번과 임둔 두 고을을 쳤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한무제가 위만을 정벌하기 전의 일이다.
이상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다스리기 위하여 낙랑군과 현도군을 설치하였으나, 번조선의 후예 동명 고두막이 그를 따르는 번조선의 유민들을 이끌고 한의 군사를 격파하면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요하를 건너 졸본지역에 새로운 나라 졸본부여를 세운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의 세력은 일시적으로 약화되었으나 다시 요하 서쪽까지 팽창하였는데 혹시 이 때 진번군과 임둔군을 일시적으로 설치했으나 사기(史記)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 되지 못하여 기록되지 않았거나, 후의 중국 사가들이 조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
또 일제는 이러한 애매모호한 기록들을 십분 활용하여 그들의 대륙침략 목적에 유용하도록 한사군에 대한 역사조작을 강행하였으며 당시 조선인 사학자들이 이의 주구(走狗) 노릇을 한 것이다.
역사적 사실로서 확실한 것은 낙랑군과 현도군의 설치이며, 그 위치는 요하 서쪽 번조선-위만조선이 위치했던 왕검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지 결코 대동강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의 중북부가 될 수가 없다.
이렇게 역사기록이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나라 사학계는 그들이 일조해 온 일제 식민사관하에서의 역사조작을 뒤집지 못하고 연연하고 있으니 우리 민족으로서는 더 없는 불행이요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출처 | http://www.kma18.org/thought/damul5.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