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 등 한사군이 한나라의 침략의 결과로 세워졌다는 것이야 사실이지만, 과연 한나라의 머나먼 동북쪽 변방에 가서 정착한 소수의 한인(漢人) 관료, 상인, 장인 집단이 고구려 등 토착세력의 습격을 받으면서 주변 예맥, 옥저, 한인(韓人)들을 “억압·수탈”할 능력이라도 있었겠는가?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사학자들에게 낙랑의 중심지가 경성이나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와 같은 것으로 상상되기 쉬워겠지만, 근대 제국주의 국가 일본과 달리 전근대의 제국 한나라는 한반도 북부와 같은 변방들을 체계적으로 통제·수탈할 능력을 보유하지 않았다.
한사군이 한 제국에서 외군(外郡)으로 분류돼 토착민들의 거수(巨帥)와 그들의 ‘공물’을 받고 비슷한 가치의 사치품 등으로 갚아주는 관(官) 무역을 해도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는 토착민들에게 인두세를 징수하거나 노역에 징발할 수 없었다.
외부 세력의 정복이란 늘 인명 피해를 수반하는 비극적 과정이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문화 교류와 인구의 혼합화가 이루어져 더 복합적인 문화로의 길이 열린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침략을 긍정할 일도 없지만 전근대에 ‘우리’ 영토 안에서 많은 ‘외부인’들이 살았다는 것을 전면 부정하거나 ‘수탈적 식민지’라고 규탄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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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식민지를 알 수 없으니, 자꾸 일제강점기를 고대에 투영들 하시는데,
기술(통신, 자료관리 및 처리)적 미비로 고대에 우리가 생각하는 식민지가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전화가 되길해요, 사람들이 어디 붙어있는지 파악이나 쉬워요. 아님 그 자료를 손쉽게 찾아볼수나 있어요. ( 심지어 종이도 없어서 목간같은 걸로 기록하는 시대 ) 농부들이나 소득추적이 어느정도 되고 상인들은 옮겨다녀 추적이 안되니 국가적으로 상업을 억제하던 시절.
모든게 전산화된 오늘날도 주소지가 아닌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 알기가 어렵습니다. 심지어 신고안하면 얼마나 버는지 아직도 100% 추적이 안됨.
현대도 그런데 고대에 일제강점기같은 식민지가 가능하리라 생각하는건 정말 커다란 착각.
중심지에 성이나 짓고, 손닫는 범위안에서 세금이나 거두면 그나마 다행.
그리고 몇몇 제외하고 지배층 상당수도 결국 현지인 귀족인 형편.
이게 식민지가 맞기나 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