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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시기 조선의 생산량이 더높았답니다.
게시물ID : history_2790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꽃의연못
추천 : 1
조회수 : 1683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7/04/20 16:2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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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사이트에서 돌아다니다가 처음에 그러한 주장을 듣고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럴듯하게 자료를 퍼주시니까 그런가? 혹했는데
타사이트와는 말이 다르길래 고민끝에 작정하고 파보게되었습니다.
우선 그 이전에 다른곳에서도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다른분께 받지 않은 다른 자료도 몇가지 보여주시더군요.

기본적으로 양측의 자료는 비슷하여 공통적인 부분이 있는데 그부분은 올리지않겠습니다. (어차피 둘다 동의하실테니)
다읽고싶지 않으신 분은 5번부터 글을 보셔도 됩니다.

1. 당시 조선의 생산량과 일본의 생산량 비교
1-1 조선의 생산량은 세종대왕때 대략 4천만 조선석이고
 임란 직전에 토산물을 포함해서 6천만 조선석가량
토산물이나 기타 분분한 사항을 제외한다면 4천만 ~ 5천만 조선석가량(자료에 따라 오차있음)이됩니다.
(다만 임란에 직접적 1차자료는 모르겠지만 세종떄보다 낮아지진않았을테니 크게 문제있다고보진 않음)

1-2 반대로 일본석은 임란 전 일본식 1천8백만석입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하셔야할게 나라별로 각기 도량형이 달랐다는것입니다.

2. 논란이되는부분 기타지마만지교수님자료의 왜란당시 일본의 쌀 공출계획

  교수님의 책에 보면 조선의 총 석고를 일본식으로 계산하여 1200만석으로 잡았는데 이게 논란이되는부분은
세금의 총 양이냐. 혹은 세금의 기준이 되는 총양이냐 하는것입니다. 당시 일본 세금이 50%정도였으므로
세금의 양이 1200만석이라면 2배인 2400만이 되는것입니다. 물론 그게 아니라 총양이라고 한다면
1200만석이되는것입니다. (교수님의 책에 오타가있어서 900만석으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는 2배하면 1800만이겠죠)

논란이되는부분 : 이때 한글판과 일본판이 각기 있는데 한글판은 확실히 세금의 총양이 1200만이다라고 하여 논란이 없는데 일본판에서는 해석의 논란이 있습니다. 
먼저 반대하는 분은 당연히 세금의 가늠이 되는 총양이라고 해석하셨는데
제가 지식인에 물어본 결과로는 각기 다른 대답이 있었습니다. 전자가 맞다는사람도 후자가맞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신급의 파워지식인의 대답으로는 
세금의 가늠이 되는 총양이 1200만석이다라고 해석하는게 옳다고 1석 = 4석 증거를 뒷받침해주시더군요.

반대로 구글번역기나 국내 번역한 교수님들의 의견은 세금의 총양이 1200만석이다 라고하는게 옳다고 했습니다.
(교수님들의 의견은 제가들은것은 아니고 다른분이 이야기하시는것을 들었습니다.)


3. 키워드는 일본석 1석이 조선석으로 2석이냐 4석이냐

3-1우선 1석이 4석이라고 하는 분에게 직접적으로 여쭤본결과 1,2 차자료는 보여주지않으시더군요. 1차자료는 알아먹기 힘들다고 하시고 

2차자료로는 기타지마만지 교수님의 자료가 있다고 하시더군요.
기타지마만지교수님의 자료는 직접적으로 거론한부분이 어딘지 제가 일본어를 몰라서 모르겠습니다.
(긁기가 안되서 부득이하게 링크만 올립니다)

http://cafe.naver.com/booheong/148341

이게 제가 물어본 원문입니다.

3-2 반대로 1석이 2석이다라는 경우는 몇 자료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etiy
54



 조선 도량형의 경우 1석이 대략 90L 라고 자료가나오죠.
참고로 일본의 경우 제가 발견한것은 일본위키에서 본결과 메이지유신 이후 정립된 1석이 180L라고 하였다는겁니다.
(참고로 이자료를 보여주신 분은 메이지유신 뿐만 아니라 그전에도 그랬다고 교수님들이 주장하셨다고 했는데
 저는 몰라서 좀더 확실한 근거가 없나싶어서 일본어 위키백과로 검색해서 자료를 찾았습니다.)

3-1의 반박
1석 = 4석이 되는 이유는 그 기준이 도량형의 통일이 되기 이전 세종대왕에 그러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고려 후기문종 ~ 세종 에이르러서 도량형의 실제 기준이 2배로 높아졌기에 오해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책이 출처라네요.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173237


4. 기타 고려해야할점
당시 조선의 총 결수는 400만결이 넘었고 반대로 일본은 180만결정도라고 하더군요. 일본의 실제 생산량이 늘어난것은 간토평야 개간 후라고합니다.

4-1 다만 일본이 기후가 좋고 2 3모작을 한다는것을 감안해야하긴하는데 실제로 2 ~ 3모작을 할 수 있는 기후더라도 장마가 많이오면 지력이 약해지기 때문에 생산량이 떨어져서 실제로는 큰차이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합니다.(오히려 적을수도 있다더군요)
4-2 조선인의 식사량이 일본보다 2 ~ 3배많았는데 생산량이 인구비례였다면 어떻게 그런 식사량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5. 추론결과
한국의 생산량이 조선석으로 몇석이냐 하는 문제는 수많은 자료가 증빙하고있으므로 논란의 여지가 적고 그 양 또한 명치유신 당시 일본식기준으로 2천만석이 넘는 수치이다. (주장하는분에 따라서 이는 쌀이나 곡물만 포함한 수치이므로 쌀 22 ~ 2400만석에 기타 포함하여  3천만석까지 잡아야하는 분도있음
또한 일본식 자료로 한국의 석을 분석할 경우 낮게는 9백 ~ 1800만석까지 볼 수 있으나 적국의 자료인 관계로 불명확한 부분이 있을거라고 보고 이보다는 조선의 자료를 믿는게 합당하다고 보임.)
명치유신과 임란사이 도량형 기준이 크게 변동하지않았다고 가정하면 여전히 조선보다는 낮은 수치
(다만 본인이 찾은 자료로는 기준이 명치유신이기 때문에 실제 왜란당시 일본의 1800만 석이 기준이 명치유신당시와 비교했을떄 어떻게되는지는 명확하진 않음)


6. 결론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의 생산량이 일본보다 많다고 보는게 합당하다고 보이네요
출처
보완
2017-04-20 16:28:1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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