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린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네요. 정리해봅니다. 주로 [조선시대 수군 진형과 함재 무기 운용, 김병륜,군사 제74호]를 옮겼습니다.
미리 보는 요약
조선 수군은 다양한 종류의 위력적인 함포를 함선에 탑재했지만 선체의 동요 현상 때문에 원거리에서 높은 명중률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 수군은 적함으로부터 240m 거리에서 직사에 가까운 방식으로 함포 사격을 시작했다. 함포의 재장전 속도는 매우 느렸기 때문에 한두 차례의 일제 사격 후에는 적함과 상대적으로 근거리에서 교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함포의 제약 사항을 보완하기 위해 조선 수군은 함포의 대량 도입에도 불구하고 활을 쏘는 사수를 계속 유지시키고 질려포나 분통 등 근접전용 화약무기를 별도로 보유하는 사거리별 무기 운용시스템을 구축했다.
#해전 수행 방식에 있어서 화포를 이용한 교전만으로 왜군 선박을 격침시켰는가?
화포전 중심이라고 해서, 접현전이나 등선육박전이 아예 없었다거나 화포를 이용한 원거리 교전만으로 왜군 선박을 격침시킨 건 아닙니다. 관련 1차사료를 보면 접현전이나 등선육박전을 벌인 기록이 등장하고, 당초의 통념인 "화포를 이용해서 안전한 원거리에서 왜군 선박을 격침"시킨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통상적인 해전의 교전방식은 화포를 1, 2회 발사하여 왜선의 승무원을 살상한 후에 불화살을 쏘아 왜선을 침몰시키거나, 등선육박전을 벌여 선내를 수색해서 잡혀간 조선 백성을 구해오거나, 기왕 올라간 김에 왜군 수급도 좀 베어오고..란 식이었습니다. 멀리에서 마냥 화포만 쏜 게 아닙니다.
왜냐? 우선 수군에 화약이 충분했던 적이 단 한순간도 없습니다. 충무공이 원균에게 통제사직을 넘겼을때 화약보유량이 4,000근이었습니다. 이게 어느 정도의 양이냐? 저걸 판옥선에 골고루 나눠주고 나면 현자총통 1문당 7발 쏘면 화약이 바닥납니다. 원균이 경상우수영을 날려먹은 건 정말 통탄할 일이지만, 저 시절 조선 수군의 전투지속력을 생각해보면 주구장창 화포를 쏘아 왜선을 날려먹을 수 있었다는 건 보급을 무시한 꿈입니다.
# 안전한 원거리에서 전투하였는가?
다만 함상에서의 화약무기 운용, 특히 함포의 운용에는 많은 제한 사항이 따른다는 점을 고려하면 함포 운용 전술의 각론 측면에서 앞으로 좀 더 구체적인 분석과 논증 과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해전에서는 적 함선 뿐만 아니라 함포가 거치된 아군의 함선도 끊임없이 이동하고 흔들리기 때문에 정확한 명중률을 담보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특히 해상에 떠있는 선박은 롤링(rolling), 요잉(yawing), 피칭(Pitching) 등 다양한 동요 현상 의 영향을 받는다. 이 같은 흔들림 현상은 지상에서보다 함상에서의 화약무기 명중률을 현저하게 떨어트리는 요인이 된다.
조선 수군들이 화약무기를 운용할 때 어떻게 롤링이나 요잉 같은 다양한 흔들림 현상에 대처했는지, 혹은 반대로 이런 현상으로 인해 함포 운용에 어떤 제약사항이 있었는지 규명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이와 관련하여 천자총통에서 대장군전을 발사할 경우 탄도 곡선에 대해 이론적으로 계산한 박혜일 교수의 연구결과를 보면 사각 5도에서 사거리는 152m, 20도에서 525m라고 한다. 문제는 5~10도 수준의 롤링은 일반적인 해상 조건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사각 5도를 적용했을 때 5도의 롤링으로 인한 오차가 더해진다면 사각이 10도가 된다. 박 교수의 계산결과를 참고할 경우 이때 발생하는 사거리 오차는 137m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사각 변화에 따른 발사체의 비행 최고 고도 문제이다. 사각 20도일 때는 비행 중 최고 고도가 49.5m, 각 44도면 최고 고도가 196.3m에 달한다. 조선 수군이 10~20도 정도 수준의 사각으로 사격을 시도하는 상황에서, 5~10도 수준의 롤링이 발생한다고 가정한다면 실제 사각은 15~30도로 변하게 된다. 이 경우 대장군전의 비행 고도 자체가 50~ 150m로 높아지는 것이 문제다. 이런 높이라면 사거리 오차가 발생했을 때 총통에서 발사된 대장군전이 표적 선박의 돛보다 더 높은 고도로 선박 상공을 통과할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롤링에 따른 사각 변화와 이에 따르는 사거리 오차보다는 사각 변화에 따른 발사체의 최고 비행 고도의 변화가 명중률 향상에 심각한 장애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오차 부담을 줄이기 위한 현실적 방법은 가급적 근거리에 접근한 후 사격을 하거나 사각 자체를 가급적 작게 잡는 방법뿐이다. 만약 사각 5도로 사격할 때 대장군전의 최고 비행 고도는 3.2m에 불과하고 10도의 경우에도 최고 고도는 13m이므로 어느 정도 오차 극복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요동 현상이 있는 함선에서 화약무기를 사격할 때 높은 명중률을 확보 하기 위해서는 근거리에 접근해서 사격하거나, 그것이 어렵다면 상대적으로 낮은 사각을 선택하여 수평에 가깝게 직사 방식으로 사격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바다란 아무리 잔잔해도 선박을 요동시키게 마련이며 이 같은 요동은 함포 사격에 중요한 장애물이다.
더구나 해상에서는 아군 함정과 적 함정이 동시에 이동하기 때문에 조준과 사격에는 더욱 어려움이 초래된다. 이런 현상 때문에 현대 해군의 함포도 기본적으로 곡사포가 아니라 직사포를 사용한다. 17세기 영국 해군도 이 같은 문제 때문에 근거리 수평 직접사격 (Point-Blank)을 초과하는 사거리에 대해 사격하는 것을 별로 선호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순한 함포의 최대 사거리로 사격하는 것은 명중률이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19세기 이전 조선의 포가는 사각 조절이 매우 어렵거나 불편한 방식으로 되어 있다. 또한 조선군이 간접사격에 참조할 수 있는 사각별 사거리 제원이나 화약량별 사거리 제원이 존재했다는 증거도 없는 실정이다. 이 경우 체계적인 사거리 수정은 불가능하고 경험에 기초한 임의적인 조절만 가능할 뿐이다. 다시 말해 수평사격에 가까운 낮은 사각이 아닐 경우 화약무기 운용요원의 숙련도가 이례적으로 높지 않는 한 실질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의 명중률을 확보하기는 어렵다.
지금까지 조선 수군은 막연하게 총통의 긴 사거리로 상대적으로 사거리가 짧은 조총을 압도했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 같은 선박의 요동에 의한 오차와 사격 기법상의 문제를 고려한다면 조선 수군은 상대적으로 낮은 사각의 수평에 가까운 직사 사격을 할 수 밖에 없고 이때 함포의 유효사거리는 함포의 성능상 최대 사거리보다는 훨씬 짧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 같은 추정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료가 해군사관학교 박 물관에 소장된 수조규식이다. 수조규식에 따르면 적선이 200보 부근으로 근접하면 대⋅중 총통 등 각종 함포와 화전 등 로켓형 무기를 사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비록 이 문헌이 임진왜란 당시의 것은 아니지만 조선 수군의 함포, 즉 중⋅대형 총통의 실전 상황에서 사격 시작 거리가 제원상의 최대 사거리보다 훨씬 짧았음을 알 수 있다.
복원된 조선시대 총통으로 철환을 사격한 실험 결과에 따르면 사거리가 지자총통 550m, 현자총통 1,250m, 황자총통 1,590m, 불랑기 1,400m 등에 달해 수조규식의 사격 시작 거리 240m와는 큰 차이가 있다. 이는 조선 수군이 함포를 기본적으로 수평에 가까운 직사 사격 방식으로 사격했음을 간접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다. 조선 후기의 군사실학자였던 송규빈의 저서인 풍천유향에서도 수군 전선 승조원의 직책별 임무를 설명하면서 “대포수는 앞뒤의 전조성과 후조성을 눈으로 보고 아래 위와 좌우로 사람과 배를 향해 발사한다”고 언급, 수군에서 상대적으로 사각이 낮은 직사 사격 방법을 보편적으로 사용했음을 재확인시켜 준다.
천자총통에서 대장군전 발사 모델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롤링에 따른 사각의 불확실성, 화약량과 발사체의 무게 차이를 고려할 경우 사거리 약 70m 정도까지는 높은 명중률을 확보할 수 있겠지만, 100m가 넘어갈 경우 명중률이 현저히 떨어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결국 조선 수군 입장에서 가장 이상적인 교전거리는 표준형 조총 유효사거리인 50m를 벗어나면서도 롤링에 따른 오차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거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상호 이동하는 선박 간에 벌어지는 해전에서 과연 아군이 원하는 교전 거리를 계속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므로 실제로는 이보다 더 근접한 상태에서의 교전도 빈번했을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한산대첩 당시 조선 수군 중 다수가 왜군의 철환 공격으로 인해 전사 내지 부상을 입었다. 이는 결국 왜군의 조총 사거리 내로 근접한 상태에서도 전투가 벌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판옥선의 속도에 대해서는 아직 학계의 이견이 남아있지만 일부 학자들의 주장대로 판옥선의 추정 속도가 시속 5노트였다면 240m (200보)을 이동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약 1분30초 이내가 될 것이다.조선시대 대형 화약무기의 장전 속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신기비결에 나오는 것처럼 대형 탄환과 소형 탄환을 층층이 넣고 격목이나 토격, 화약과 화약종이까지 겹겹이 넣는 방식으로 장전했다면 1회 장전에 소요되는 1분을 초과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이라면 240m 거리에서 최초의 함포 사격을 시작한 후 적함과 보다 근거리에서 근접할 때까지 1회 이상 추가 장전하여 발사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결국 함포 1~2회 일제 사격 후 조총과 활을 사용하는 근접 교전 상황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수군이 함포 등 화약무기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을 쏘는 사수를 중시했던 것도 이 같은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들은 유효사거리가 50m가 넘는 대형 조총을 사용하기도 했으므로 실제 교전 상황은 훨씬 복잡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 수군 함선이 조선 수군 함선에 과도하게 접근했을 경우에도 화약무기 운용상의 제약점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배가 완전히 붙는 접현전의 경우에도 화포의 사용이 제한되는 상황을 예상할 수 있다. 일본의 대형 아다케 등 적의 함선 높이가 판옥선과 유사한 상태라면 접현전 상태에서도 함포 운용에 무리가 없다.
하지만 세키부네나 고바야처럼 일본 함선의 높이가 조선 수군의 주력함인 판옥선보다 현저히 낮은 상태라면 접현시에 하향 사격을 해야만 사각이 나올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같은 하향 사격시 대포 운용에 어떤 제한사항이 발생하는지 여부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대포에 장전한 발사체가 흘러내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이런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하향사격(Depressed Fire) 할 때 이중 격목을 사용해서 포탄 등 발사체를 흘러내리지 않게 했다.
하지만 현존하는 조선시대 화약무기 관련 문헌에서 이중 격목을 사용한 직접적 증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더구나 만약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사용 한 포가의 형태가 동차 내지 그와 유사한 구조를 갖춘 포가였다고 간주한다면 초단거리 하향 사격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포가의 앞부분이 높고, 뒷부분이 낮아 17도 이하의 사각을 선택하는 것이 구조상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약 일정거리 이상 접근했을 때, 특히 완전히 배가 붙는 접현 상태에서는 총통의 사각 제한 때문에 사격 불능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이 때는 질려포통 등 손으로 투척할 수 있는 화약무기나 활 등 일반적인 투사 무기를 운용할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일반적인 함포의 경우 여러 가지 제약 사항이 있으므로 근거리 전투 및 접현전에서 이를 보완해줄 무기가 필수적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도 수조규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수조규식에는 적선이 100보 이내로 근접하면 조총 사격을 시작한다고 되어 있다. 동시에 100보에서부터 함선을 선회하면서 사격하도록 되어 있다. 활의 경우 90보 이내로 들어 오면 사수(射手)들이 활로 화살을 쏘라고 규정한 대목과 30보 이내에서 사 부(射夫)들이 활을 쏘도록 규정한 내용이 동시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30보에서 활을 쏜 후 탄환을 쏘고 관분통(罐噴筒)과 석류화전(石榴火箭)도 사용할 것을 명시하면 더 근접해서 현측에 접근한 상태가 되면 분화(噴火), 철도리깨(鐵道里鞭)를 사용하고 조약돌을 던져 교전하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기록에서도 투척식 폭탄인 질려포(蒺藜砲)와 대발화(大發火)의 사용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폭탄의 존재는 당시 조선 수군이 원거리 해전뿐만 아니라 접현전(Boarding Tactics)에도 대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 수군은 중⋅대형 총통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소형 화약무기, 활, 관분통, 석류화전, 철도리깨, 조약돌 등 사거리별로 조밀하게 운용할 수 있는 종합적인 무기 운용시스템을 구축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수군이 함포를 대량으로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전 시기 에 걸쳐 판옥에 활을 쏘는 전투요원인 사수, 혹은 사부를 일정 규모 이상 편성시킨 것도 중⋅대형 화약무기의 제한사항을 보완하려는 의도 때문일 것이다. 숙종 2년(1676년)에 확정된 수군변통절목(水軍變通節目)에 따르면 각 전선(戰船)의 승조원 중 전투원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인원은 사부, 화포장, 포수 등 총 52명이며 이중에서 활을 쏘는 사부는 18명으로 전체 전투원의 34%에 해당한다. 1700년대 중엽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상좌수영 수조홀기에서도 각 전선의 전투원 47명 중 사부는 38%에 해당하는 18명이다. 전라우수영지에 수록된 전라우수영 각 전선의 전투 원 54명 중에도 사부는 37%에 해당하는 20명이다. 1808년에 작성된 만기요람에서도 전라좌수영 전체 전투원 291명 중 사수는 36%에 해당하는 105명에 해당한다.
이처럼 17~19세기 초에 걸쳐 사부 혹은 사수는 전체 전투원 중 평균 30% 이상을 상회했다. 조선시대 화약무기의 우수성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조선식 대형 총통의 사거리 우위 덕택에 아주 쉽게 일본 수군에 승리했다고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하지만 위에서 검토한 화약무기 운용상의 여러 제한점을 고려한다면, 대형 총통의 원거리 사격 못지않게 사거리에 무관한 조선측 중⋅ 대형 총통의 화력 우위, 조선의 전통적인 무기인 활의 위력, 질려포 등 근접전용 화약무기의 역할에 대해서도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 다. 이와 관련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위력 있는 장거리 포탄을 사용 할 수 있는 대형 총통 뿐 아니라 소형총통과 궁시류, 질려포와 대발화 등 특수무기를 종합적으로 갖춘 것이 승리의 주된 요인이 되었다는 시각의 연구 결과는 조선 수군 무기 운용의 장점을 매우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