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였고 그 주제에 대한 정리를 두서없게나마 짤막하게 한바 있어 해당 글을 가져와 봅니다,
1. 학익진
학익진은 대중 문화에 널리 알려진 이순신 장군의 트레이드 마크일것 입니다, 이 학익진을 통해 적을 감싸안고 화포를 난사한다는 것인데 문제는 측면 화력의 활용에 매우 큰 장애를 안겨줍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속도를 맞추기도 어렵고,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상황 아래에 다수의 아군이 뭉쳐있는 진형 내의 사선 안에 아군을 둬서도 안되는 문제는 둘째치고 측면 화력이 한 쪽만 사용되어 재 장전을 비릇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어 실제 화력 투사라는 문제에 있어 매우 부적절한게 사실입니다,
더불어 학익진은 이순신 장군만의 고명한 절초 아니 필살기 즈음로 묘사되는 바와 다르게 당시 조선군의 수군 육군 모두를 통틀어 가장 기본적인 전법이었습니다, 문종이 저술한 진법陣法에 처음 등장하는 이 전술은 보조적인 전술즈음으로 취급당하다 중종이 직접 지시를 내려 당시에 주요한 전술로 자리를 잡은바 있으며 사실 이 모든 것보다 큰 문제는 이순신 장군이 작성한 장계와 일기에서 언급되는 전술은 장사진과 학익진 단 둘뿐이되 그나마 학익진은 단 한차례 한산 대첩에 관련된 기록에서만 언급됩니다,
즉 당대의 어떻게 보면 많고 많은 전술중 하나일뿐입니다,
2. 규정의 문제
명종 실록 14년 기사에 이르기를 화포의 모범적인 사용 방안은 몸을 노출시키지 않고서 빨리 노를 저어 곧장 적선에 가까이 다가가 그 높낮이에 따라 동시에 일제히 발사하는 것입니다, 사실 고질적으로 보고되는 명중률의 문제라던가 생산에 관한 가령 이순신 장군이 원균에게 통제사를 넘길때 조정의 지원을 등에 업고 그 동안 있는자원 없는 자원 깡그리 끌어 모아 배비한 화약이 4000근 정도 되나 현자총통 20문을 기준으로 볼때 1회 사격당 화약이 250근이나 소모되는 현실등을 생각하면 화약 병기의 사격이 안고 있는 경제적, 군사적 문제는 무시할 수없는게 사실이라 이게 정답일수 밖에 없는데 이러한 문제를 정리한 책이 조선 수군의 훈련 교범 즈음 되는 수조 규식입니다.
이 당시 조선 수군의 양상?을 어느 정도 엿볼수 있는바 사거리 문제에 있어 총통은 200보 조총의 사거리는 100보 활은 50보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롤링과 피칭, 요잉등 사거리를 변동하는 다종다양한 상황이 가장 안정적일때를 기준으로 육군에 비해 1/5~1/10 수준인 200 - 240m의 사거리를 잡고있는 것으로 실제 전장에서는 이보다 짧아질수 밖에 없는바 이러한 측면에 대한 개선과 관련된 이순신 장군의 기록과 그로 인한 개선안 강구는 현재까지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빠르게 기동하며 접근하는 상대를 두고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지속적인 사격을 퍼붓는다는 것은 바람과 해류를 타고 움직이던 범선의 시대에는 더욱이 롤링과 피칭등 사거리에 변화를 주는 요인등을 고려하면 성립할수가 없는 것도 빼먹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흔히 말하는 대항해시대에서 조차 백병전을 위시로한 근접전은 필수 아닌 필수였습니다,
3. 기록의 문제
사실 이게 가장 큰 문제인데 이순신 장군은 기존 수군의 패러다임을 혁파하지 않았음을 본인이 저술하고 있습니다, 무슨말 인가 하면 가령 한산도 대첩의 전과를 올린 장계에는 바다 가운데 나와 장수들에게 명하여 학익진을 벌려 각종 총통을 각각 쏘아 적선 2~3척을 격침시키니 여러척의 일본군이 그 사기가 떨어져 일시에 도망가려 하여 이에 흥분한 장수들이 승세를 타고 흥분하며 앞다투어 돌격하여 화살과 탄환을 쏘아 적선을 분멸하고 적을 해치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당포 당항포 등의 승전을 기록한 장계에는 당항포에 도착했더니 왜선 한척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였는데 첨사가 불의에 '돌격하여 접근한 뒤' 총통을 쏘고 질려통을 비릇한 활과 철환등 개인화기를 투척하여 적을 살상하며 이후 접선을 위해 요구금 즉 쇠갈고리를 던져 끌어내었더니 반수 이상이 물에 뛰어 들어 죽었다는 기록을 적고 있습니다.
또한 1598년 흥양 현감 최희량이 군선을 건조하며 보고한 문서를 보면 소철환과 화살이 여타의 그 것들 보다 많은 것을 볼수 있습니다, 즉 인명 살상이 주 목적인바 어디까지나 조선 수군의 전술은 백병전을 회피하되 거부하지는 않는 것임을 알수 있지요.
즉 이순신 장군이 기존의 조선 수군의 전술, 패러다임을 혁파하고 화력전 위주의 전술을 펼쳐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다 보기는 어려운게 사실입니다, 일전에 했던 비유를 빌자면 조선 수군을 허물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우신게 아니라 조선 군 전체의 고질적인 사기와 군율의 문제를 해결하는등 관리를 잘 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기존의 전술은 화약 병기를 기반으로 하는 화력투사를 중심으로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게 사실입니다, 비록 판옥선은 수십년의 노하우 아니 조선 건국 초기부터 쌓아올려진 노하우가 응집된 함선인 것은 맞습니다만, 하향 격목의 부재, 백병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높은 위치라던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던 조선의 생산력과 경제 능력등을 고려해볼때 그러한 사용에 다소 적절하지 못한것도 사실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