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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성리학이라는 문화/사상 자체가 완벽함을 추구하는 건 아닙니다.
게시물ID : history_2776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0
조회수 : 54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7/03/28 01:3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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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적어보자면 유학은 송나라 이전까지는 어쨌든 간에 평탄하게 잘 굴러간 편입니다만 송나라 시기로 접어들면서 사상적, 현실적 문제에 봉착합니다, 이중 사상적 문제는 글의 주제와 큰 관련이 없으니 패스하고 현실적 문제를 보자면 아주 간단합니다, 더이상 유학의 기존 사상으로 커버칠수 없으리만치 사회가 복잡해 졌어요,

가령 생각을 해봅시다, 조세 제도의 근간은 직접세입니다, 즉 국가가 해당 지역에 대한 완벽한 통제를 할수 있는 해당 지역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합니다만 송나라 시기 농업 혁명이라 불릴만한 산출량의 폭증과 인구의 급증으로 말미암아 상품 작물 재배가 늘어나는 한편 그러한 부와 인구를 뒤에 업은 지방 세력이 중앙의 컨트롤에서 이탈하는 혹은 이탈하려는 현상이 빈번하게 벌어집니다.

이 걸 국가가 적절하게 손도 대고 만져야 하는데 급변하는 시대상에 대하여 더이상 따라가지 못할정도로 체제가 도태되어버린 것이지요, 그리하여 무엇을 추구했는가 하면 도덕에 의한 통치입니다.

아시다시피 명나라는 과거제와 학교제를 합쳤습니다, 그리하여 학교에서 배출하는 학생들 보다 적은 수를 관직에 선발했지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재밌는게 현대에서는 다 합쳐야 십 수년을 공부하면 그 것으로 끝입니다, 그 것도 어떠한 형이상학적인 도덕적 관점이나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실리에 따른 학문을 추구하지요,

그러나 당시는 어떻습니까? 적게는 십수년 많게는 수십년, 아니 그냥 나대신 집에서 일해줄 사람만 있으면 평생을 공부했습니다, 무엇을? 바로 이상입니다, 황제에게 충성하고 백성을 선도하고 자기 자리에서 본분을 다하는 그 이상을 평생에 걸쳐 뼈에 아로새겨 가며 공부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됬을까요?

일단 겉으로라도 지켜야 할 도덕적인 상한성이 매우 매우 높아졌습니다, 그 들은 나랏님에게 충성을 다하고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며 그 들을 이끌 막중한 책임을 이수해야 했습니다, 즉 더 이상 현실적으로 법을 가지고 통치할수 없는 부분들은 속출하나 그에 대하여 도덕적인 관념을 대입하여 도덕적 상한선 아래에 자정 작용을 돌려버리는 것이었지요,

이러한 법 위에 도덕의 개념을 둔 상황에서 그럼 어느 정도를 내 몫으로 챙겨야 하는가 인간은 어디까지 삐뚤어져도 좋은가 같은 문제들이 나오는데 솔직하게 말해서 규정된 바가 없습니다, 네가 외면적인 도덕적 의무를 충실히 이행한다면 그 이면에서 무슨 일을 하던간에 그 건 어디까지나 네가 스스로 지켜야 할 문제이지 누군가가 강제하거나 지키지 않는다 해서 무언가 문제가 생길 일은 아니었죠,

그러하기에 이제 황희 정승과 같이 야사와 실상이 괴리되는 인물들이 생기곤 했고, 많은 관리들이 현실과 타협하거나 혹은 생계형--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비단 높으신 분들뿐만 아니라 상번군의 근무지 이탈/무기 밀매/부업등의 일부터 낮게는 양민과 천민/유적자와 무적자간의 문제까지 사회 전반에 걸쳐 다종 다양한 법으로 컨트롤할수 없는 혹은 법 위의 사상적 관념에 따라 여러 계층에서 무마되는 온갖 일들이 벌어졌고 물론 그에 대한 도덕적 잣대는 엔간해서는 세종 대왕님의 그 것과 같이 대저 개인의 판단과 정치력에 좌우될 문제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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