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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XX를 만났다
게시물ID : travel_2774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바슐라르
추천 : 3
조회수 : 193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5/01 20:3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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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 탄자니아 여행 중, 매일 다른 지역에서 20~30km의 러닝을 하자는 계획을 세운 우리는 루쇼토라는 이름의 지역에 도착하기 20km 전, 차에서 내려 러닝을 시작했다. 늦은 오후, 러닝을 시작하기에 다소 늦은 감이 있었지만 햇살이 없어서 뛰기 좋다는 판단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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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글맵으로 지점을 체크하고 기사님에게 러닝이 끝나는 지점에서 픽업을 부탁했으나 몇 시간을 뛰어도 차를 찾을 수 없었다. 목적지인 루쇼토 역시 나오지 않았다. 길을 잃은 것이다. 밤이 찾아오기 시작했을 때, 그때 러닝을 멈췄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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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은 기습적으로 하루를 장악했다. 멀쩡히 존재하던 풀과 소들이 힘껏 어두워지더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고 떨어져 뛰던 동행 역시 보이지 않았다. 밤은 이마를 탁 때리며 공포로 탈바꿈했고 나는 그것에 대해 순진한 생각만을 지녔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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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의 한가운데는 달빛도 들지 않았다. 심지어 물도, 먹을 것도, 돈도, 아무것도 없다. 배터리가 채 20퍼센트도 남지 않은 핸드폰이 전부지만 그마저도 시그널이 잡히지 않았다. 만약 동행을 찾지 못한다면 이 황량한 들판에서 맨몸으로 밤을 지새워야 한다. 조금 더 필사적인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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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어둠 속에서 한참을 헤매다 보니 현실 감각이 무뎌졌다. 하늘이 땅 같았고 땅이 허공 같았다. 발의 촉감으로 간신히 차도와 흙길을 구분하며 달렸다. 발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간신히 내 현실감각을 붙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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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동행들을 지나쳤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충분히 그것을 가능케하는 어둠이었다. 또한 멀리 오긴 했으나 몇 시간 전에 마을을 분명 지나왔으니, 방향을 바꿔 마을로 간다면 어떻게든 하룻밤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일단 그곳에서 밤을 보낸 후 다음날 동행들에게 연락을 취해야겠다고 마음을 바꿔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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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대편으로 넘어와서 차를 잡을 요량으로 손을 미친 듯이 흔들었다. 그러나 내가 보이지 않는지 경적도 울리지 않고 차들이 나를 스쳐갔다. 뒤이어 연속으로 몇 대가 휙 지나쳐간다. 비참하다. 갑자기 도로 한가운데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목덜미를 핥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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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차를 잡는 것을 포기하고 마을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처음보다 어둠 속에서 달리기가 용이해진 것이다. 평소 사용하지 않았던 감각들이 점차 열리고 있었다. 마치 온몸으로 앞을 보는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본능이라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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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쯤 뛰었을까, 문득 나의 맞은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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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발을 멈췄다. 선명할 정도의 시선에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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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 나의 맞은편에서 유유히 존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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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뭔지 모를 그것이 던지는 시선이 화살이 되어 날아왔다. 피할 수 없다. 날아오는 시선은 나를 뚫고도 한참을 지나가 도로 한가운데 가서 박혔다. 마치 나를 보는 동시에 어둠을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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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점 더 느껴지는 선명한 존재감. 몇 번이나 멈춰 설까 고민했지만 제자리에 멈춰 서 있기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그 정체 모를 것이 점점 다가온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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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주춤주춤 뒷걸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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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은 내게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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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점점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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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에게서 불쑥 팔과 다리가 자라난다. 하나, 둘, 세 개의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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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슬렁어슬렁 다가온다. 크기는 나보다 조금 작았으나 형체는 처음 보는 곡선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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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몸이 저릿할 정도의 긴장,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의 아프리카에서 마주친 그것은... 허무하게도 자전거를 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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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모습은 기괴했다. 실패한 케이크의 장식처럼 낡은 몸통의 옷과 이질적이게 새빨간 색깔의 비니, 너무나도 헤져 원래의 직물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인 바지, 차라리 바퀴가 네모난 자전거가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고물 자전거를 두 손으로 꽉 잡고선 표정도 없이 눈만 부릅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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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나는 인간이라는 같은 종을 만났다는 단순한 사실이 이렇게나 기쁜 일일 줄 몰랐다. 내게 아직 꼬리가 남아있었다면 미친 듯이 흔들었을 것이다. 그와 나의 공통분모는 오직 ‘인간’이라는 사실 단 하나밖에 없었지만 나는 그 하나의 사실 때문에 내 앞의 사람을 순식간에 신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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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가움과 흥분을 가득 섞어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날 봐서 놀란 건가’하고 멋쩍게 다가갔으나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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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이 탄다. 무언가 잘못되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무관심을 애써 무시한 채 “*무중구?”라는 말만 반복하며 외국인을 보았냐고 물었다.
*외국인을 뜻하는 스와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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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답변 대신 갑자기 “와구구구구”라는 거대한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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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구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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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얼어붙었다. 장기가 몸부림치는 듯한 그의 목소리는 몇 개월 동안 들었던 언어가 아니었다. 외계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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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정사정없이 다시 “와구구구”라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놀라 뒤로 물러나며 허둥지둥 핸드폰의 플래시를 비췄다. 그리고는... 아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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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에게는 장애가 있었다. 반사적으로 얼굴에 냅다 지른 플래시에는 만년설이 하얗게 쌓인 동공이 비쳐왔다. 한참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플래시를 얼굴 가까이 비쳤음에도 불구하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계속 “와구구구” 소리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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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아였다. 비대칭한 얼굴과 부조화스러운 몸짓으로 알 수 있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 하늘이 내게 보내준 인간이 농아라니. 쓴웃음이 났다. 신이 있다면 따지고 싶을 정도로 짓궂은 장난이었다.   
*청각, 언어 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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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둠 속에서 솟아난 사람이 나에게 해를 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한참이나, 그것이 예의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불을 얼굴 가까이서 이리저리 비춰가며 자세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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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정말로 신이 있다면, 이 농아로부터 도움받을만한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무언가'가 있을 리가 만무했고... 나는 당시 이러한 현실에 시퍼런 분노까지 느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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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눈은 세상의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플래시가 반사되지 않았다. 눈 안에 뿌옇게 내린 혼돈이 묘하게 나의 심리상태를 반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눈으로 여기서 뭘’이라고 생각하려다가 별안간 그가 살고 있는 세상에선 오히려 어둠이 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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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뭐가 좋은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섬찟하게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입을 초승달처럼 벌린 채 딱 멈추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느꼈던 공포를 보상받을 마음으로 뭐가 웃기냐고 한 마디 빽 내지르려다가 간신히 목 아래로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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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처 없이 흐르는 시간 속 난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만난 이 사람을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내 한 몸이나 간수하자는 마음으로 다시 마을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단숨에 농아를 지나쳤다. 이기적이었지만 그 누구도 이 상황에는 나를 탓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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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뿔싸, 그가 또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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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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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어둠을 사모하는 듯 감탄조 “오!”라고 딱 한 음절의 소리를 내질렀다. 사물이 없는 세계에서 새로운 소리는 커다란 빌딩과도 같은 존재감을 내뿜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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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돌아본 그는 불쑥 오른쪽 팔을 치켜든 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향하는 반대 방향으로 팔을 어정쩡하게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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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또다시 “오!”라고 외쳤다. 팔은 여전히 내리지 않은 채로. 나는 아무 행동을 할 수 없어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시간은 이때다 싶었는지 상대적으로 흘러가고... 마치 수십 분이 지난 것 같이 느껴지는 몇 분이 흐르고 나서 그는 아주 천천히 팔을 내린 다음 느릿하게 자전거 페달을 밟아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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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린 속도로 자전거가 나를 지나치자마자 어둠이 그를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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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꼼짝 않고 그의 행동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다가 한 번 속아보는 기분으로 내가 향하던 반대편, 그러니까 그가 올린 팔의 방향으로 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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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거짓말처럼 몇 분 후, 땀을 비오듯이 흘리며 아프리카에서 동양인을 찾고 있는 두 백인을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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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이 내 어깨를 잡고 흔들며 도대체 어디에 있었냐고 물어봤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둘을 만난 안도감보다 외려 몇 분 전에 만난 그 외눈박이 농아가 마음에 남아 미소 지을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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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청회색 눈과 천천히 내렸던 팔, 빨간색 비니와 낡은 옷... 어쩌면, 어쩌면 내가 조금 전 아프리카를 순찰하던 *목부牧夫의 신을 우연히 마주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기 때문이다.
*헤르메스 : 여행, 나그네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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