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더 올라가니 눈물 바위에서 본 것처럼 이곳도 엄청난 크기의 바위 아래가 안으로 움푹 파여져 있었다. 그 위에서 물방울이 온 사방으로 흩어졌다. 흩어지는 물방울은 햇빛을 받아 영롱한 빛깔로 반짝였다. 그래서 이곳을 에메랄드 폭포라고 한단다.
에메랄드 폭포.
더위 속의 단비.
폭포 아래서 사람들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산을 휘감은 열사의 더욱 바람도 이곳 폭포에서 멱을 감는 모양인지 제법 선선해진 듯 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에메랄드 빛 물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수도 없는 물방울이 발아래 바위로 곤두박질치다가 계곡 아래로 달아났다.
자이언 케니언. 엄청난 규모의 바위산이 뿜어내는 장엄함은 압권이었다. 온통 사방은 수직 절벽으로 가득했다. 사람으로 비유하면 자이언 캐니언은 분명 남성일 듯했다. 산은 씩씩했고, 거침이 없었다.
저 절벽ㅡ
중국 같으면 저 멋진 산세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보기 위해 철제 난간으로 잔도를 설치하고 그 옆으로는 케이블카를 놓아 사람들로 하여금 짜릿함을 느끼도록 하지 않았을까 싶다. 오래 전 태항 산을 다녀갔을 때는 그래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최근에는 그곳 절벽에 아슬아슬한 잔도를 설치하고 절벽 끝에는 아슬아슬하게 전망대를 설치해 놓은 것을 보았다. 스릴만점의 잔도이고 전망대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한번 훼손된 자연은 복원이 요원할 수밖에 없다.
중국만 그럴까? 우리나라 같으면 읽지도 못하는 한시가 멋을 부리며 써져 있을 것 같았다. 누가 어떻게 절벽에 매달려 바위를 쪼아냈는지 그저 신기해 보이는 옛 조상들의 솜씨다. 그들에게 자연은 어떤 의미였을까?
북한 같으면 당연히 ‘조선인민주주의공화국 만세’ 같은 것이나 수령에 관한 칭송의 글이 엄청난 크기로 써져 있을 듯싶다. 북한의 온 산의 기묘한 바위에는 어느 곳 할 것이 없이 충성의 글이 가득 새겨져 있다. 통일이 된다면 그런 모든 것들의 운명은 어찌될까? 그것도 한 시대의 암울한 유적이므로 보존해야한다고 할까 치욕의 역사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없애야 할까. 없앤다면 그걸 무슨 수로 없앨까. 폭파를 해야 하나 아니면 시멘트 같은 것으로 매워야 하나. 이곳 산엔 어느 곳에서 아주 조그마한 훼손도 없었다. 그저 산은 산일뿐이다. 이곳의 이름처럼 정말로 이곳에서 기도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그저 조용히 기도만 했을 뿐 자연의 장엄함에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을 듯싶다. 우리의 속리산처럼 이곳저곳에 신을 모시고 기도를 한답시고 각자의 작은 사당을 차릴 일이 아닐 것이다. 산에 영험함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산은 훼손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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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곳은 자연이 날 것 그대로였다. 자연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그들 옆에 함께 있는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자연으로부터 위안을 얻고 편안한 안식을 얻고 있었다. 그러니 그곳에 쓸데없이 손을 댄다는 것은 자연에 대한 모욕일 테다.
자이언 캐니언 관광을 마치고 우리는 바로 브라이언 캐니언으로 향했다. 자이언 캐니언을 거의 빠져나올 쯤에 있는 거대한 바위산들은 온통 주름으로 가득했다. 오랜 바람에 사달린 흔적일 테다. 그런가 하면 빗물 또한 억겁의 세월 동안 바위를 괴롭힌 탓에 거대한 바위산이 마치 바둑판처럼 가로 세로 줄이 새겨져 있는 곳도 있었다. 자연의 힘은 참으로 놀랍고도 신기하다. 그곳 높직한 곳에 전망대가 있었다. 당연히 전망대는 도로 변의 그저 풍광 좋은 곳이었고 돌로 쌓아올린 담벼락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설치물도 없었다. 전망대에서 자연의 오묘함에 흠뻑 취해있는데 모처럼 통역 없이 들을 수 있는 말이 들려왔다. 한국 관광객들이 차에서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들은 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가이드의 설명에 따라 사진을 잘 나온다는 포인트를 찾아 사진 찍는 일에 열중했다. 그건 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며, 여행은 돌아와 사진을 남기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