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 말도 없이 근 두 달을 쉬어버렸습니다. 핑계를 대자면 수명을 전부 싸그리 다하고 더 짜내다가 장렬히 운명하신 7.5년된 저의 노트북, 그리고 노트북 하나 배송하는데 꼬박 한달이 걸리는 외지에 살고 있는 저의 부족함입니다. 엉엉. 그럼에도 기다려 주신 여러분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세계인의 축제 브라질 월드컵이 독일의 우승으로 끝났습니다. 사실 저는 축구에 그닥 크게 관심이 없지만, 그래도 지구촌 축구 대회라는 게 참 재미있습니다. 범지구적으로 놀다니 인간들은 참 스케일도 큽니다. 22명이 모여서 서로의 골대에 공을 차는데 그 선수들이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라니 참 멋지고 또 무서운 일입니다.
그럼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쉬고, 세 박자 쉬고, 네 박자 마저 쉬고 계속 쉬어서 뒷북이지만, 이번 2014 브라질 월드컵의 주인공!은 아니고 마스코트인 플레코, 브라질리안 세띠 아르마딜로 (Brazilian Three-banded Armadillo)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까요?
1. 둥글게 둥글게
아르마딜로라고 하면 몸을 둥글게 말고 포식자들을 농락하는 재치있는 동물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하지만, 사실 현존하는 20종의 아르마딜로 중에 몸을 말 수 있는 것은 남부 세띠 아르마딜로(Southern Three-Banded Armadillo)와 브라질리언 세띠 아르마딜(Brazilian Three-Banded Armadillo)로 뿐입니다.
요로코롬 쏙!
현존하는 20종의 아르마딜로들은 모두 아메리카 대륙에서 살고 있으며 딱 한 종, 아홉띠 아르마딜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중앙/남 아메리카에 서식합니다. 아홉띠 아르마딜로에서 눈치를 채셨을지도 모르지만, “브라질리안 세띠 아르마딜로”에서 세띠는 영어나 포르투갈어로 특별한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3개의 띠를 의미합니다. (세띠가 무슨 말인지 혼란과 공포에 떨었던건 저 뿐 만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등에 겹겹이 나누어지는 겹이 몇 개인지 세는 거지요.
아홉띠 아르마딜로는 띠가 아홉 개
세띠 아르마딜로는 띠가 세 개라 세띠
두종의 세띠 아르마딜로를 제외하고 나머지 18종의 아르마딜로들은 적이 나타나도 몸을 둥글게 말 수는 없지만, 생각보다 상당히 재빠르고 굴을 잘 파기 때문에 적이 나타나면 재빠르게 도망을 가거나 굴을 파고 딱딱한 등을 내밀고 나머지 몸을 숨깁니다. 몸을 둥글게 말 수 있는 세띠 아르마딜로들도 도망가거나 땅을 파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고 느껴질 때는(보통은 대부분…) 정확하게 맞아들어가도록 진화된 꼬리와 머리를 맞대고 몸을 둥글게 맙니다.
꼬리와 머리를 맞대고 귀도 접고 손도 접고 다 접다 보니 한번 둥글게 만 아르마딜로는 주변상황 인지가 전혀 안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둥글게 말고 있는 몸 여기저기로 삐져나온 털들을 통해서 주변의 움직임을 감지합니다.
크앙
딱딱한 등껍질로 몸을 둥글게 말아 주변의 웬만한 천적들은 거의 다 포기시키는 세띠 아르마딜로지만, 턱이 엄청나게 벌어져서 몸길이 30센치미터도 안되는 아르마딜로를 한 입에 물 수 있는 재규어에게는 그닥 효율적인 방어 수단이 아닙니다.
지못미 아르마딜로찡.
2. 인간과 나누는 공통점
우리와 닮은 점이라고는 포유류라는 점 외에는 없을 것 같은 아르마딜로지만, 한 가지 정말 똑 닮은 것이 있습니다. 그닥 많지 않은 동물들이 나누는 공통점이죠, 한센병(Leprosy).
한센병은 과거에 나병이라고 불렸고 문둥병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한센병이란 한센균에 의해 전염되는 감염성질환으로 피부와 신체 전체에 나타나는 병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픈 역사를 가진 소록도로 많이 알려져 있죠. 한센병은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바와는 다르게 쉽게 전염되지도 않고 완치도 가능한 병입니다. 어쨌건 한센균은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번식합니다. 그리고 사람 몸은 다른 동물들보다 비교적 시원하지만, 장기들은 여전히 따뜻하기 때문에 한센병의 진행은 보통 온도가 낮은 피부에서 시작됩니다.
뀽
34도라는 인간의 피부와 비슷한 체온을 가지고 있는 아르마딜로는 한센병의 좋은 표적이 됩니다. 인간과는 다르게 체온자체가 낮기 때문에 한센병에 의한 장기 손상도 겪으며 죽기도 합니다. 미국의 한 지역에서는 20%의 아르마딜로가 한센병에 감염되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그리고 매년 소수의 사람들이 아르마딜로를 만지다가 한센병이 전염되었다고 추정되기도 합니다.
늬들에게 내가 한센병을 내려 주노라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아르마딜로들에게도 이 병은 진화와 함께해 온 익숙한 병이 아니라 수세기 전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들고온 병이라는 것입니다. 그 전까진 얘들도 한센병이라는 병을 모르고 살았지요.
3. 도플갱어 돋는 아홉띠 아르마딜로
독일의 미신인 도플갱어(Doppel Ganger)는 자기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뜻하죠. 그리고 세상엔 3명의 도플갱어가 있는데 서로 만나면 죽는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인데, 아홉띠 아르마딜로는 4-12 도플갱어로 태어납니다. 말하자면 한 배에서 4마리에서 12마리의 일란성 새끼들이 태어나는 것이죠. 고로 새끼들은 전부 수컷이거나 전부 암컷입니다. 이런생식을 다배현상(obligate polyembryony)이라고 합니다.
“형, 님 쫌 못 생긴듯”
“헐 셀프 디스 잼..ㅋㅋㅋ”
동물학자들은 이런 다배현상이 암컷 아홉띠 아르마딜로의 자궁에 착상할 수 있는 공간이 무척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단 하나의 착상으로 많은 새끼들을 낳기 위해 진화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4. 천산갑은?
아르마딜로하면 꼭 함께 생각나는 동물들이 있습니다. 개미핥기나 나무늘보도 생각나고, 역시 천산갑이 제일 많이 생각납니다. 천산갑(pangolin)은 아르마딜로와 뭔가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동글동글
이름부터 포스 쩌는 천산갑은 생긴 것도 포스가 쩝니다. 위협을 느끼면 몸을 동글게 마는 것이 아르마딜로를 많이 닮은 이 동물은 사실 아르마딜로와는 멀리 떨어진 친척입니다. 아르마딜로는 피갑목 천산갑은 유린목(천적들을 유린해서 유린목ㅋㅋ)입니다.
하지만, 아르마딜로와 천산갑의 차이는 생물학적 분류에서도 볼 수 있고, 아시아 vs 아메리카라는 전혀 다른 서식지에서도 볼 수 있고, 그 차이를 표로 보자면
표 덕후 인증
….네, 천산갑은 씹는 능력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개미나 흰개미 같이 후륵! 해서 먹을 수 있는 먹이를 주식으로 하고 그런 이유로 혀가 아주 깁니다.
메롱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둘의 차이는 둘의 갑옷은 보기와는 다르게 서로 아주 다르다는 것이죠. 쉽게 설명하자면 아르마딜로의 겉 갑옷은 서양 중세시대의 플레이트 아머고 천산갑의 갑옷은 찰갑 같다고나 할까요? 아르마딜로의 등은 단순히 단단한 게 아니라 뼈가 형성하고 있는 등껍질입니다. 그 위에 또 손톱과 같은 케로틴이 자리를 잡은 것이고, 천산갑의 등껍질은 뼈는 없고 케로틴 비늘만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둘다 포유류 라는 것을 고려해 봤을 때 참 신기하게 진화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5. 마스코트가 되는 것과 정글에서 살아남는 법
세상의 모든 동물들이 각자의 서식지에서 잘 생존해 나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의 생태계는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죠. 그리고 지금 초대형 거대 민폐 생명체인 인간이 영향을 안 끼치는 생물은 지구상에 별로 없겠죠. 오존층은 역대 기록급으로 뚫렸고, 사막화 진행은 생태학자들이 “ㅋㅋㅋㅋ 우리 망함.” 하는 급으로 급속화 되고 있고 지구 온난화는 “모든 생명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 다 죽어요! 끝장임!!!” 할때는 아무도 안 듣다가 “우리 경제 성장에 영향을 끼칩니다.” 하니까 급 중요사항이 된 지금 이 상황에 아르마딜로가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고 하면 말이 안되겠죠.
플레코
플레코(Fuleco)는 축구를 의미하는 포르투갈어 Futebol과 생태를 의미하는 Ecologia를 섞어 만든 이름입니다. 브라질리안 세띠 아르마딜로는 재규어한테만 탈탈 털리는 종이 아니라 다른 동물에게 더 탈탈 털리는 동물입니다. 솔직히 재규어 개체수는 별로 많지도 않아서 재규어들이 아무리 잡아 먹어도 세띠 아르마딜로가 멸종 위협을 받을 정도는 아니죠. 세띠 아르마딜로를 비롯한 다른 아르마딜로들과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의 많은 동물들을 멸종으로 위협하는 동물은 역시나 인간입니다.
급격한 서식지 파괴와 무분별한 사냥으로 브라질의 세띠 아마딜로 개체수는 급감하고 있으며, 이대로면 수십 년 내로 전부 멸종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다행인 점은 이번 월드컵을 통해 세띠 아르마딜로가 외국과 브라질 내국에도 더욱 많이 알려졌으며 브라질 환경부에서 보호를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고 합니다…만… 귀여운 생김새로 사람들이 애완용으로 키우겠다고 사냥을 시작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걱정됩니다. 길가다가 만나면 집어들고 가면 끝이니까요..ㅠ
숨어!
아르마딜로처럼 이번 브라질 월드컵도 겉과 속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겉은 단단하고 귀여워도 속으로는 한센병을 앓고 있을지도 모르고 데굴데굴 잘 굴러 간 것 같은데 알고 보니 혼자 굴러간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월드컵이 끝난 지금에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우리가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놓치고 지나간 것은 없는지 또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한 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좋은 한 주 되세요 :)
참고자료
http://en.wikipedia.org/wiki/Brazilian_three-banded_armadillo
http://www.discovery-zone.com/meet-fulenco-brazils-world-cup-mascot-2014-video/
http://www.conmebol.com/en/content/fuleco-world-cup-mascot-needs-help-avoiding-extinction
http://bioexpedition.com/nine-banded-armadillo/
http://en.wikipedia.org/wiki/Pangolin
http://www.arkive.org/brazilian-three-banded-armadillo/tolypeutes-tricinctus/
견인차
편집 : 보리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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