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교통문화 : ④ 과속이 없는 도로
다른 무엇보다 미국의 교통 문화는 참 부럽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더불어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이곳에서 지내면서 내 운전습관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어 좋았다.
나는 고속도로에만 올라가면 야릇한 해방감 같은 것을 느끼는 편이다. 그래서 슬그머니 가속 페달을 밟는 발에 힘이 얹히기 일쑤다. 앞차가 좀 느리다 싶으면 추월하는 것도 예사다. 사실은 내가 추월한 그 차는 정속으로 가고 있을 텐데도 말이다. 그저 단순한 나의 쓸데없는 호기일 뿐이다. 그런 나의 호기가 다른 운전자들에게는 매우 무례하고 불편을 주었을 수도 있을 텐데도 나는 한 번도 내 운전 습관을 돌아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나의 이런 과속에도 불구하고 내 차를 추월하는 차가 적지 않은 걸 보면 우리에겐 과속이 일상화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다 속도를 측정하는 과속단속 장비 앞에 이르면 속도를 줄여 마치 지금까지 정속으로 운전한 것처럼 눈속임을 하는 것이 우리들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순전히 내비게이션 덕분이다. 내비게이션은 본업인 길 안내뿐 아니라 과속주행이 가능하도록 돕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과속단속 카메라가 설치된 곳에 이르면 내비게이션은 사랑스런 애인보다 훨씬 부드러운 목소리로 짜증 한 번 안내고 일러준다.
“2킬로미터 전방 과속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 이후로 과속단속 장비를 다 지날 때까지 구간별로 친절하게 알려준다. 참으로 지나친 친절이다. 결국 내비게이션이 불법 과속을 조장하는 셈이 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겪어 본 미국의 고속도로를 포함한 모든 도로에서 한 번도 과속 단속 장비를 본 일이 없다. 더구나 과속하는 차들을 본 기억도 없다. 워낙 큰 나라를 여행하다 보니 한 번에 길게는 4, 5시간씩 고속도로를 운전해야 하는 일이 발생하는데 그곳에서도 모든 차량은 정속을 유지하고 있었다. 도로는 상황에 따라 속도는 45마일에서 75마일 정도로 제한되었다. 속도가 수시로 바뀌어도 운전자들은 그렇게 변한 속도에 따라 빠르게 또는 느리게 운행을 했다. 우리의 경우 고속도로 중간에 공사 구간이 있어서 속도를 늦추라는 안내가 있어도 이를 지키는 경우는 별로 없다. 속도를 줄이는 유일한 경우는 차량 소통이 원활하지 못할 때뿐이다. 길에 차량이 조금 적어져서 소통이 원활하다 싶으면 모두 고속 질주 본능이 발동한다.
미국에서는 흥미롭게도 과속단속 장비도 없고 교통경찰도 보이지 않는데도 운전자들이 과속을 스스로 삼가고 있었다.
오랜 운전으로 피곤할 법도 한데, 그리고 피곤을 달래는 방법으로 목적지까지 빨리 가고 싶을 텐데도 그들은 과속을 습관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그 역시 공익적 관점에서 그런 운전이 습관화되어 있기 때문이란다. 아들의 말로는 과속을 하면 어디서 어떻게 그리고 언제 알았는지 교통경찰 차량이 뒤를 따른다고 한다. 그것도 바로 단속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동안 뒤를 따른다고 한다. 이 경우 단속차량은 경찰순찰 차량이 아니라 일반차량과 동일한 것이어서 과속을 하는 운전자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침내 과속이 지속적으로 이루어고 있다고 판단되면 그때 비로소 차 지붕 위에 경광등을 올려놓고 요란하게 소리를 내려 운전자에게 차를 세울 것을 요구한다고 한다고 한다. 차를 세우면 그 동안의 운전에 대해 조목조목 일러주고 불법 스티커를 발부하는데 교통법규 위반은 벌금이 매우 과도하다고 한다. 그리고 운전자가 사정을 한다고 벌금이 달라지는 법도 없다고 한다. 그러니 모든 차량은 스스로 알아서 정속을 유지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인식이 일반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교통 순찰차도 일반 차량과 마찬가지의 차여서 사실 운전자들이 차량을 보고 그 차가 단속차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런 차들이 고속도로에서 일반차량처럼 주행을 하면서 도로를 상시로 살피는 것이다. 그래서 교통법규위반이 적발이 되면 그때 비로소 경광등을 차량 위에 부착을 하고 다가오는 것이다. 말하자면 보통은 운전자들의 운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도로를 달리는 모든 구간에서 속도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과속단속 장비가 설치된 곳에서만 반짝 속도를 유지하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6월 중순 어느 날. 우리 가족은 그랜드 서클을 돌아보기 위해 라스베가스에서 자이언 캐니언을 향해 가고 있을 때였다. 아들이 가는 도중 하루를 묵은 작은 도시에서 잠시 우체국을 들러 우편물을 보낼 일이 생겨서 우체국을 들렀었다. 우편물을 처리하고 다시 길을 나섰는데 우리가 가야할 방향은 지금 가는 도로의 반대편이었다. 그래서 얼마간 길을 따라 가다보니 도로 중간에 길이 끊어져 있었고 우리는 그곳에서 유턴을 했다.
유턴 과정에서 진입로 화살표가 반대편에만 있고 우리 차의 진행 방향에는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전에 도로 표지판이 이를 감지할 수 있도록 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초행자들은 실수를 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래도 거의 중앙선을 넘은 상태였으므로 우리는 유턴을 계속 진행을 했다. 완전히 차가 맞은편 도로로 들어섰을 즈음 어디서 나타났는지 교통순찰차가 경광등을 번쩍이며 우리 뒤로 다가왔다. 정차를 명령하지 않아도 알아서 갓길에 차를 주차할 수밖에. 아들은 이곳이 초행이며, 그곳에서 유턴을 하게 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경찰은 도로 교통법을 위반한 내용을 정확히 설명하고 아들에게 스티커를 발부했다. 범칙금이 무려 우리 돈으로 12만원이었다. 우리 같으면 측은지심이 발동해서 그저 적당히 무마를 하거나 스티커를 발부할 경우에도 측은지심이 계속 유지되기도 한다.
“도로 교통법 제 00조 0항을 위반했습니다. 범칙금이 5만원인데 모르고 그러셨다고 인정이 되어서 제일 싼 것으로 끊었습니다.”
교통경찰관은 운전자에게 제법 이런 말로 자비를 베푼다. 그가 왜 그런 알량한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쓸데없는 자비가 교통문화를 흐리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걸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