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키 산 정상에 서다
가끔 차로 주변까지 만년설이 가득한 곳들이 있어 그곳에 차를 세우고 만년설을 만져보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러나 산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점점 거세어서 자칫해서 몸의 중심을 잃으면 바람에 아예 날아갈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그렇게 센 바람을 이기고 그 높은 산에도 키가 작은 꽃들이 피어있었다. 이름 모를 노란 들꽃들이 산허리를 무시로 파고드는 바람을 이기고 소담스럽게 피어있었다. 그 들꽃을 지나 저만치 산허리 끝에 멋진 바위가 있었다. 그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아주 멋지게 나온단다. 그래서 그곳으로 들어가려는 데 할머니 두 분이 다가오더니 말린다. 영어를 못 알아듣는 내게 그 분들의 말을 아들이 전해주었다.
“저리로 들어가면 틀림없이 저 들꽃들을 밟거나 해서 다치게 될 거에요. 저 들꽃들은 이곳에 자리를 잡는데 100년은 걸렸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잘 보호해 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부끄럽기도 하고 한낱 들꽃을 바라보는 그 두 분 할머니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그래, 그런 것이 자연보호겠지. 거창한 이름으로 떠들기보다 모든 사람들이 들꽃 한 송이라도 귀히 여긴다면 당연히 산을 오염시키는 짓은 하지 않겠지. 그 분들이 그걸 일깨워 주었다. 그 분들로 하여금 자연 보호의 참 의미를 깨달은 기분이었다.
중간 중간에 차를 세우며 사진을 찍다보니 어느덧 정상의 마지막 휴게소에 이르렀다. 휴게소 옆에는 그곳이 해발 3540미터임을 알려주고 있는 현판이 있었다. 그곳에서 산정상이 저만치 올려다 보였고 그 정상으로 계단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계단으로 사람들이 느리게 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휴게소 건물은 마치 어린 날 동화책에서 본 듯한 멋진 목조 건물이었다. 우리는 휴게소는 기념품점과 커피점이 한 공간에 있었다. 우리는 운이 좋게도 풍광이 기가 막히게 좋은 창가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창 너머 저 아래로 로키 산이 그림처럼 내려다 보였다. 내려다보는 산허리는 군데군데 만년설이 가득했고, 휴게소 바로 아래는 마치 강원도의 한겨울 폭설이 내린 듯 보이기도 했다. 여름이라 눈이 많이 녹았을 법 한데도 두께는 2미터 정도가 되어 보이기도 했다. 한 여름에 흰 눈이라니. 그야말로 신의 조화였다. 분위기 탓인지 그곳에서 마시는 커피 맛은 일품이었다. 신선이 따로 없는 듯했다.
기념품 매장은 상당히 넓었다. 다양한 기념품들 덕분에 정상을 오르기 전 눈요기로도 그만이었다. 그래선지 사람들로 붐볐다. 한참 동안 진한 커피 향과 함께 눈요기를 실컷 하고 휴게소를 나와 정상을 향해 올랐다. 그곳에서 정상까지는 고도 60여 미터 정도였지만 산허리 경사면을 따라 오르는 길이므로 대략 500여 미터 정도 되 보였다. 마치 백두산 정상을 오를 때의 기분이 들었다. 그곳에서도 백두산 천지 코앞까지 차량으로 데려다 주었고 우리가 실제로 걸어본 백두산은 산 정상 부근의 겨우 몇 백 미터 정도였었다. 천지 못이 궁금한 탓에 그곳을 한 달음에 올라갔으나 그곳은 그저 백두산이었다. 지금 이곳은 그 백두산보다 거의 1000여 미터가 더 높은 곳이다. 그래도 처음에는 그저 산은 산이려니 하고 아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저 동네 뒷산 가듯이 천천히 올랐는데 겨우 몇 계단을 못가서 호흡이 불편해지고 약간 속이 거북해지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머리가 약간 어지러운 듯 했다.
집사람과 며느리는 속이 거북하다며 오르기를 포기하고 나와 아들 둘이서 묵언 수행하는 스님처럼 그저 묵묵히 그리고 쉬엄쉬엄 계단을 올랐다. 마침내 정상에 올라 잠시 쉬자 호흡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해발 3600미터.
이 정도 높이면 백두산은 발 아래로 내려다보일 것이고, 한라산은 발아래서 가물거리겠다 싶었다. 마치 천계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눈 아래로 만년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내 생애에 가장 높은 곳을 올랐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면 가득 온통 산들로 가득하다. 그 산 아래 골짜기 너른 곳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이 터를 잡고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 사는 세상이 내 발아래에서 가물거렸다. 저 곳은 언제나 그렇듯 온갖 영욕이 숨을 헐떡거리고 있을 것이고, 또한 온갖 영리와 술수가 판을 치고 있을 것이었다.
그 속에서 반세기도 훨씬 넘는 세월 동안 나도 함께 있었다. 지금 내려다보니 참으로 하찮은 일일 것도 같은데 사람들은 그로부터 헤어나질 못한다. 오히려 술수는 강도를 더해가고 세상은 점점 더 거칠어져가고 있는 듯하다. 세상을 내려다본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한 발 물러나 있다는 말이다. 한 발 물러나 있음으로써 세상을 보는 시야가 달라지는 모양이다. 옛적 산신령이 혹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이곳 로키 산 정상에 서 있는 지금 나는 분명 산신령일지도 모른다. 아니 산신령이다. 세상을 너르게 보는 것만으로도 그렇다. 정상은 사방에서 바람이 몰려들었다.
아들과 고도를 알리는 이정표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말하자면 인증 샷! 서로를 찍어주고 있는데 그곳을 관리하는 분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한다. 사진을 찍고 보니 나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무슨 귀순 용사처럼 무덤덤하게 서 있었다.
정상은 온통 돌투성이고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만이 가득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발아래 있었다. 우리는 산 정상에 오르면 인증 샷처럼 흔히 하는 행동이 있다. 메아리를 부른답시고 나름대로 기를 모아 쓸데없는 소리를 질러대는 그것 말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런 엉뚱한 짓은 하지 않는다. 그건 산새를 놀라게 하고 산짐승을 놀라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저 사람들은 인증 샷을 찍고는 사방을 둘러보며 나름대로 감상에 젖거나 옆 사람과 두런두런 그 감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였다. 어떤 이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산 아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처럼 사진 찍기에 어디가 좋은지를 찾아 이리저리 부산히 움직이는 것과는 천양지차였다. 그들이 그저 자연의 일부였다. 아니 그들이 바로 자연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그 동안 힘겹게 가지고 있던 온갖 번뇌가 모두 떨어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머리 위로는 따가운 햇살이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는데도 그것이 따갑기 보다는 기분 좋은 느낌이 더 강했다. 그 덕분에 여행을 마치고 온 지금까지 내 얼굴을 갓 구워낸 토스트 같다. 내려오는 길에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에 손을 담가 보았다. 분명 여름임에도 손끝이 시릴 지경이었다. 방금 그 위 만년설이 녹아내린 물인 모양이다. 그런데 물이 아주 매끄러웠다. 마치 비누칠을 한 것처럼.
멋진 하루였다. 즐거운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더니 4층은 서재며 침실 방은 그야말로 찜통이었다. 정말이지 35도의 기온을 새삼 실감했다.
밤이 되자 광풍이 몰아쳤다. 낮엔 그리도 덥더니 갑자기 왠 광풍인지 모를 일이다. 소리만 들으면 영락없는 태풍이다. 소리만큼 바람이 사나웠다. 선풍기를 끄고 창문을 살짝 열어젖혔더니 바람이 으르렁 거리며 달려들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음 날 아침엔 어제처럼 다시 하늘엔 구름 한 점이 없었고, 기온도 어제의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간밤의 그 사나운 바람은 무엇이었는가. 도무지 날씨를 종잡을 수 없었다. 그저 로키 산의 인사려니 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