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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믿음은 무조건 옳은가?
게시물ID : phil_27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철학덕후
추천 : 5
조회수 : 764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05/07 00:36:02
철학게와 종교게의 교류 제3탄입니다.

1단계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불가하다. 그것은 믿음의 문제이다."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kind=&ask_time=&search_table_name=&table=phil&no=2732&page=1&keyfield=&keyword=&mn=&nk=&ouscrap_keyword=&ouscrap_no=&s_no=2732&member_kind=

2단계는 "불가지론은 도대체 무엇을 우리에게 남겨주는가?"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kind=&ask_time=&search_table_name=&table=phil&no=2745&page=1&keyfield=&keyword=&mn=&nk=&ouscrap_keyword=&ouscrap_no=&s_no=2745&member_kind=

아, 이 글은 종교게에서 근래에 문제가 되었던 어떤 분의 주장에 대한 반박입니다.
그분의 주장이 이랬습니다.
"내가 무엇을 주장하면 그것은 무조건 옳다. 적어도 나에게는 옳다. 이는 어떤 근거나 논리로도 변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어떤 반박을 할 지라도 그것은 당신의 근거나 논리에 대한 믿음에 기인하는 문제아니냐? 그렇기에 이는 믿음과 믿음과의 대결일 뿐이다. 이럴 경우 판단을 보류하고 어느 믿음이 옳았는지를 기다리는 방법 밖에는 없을 뿐이다."(참고로 어느 믿음이 옳았는지는 영원히 밝혀질 수는 없습니다. 즉, 무조건 어떤 믿음에 대한 판단은 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 느끼기에 본능적으로 옳지 않은 주장이라고 생각되지만, 반박 불가능한 명제는 참으로 생각해야만 하니 이렇게 반박해보겠습니다.

여기에 저는 반박을 하기 위해서 헤겔과 양명학을 동원하겠지만, 저는 이 둘에 대해서 잘은 모릅니다. 동양철학에는 거의 문외한이고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아직 읽고 있는 중입니다. 다른 철학자가 그냥 커피라면 헤겔은 TOP라고 할 정도로 어려운 사상인데,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분명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도구를 사용해서 어떤 주장을 반박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고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번 써보겠습니다.

일단 이 글이 전문지식도 아니고 그저 저의 분석과 주장이라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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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과 양명학의 논쟁은 굉장히 단순합니다.
물론 제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만 그렇겠고 본래는 굉장히 어려운 부분이라고 합니다. 동양 철학은 서양 철학처럼 이성을 사용해서 각각 진, 선, 미를 추구하는 방법이 아니라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방법을 추구한다고들 하니까요.

하여간 성리학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내가 참 된 것를 얻고 싶으면 어느 대상을 궁구한 끝에 그 대상의 이치를 얻으면 된다.'
예를 들어 제가 소나무의 참 된 이치를 얻고 싶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저는 저희 집마당에 있는 소나무를 대상으로서 인식하고 그 소나무를 열심히 탐구한다면 분명 그 이치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소나무 안에 바로 소나무의 참된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리학는 직관적으로 우리에게 호소하는 바가 있습니다. 굉장히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단순화시킨 감이 없진 않으나, 어떤 대상이 궁금해서 그 대상을 보면 그 대상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있다는 이야기니까요.

이러한 성리학의 주장에 대해서 양명학은 이렇게 반박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대상의 이치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그것은 내 밖에 있는 것으로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그렇기에 참 된 것을 얻는 방법은 내 안에서 그것을 궁구하는 것이다."
이는 굉장히 신선한 주장인데요, 아까처럼 양명학의 관점으로 소나무의 참 된 이치를 얻는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렇다면 해야하는 것은 우리 집 앞마당에 있는 소나무를 보고 탐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알고 생각하고 있는 소나무에 대해서 궁구하고, 그래서 양지(이미 알고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헤겔도 양명학과 비슷합니다. 물론 헤겔이 목표로 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없는 절대지이고, 양명학이 목표로 하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있는 양지이지만 현재 논점과는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단순한 사고 실험으로 현재 나 밖에 없는 상태를 가정해봅시다. 어떠한 것도 대상화시킬 수 없는 무(無)의 바다에서 '나'라는 자아만 둥둥 떠다니고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 나는 무언가 참 된 것을 알 수 있을까요? 헤겔은 그 상태에서 알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다시 예를 들어 지금 눈 앞에 사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머릿속에는 그 사과를 표상하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제로 그 사과가 존재하는가 아닌가가 아닙니다. 머릿속에서 그 사과가 떠올랐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헤겔은 '안다'라고 표현합니다. 현실 세계에서 사과가 진짜있든 없든, 아니 현실 세계 자체가 있든 없든 상관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의 감각 기관은 신뢰할 수 없으니 무시해버려도 됩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사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 나름의 고유의 세계관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세계관이 어떤 세계관이든 그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제가 맨 위에 말했던 그 분의 말씀대로 그건 그 사람의 '믿음'이니까요.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세계관이 옳습니다. 그리고 참 된 것입니다. 이를 정(正)이라고 합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그 사람의 세계관 안에서 모순이 생겨납니다. 그것을 헤겔은 '자기모순'이라고 부릅니다. 이 모순은 나의 믿음과 다른 사람의 믿음 사이의 대결이 아닙니다. 내 믿음 안의 옳음과 또 다른 옳음 사이의 대결입니다. 이를 반(反)이라고 합시다.

그 결과 그 사람은 그 '자기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떠한 결정을 내려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은 분명 자신의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세계관 안에서 서로 배제하는 옳음이 생겨나게 되었다면 분명 그 세계관은 틀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모순을 극복하는 새로운 세계관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를 합(合)이라고 합시다. 
그리고 이 합(合)은 다시 정(正)이 되어서 또다른 반(反)을 만게 되고, 이 과정을 반복합니다. 이것이 헤겔의 변증법입니다.

한번 이 변증법을 종교적인 부분에 적용해보겠습니다. 이 글의 목적 자체가 종교적인 논점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그래서 예시를 제가 맨 위에서 말했던 그 분의 주장으로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성경무오설을 믿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글자 그대로 옳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그 세계관이 옳습니다. 성경무오설이 상식적으로 어떤 주장이든 간에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세계관은 자기 머릿속에서 완결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증법으로 여기서 성경무오설은 정(正)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문제가 생깁니다. 그 사람이 어떤 씨앗을 보았습니다.(정확히 말하자면 그 씨앗을 자기 머릿속에서 표상했습니다.) 그런데 그 씨앗은 겨자씨보다 작습니다. 이것은 매우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충격과 공포이지요.
분명 성경의 마태복음 13장 31-32절에 보면 겨자씨를 보고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눈 앞에 겨자씨보다도 작은 씨앗이 눈에 띈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하지만 자신의 믿음과 남의 믿음 사이의 대결이 아닙니다. 바로 자기 머릿속에서 옳다고 판단해야 되는 두가지의 충돌입니다. 변증법으로 이것은 반(反)입니다.

결국 그 사람은 선택을 하여야 합니다. 성경무오설을 부정하거나 자신이 본 씨앗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하지만 둘 다 이미 그의 세계관에서는 옳은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은 자신의 세계관을 바꿉니다. 성경의 말씀은 글자 그대로 옳다. 그러나 비유적인 표현은 있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요.
이렇게 바로 합(合)이 탄생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 사람은 수많은 반(反)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다르다는 사실일 수도 있고, 태양이 아니라 실은 지구가 돌고 있다는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새로운 정반합을 만들어내며 점점 절대지, 진정한 앎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이를 칸트는 혼의 도정, 고난의 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매우 고통스럽겠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나아감으로서 진리를 알게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머리속에서 자기 모순이 나타났는데도 가만히 있는다면, 그 사람은 틀린겁니다. 그의 세계관은 모순덩어리의 거짓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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