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리 빌딩 마켓 플레이스와 링컨 공원
다음으로 찾은 곳은 패리 빌딩의 마켓 플레이스였다. 마켓 안은 우리의 마켓 그리고 재래시장을 합쳐 놓은 것 같았다. 더러는 풍물 시장 같은 느낌도 들었다 패리 빌딩은 샌프란시스코 항구와 인접해 있었는데 마켓 주변은 자그마한 공원이 있었고, 그곳 에는 강렬한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우리는 마켓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눈 호사를 하였다 그러다가 배가 출출해지자 먹거리를 손에 들었고 먹는 동안에는 기념품이건 주방용품이건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저 눈요기뿐이었다, 가격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켓은 별 특별한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자들이 시간을 보내기는 더 없이 좋아보였다. 집사람과 며느리가 눈요기를 하는 동안 나는 사진이라도 찍을 요량으로 바깥으로 나와 항구 주변을 살폈다. 마켓 뒤쪽 작은 광장에서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아 한가롭게 쉬고 있는데 그 광장 한 가운데 독특한 모양의 동상이 눈에 띄었다. 멀리서 보아도 동상은 왜소해서 위엄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동상의 주인공은 인도의 간디였다. 왜 여기에 간디의 동상이 있을까?
그가 이곳 샌프란시스코를 왔을까? 동상에 대한 궁금증은 전날 전망대 앞에서 본 콜럼부스 동상과 같았다. 우리는 동상에 참 인색하다. 동상 하나를 만드는데도 이념이 앞서고 정권의 눈치를 본다. 박정희 동상은 그를 본래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정권을 잡은 후로 흐지부지 되었다. 일전에는 인천 자유공원에 세워진 맥아더 장군 동상이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동상은 이미 소련의 레닌 동상 꼴이 났다. 어디 그 뿐인가? 동상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도 수난을 당한다. 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단군상이 그 대표적이다. 이런 모든 것은 상식과 동떨어진 적의(敵意)에서 비롯된 것이다. 적의는 수도 없다. 과거의 모든 것은 다시 보아야 하고, 사람들의 감정선을 보아가며 적의는 기세를 떨친다. 감정은 합리와는 다른 세계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합리에 우선한다. 제주 사태로 한바탕 시끄럽더니 요즈음은 유관순의 서훈 등급 때문에 또 시끄럽다.
서훈 등급을 부여하는 일은 등급을 판단하는 기준에 근거한 것일 테다. 그러나 적의로 가득한 이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왜 그가 3등급이어야 하며, 과연 그게 그에 대한 합당한 대우인가 하는 것이 적의의 핵심이다. 적의에는 논리 따위는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더러 친일을 했다고 들통이 난 자들도 그보다 높은 등급을 받았는데 과연 합당한가라고 그들은 목소리를 높인다. 그 말만 들으면 그럴 듯하다. 모두가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큰 것 같고, 나라를 위해 충언을 하는 것도 같다. 물론 어떤 이들은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럴 듯함. 그게 적의가 힘을 발휘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적의는 힘을 한쪽으로 기울게 하는데 매우 유효하다. 그러므로 적의가 들불처럼 번져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 끝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다음 대통령 선거까지는 그럴 것이다. 적의의 극점이 촛불이었고, 그 동안은 여전히 그 적의가 힘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켓을 나와 바닷가를 조금 걸어 내려가니 작은 공원이 나타났다. 공원은 거대한 모양의 설치물을 제외하면 공원이라 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공원 이름이 링컨이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이름을 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낯선 이방인의 시선에서 보면 그 이름에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어린 시절 위인전으로 마주한 링컨이라는 이름은 모든 것에 대한 공평함과 선으로 각인되어 있다. 인종의 차별을 없앤 대통령. 차별을 없앴다는 것은 서로 다름을 인정했다는 말이다. 인권을 입으로 떠들기보다 몸으로 실천했다는데 그의 위대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적의라는 엄청난 힘이 그 모든 것을 짓누르고 있다. 그러는 동안 적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차별을 만들어내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이 정의로운 것이라고 착각한다.
링컨 공원에서 그늘을 찾아 앉아 쉬고 있는데 사람들이 줄을 지어 우리 앞을 지났다. 그들을 행색으로 보아 아마도 야구 경기가 끝난 모양이었다. 선수들의 상의를 입은 사람들, 야구 글러브, 야구 공 등을 들고 오는 사람들이 표정도 없이 내 앞을이 지났다. 아마도 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야구경기장이 있는 모양이었다.
샌프란시스코를 근거지로 한 야구팀이 있었던가? 나는 특별한 야구광은 아니다. 다만 텔레비전에서 미국 프로야구를 중계를 할 때 대체로 우리나라 선수가 뛰는 팀을 중심으로 가끔씩 보는 편이다.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팀은 생소하다. 검색을 해보니 샌프란시스코에 근거지를 둔 팀은 자이언트였다. 마침 오늘 자이언트가 필라델피아를 상대로 6:1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승전보가 올라와 있다. 그러면 승리에 취한 관중들이 아주 즐거워할 법한데 지금 내 앞을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자기가 응원한 팀의 승전를 읽어낼 수 없었다. 그저 그들은 묵묵히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이미 경기는 끝났고 우리는 또 다른 일을 위해 집으로 간다는 그 당연한 일을 위해 지난 일에 흥분할 필요가 없다는 말인 모양이었다. 어떻게 이리도 태연할 수 있는지 참 맥이 빠진다. 우리 같으면 경기를 이긴 날은 경기장 앞의 포장마차가 북적인다. 물론 지는 날도 기분 나쁘다고 포장마차로 몰려드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너무도 태연해 보여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이 사회에서 섬뜩한 전율이 느껴진다.
공원 위로 샌프란시스코 만을 가로지르는 대교에는 차량들이 쉴 사이 없이 오가고 있었다. 아침에 우리들이 건너온 그 대교다. 내일은 먼 거리에 있는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갈 요량이므로 오늘은 일찍 하루를 마감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