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페미니즘(Feminism for everybody: Passionate politics, 2000)》
벨 훅스(Gloria Jean Watkins, bell hooks) 지음, 박정애 옮김, 큰나, 2005
안녕하세요. 시험안끝났다 입니다.
최근에 나름 열풍(?)인 페미니즘, 이 페미니즘을 이해하고 싶어서 읽은 책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열풍의 주역(?) 이었던 소위 '메갈리아 사태'에 대한 이해도 할 수 있는 책입니다.
책의 내용을 몇 부분 발췌하였습니다. 한 번 읽어보시고 과연 페미니즘이란 무엇일까 함께 고민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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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가부장제로부터, 그들이 여자보다 우월하고 그러므로 여자를 지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가부장제의 전제로부터 최고의 이득을 취한다. 그러나 그러한 이득에는 대가가 있는 법이다. 가부장제로부터 남자가 얻는 모든 혜택에 대한 보답으로써 그들은 가부장제를 불가침의 것으로 지켜 내야 하고, 그러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폭력을 사용하여 여자를 지배하고 착취, 억압해야만 한다. 대부분의 남자는 가부장 되기가 힘든 일임을 알게 된다. 대부분의 남자는 여자들의 증오와 공포, 여자에 대한 남자의 폭력에 의해 동요한다. – 10쪽
간단히 말해,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이다. (...) 나는 이 명제가 남성을 적으로 상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좋았다. 문제가 성차별주의임을 적시함으로써 이 명제는 문제의 핵심에 곧바로 진입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명제는 성차별주의가 몸에 밴 사람이 여자인가 남자인가 어린애인가 어른인가에 상관없이 그 모든 성차별적 사고와 행동이 문제라는 점을 꼬집는다. 이것은 또한 성차별주의가 구조적으로 제도화된 문제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 19쪽
사람들은 대개 페미니즘이 오로지 남자들과 동등해지려는 여자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람들 대부분은 또한 페미니즘이 반(反)남성주의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 정치학에 대한 이러한 오해는, 이 사람들이 가부장적 매스미디어를 통하여 페미니즘을 배운다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 19쪽~20쪽
남성 지배에 대해 분노로 항거했던 초기 페미니스트 운동가들 사이에는 사실 반남성주의 정서가 상당했다. 여성 해방 운동을 불러일으킨 동력은 불의에 대하여 타오르는 분노의 감정이었다. 남성 지배의 본성에 대한 초기 페미니스트들(대부분 백인)의 의식은, 세상에 대하여는 자유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도 내부의 여자들은 여전히 종속적 존재로 취급하던 남자들과 함께 계급 철폐, 인종 차별 철폐 투쟁을 하면서 상승하였다. – 21쪽
현대의 페미니즘이 점차 진보하고 여성들이 우리 사회에서 성차별적 사고와 행동을 지지하는 집단이 남성만이 아니라는 사실, 여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성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반남성주의 정서는 더 이상 페미니즘 운동의 의식을 규정하지 않게 되었다. 초점은 젠더(gender)의 정의를 창출하기 위한 총력 투쟁으로 옮겨 갔다. – 21쪽~22쪽
개혁주의 페미니즘은 계급 이동을 위한 루트가 되었다. 그들은 일터에서 남성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자기들의 삶에 대한 자결권을 보다 많이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성차별주의는 종식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현존 체제 하에서 그들의 자유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하고 싶지 않은 지저분한 일들을 해줄, 착취당하고 종속되어 있는 하층 계급의 존재에 기댈 수 있었다. – 25~26쪽
현대 페미니즘 운동 초기의 의식화 그룹들은 종종 개입과 변혁의 전략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저 자기가 희생되는 것에 대한 울분과 적의를 풀어놓는 장소가 되었다. 상처 입고 착취당한 수많은 여성들이 의식화 그룹을 기본적 수준에서의 치료의 장으로 활용했다. 그곳은 여자들이 자기들의 내밀한 상처의 깊이를 발견하고 그것을 공개하는 장소였다. 이러한 고백 행위는 치유의 제의로 기능했다. 의식화 그룹을 통하여 여성들은 일터와 집에서 가부장제 권력에 도전할 힘을 얻었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작업이 우리 자신의 성차별주의적 사고 방식에 대하여 성찰함으로써 페미니스트적 사고로의 전환을 이끌어 내고 우리의 태도와 신념을 변혁시킴으로써 페미니스트 정치학에의 투신을 이끌어 내는 정략 창출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 31~32쪽
페미니즘 강좌의 제도화는 학계와 출판계 양쪽에서 하나의 직업군을 창출했다. 페미니즘의 이러한 직업화는, 한 번도 대중적 페미니즘 투쟁에 정치적으로 투신한 적이 없으면서 페미니즘이 자신의 계급 이동을 추동할 때는 페미니즘의 자리와 수사학을 채택하는 여자들에게 직업적 기회주의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 36쪽
여성을 보상 가능한 ‘피해자’로 설정하는 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의 내면화 된 성차별주의와 우선적으로 맞닥뜨려야 한다는 생각은 시의성을 잃어버렸다. 모든 연령대의 여자들이 마치 남성 지배에 관심이 있거나 분노하는 것처럼 행동했고, 성별 사이의 평등이야말로 페미니스트가 되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이었다. 자기 내면의 성차별주의와 직면하지 않은 채 페미니스트의 깃발을 치켜든 여자들은 종종 다른 여자들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페미니즘의 대의를 배신했다. – 36쪽~37쪽
남자들을 페미니즘적으로 의식화시키는 것도 혁명 운동에서는 여자들의 그룹만큼이나 필수적이다. 성차별주의가 어떤 것이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 바뀔 수 있는지 소년들과 남자들을 의식화하는 남성 CR(의식화, consciousness-raising의 약자) 그룹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했더라면 매스미디어가 페미니즘 운동을 반남성주의로 묘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38쪽
어떤 개인 여성이 억압받는 계급의 여성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권력을 포기하여 들지 않을 때에 인종과 계급의 경계를 넘은 자매애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여성들이 다른 여성들을 지배하기 위하여 계급 혹은 인종적 권력을 행사라고 있는 한, 페미니스트의 자매애는 결코 온전히 실현될 수 없다. – 47쪽
여성 해방 운동이 있기 전 늙었거나 젊었거나 모든 여자들은 성차별주의적으로 사회화되어 자신의 가치가 오로지 외모에 있고 특히 남자들에 의해 괜찮아 보인다고 인정받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여자들이 건강한 자부심과 자기애를 진작시키지 않는다면 결코 해방되지 못할 거라는 걸 이해하면서 페미니스트 사상가들은 문제의 핵심 – 우리가 우리의 몸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변화를 위한 건설적인 전략을 제공하는 것 – 으로 곧장 돌입했다. – 79쪽
계급 권력을 가진 여성들이 기회주의적으로 페미니스트 정강(政綱)을 이용하는 것은, 페미니스트 정치학을 훼손시켜 궁극적으로는 그들 자신을 다시금 종속시킬 가부장체제를 공고화하는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페미니즘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배신하고 있는 것이다. 계급 논의로 돌아가자면, 페미니스트 여성과 남성은 연대에 필요한 조건들을 복구시켜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계급에 구애받음 없이 모두가 자원을 공유하고 모든 사람이 충분히 개인적 성장의 기회를 가지는 그런 세상에 대한 비전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 102쪽
여자에 대한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한 페미니스트의 지속적인 투쟁이 모든 종류의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한 운동의 일부라는 생각은 무척 중요하다. 지금까지 페미니즘 운동은 기본적으로 남성의 폭력에 초점을 맞추어 왔는데 그 결과 남자들은 폭력적이고 여자들은 그렇지 않다, 남자들은 가해자이고 여자들은 희생자이다라는 성차별적인 스테레오 타이프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켰다. 이런 종류의 생각은, 이 사회의 상당수 여성들이(남자들과 함께) 지배적인 무리 혹은 그룹이 피지배자들을 강제력으로써 억누르는 것은 당연하다는 사고를 받아들이고 영구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게 만든다. 이런 생각은 상당수 여성들이 타인에 대하여 강압적 권위를 행사하며 폭력을 사용한다는 사실 또한 무시하게 만든다. 여자들이 남자들만큼 자주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가지고 여성 폭력의 현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폭력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폭력 사용을 지지하는 집단으로서 이 사회의 남성과 여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 143쪽
운동이 진전되고 페미니즘 사상이 발전하면서, 의식 있는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은 남성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문제는 가부장제이고 성차별주의이며 남성 지배 구조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문제가 단순히 남성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훨씬 복잡한 이론화 작업을 요구했다. 그것은 가부장제를 유지하고 영구화하는 데에 여자들이 맡고 있는 역할을 인정할 것을 동시에 요구했다. – 151쪽
페미니즘 운동 내부의 반남성주의 분파는 반성차별주의자 남성들의 존재에 분개했는데, 그것은 그들의 존재가 모든 남자들은 억압자라는 것, 모든 남자들은 여자를 혐오한다는 가설을 더 이상 고집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억압자와 피억압자라는 간명한 범주에 집어넣음으로써 남성과 여성을 양극화하는 것은, 계급 상승과 가부장제 권력의 공유를 추구하는 페미니스트 여성의 이익에는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모든 여성을 희생자로 재현하기 위하여 모든 남성을 적으로 명명했다. 남성에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들은 자기들의 계급 권력을 신장시키고자 하는 욕망과 함께 개별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의 계급 권력에 대하여 주목하지 못하게 했다. 모든 여성들에게 남성을 거부하라고 요구하는 이러한 개별 활동가들은, 여성이 남성과 공유하는 돌봄의 유대라든가 성차별주의자 남성과 여성을 묶고 있는 경제적∙정서적 결속(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을 보려 하지 않는다. – 153~154쪽
가부장제 문화 속에서의 사랑은 소유 개념과 지배∙복종의 패러다임에 연결되어 있는데, 그 안에서는 한 사람은 일방적으로 사랑을 주고 다른 사람은 받게 되어 있다고 설정된다. 가부장제 아래에서의 이성애 중심적∙성차별주의적 결합은, 돌봄의 정서를 가진 젠더인 여성이 남성에게 사랑을 주고 권력과 정복에 연연하는 정서를 가진 남성은 여성을 부양하고 보호해 준다는 기본 전제 하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 221쪽
돌이켜보건대 사랑에 관한, 특히 이성애와 관련하여 긍정적인 페미니스트 담론을 생산하지 못함으로써 우리가 주류 매스미디어에 페미니즘 운동을 사랑보다는 증오에 기반한 정견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빌미를 주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남자들과 사랑으로 결합하고 싶어하던 많은 여성들은 그러한 관계를 발전시키면서 동시에 페미니즘 운동에 헌신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우리는 페미니즘이야말로 여성과 남성으로 하여금 사랑을 알게 해준다는 생각을 널리 퍼뜨려야 했다. – 224쪽
초창기부터 페미니즘 운동은 가부장제 종교 비판에 뛰어듦으로써 아주 근본적인 충격을 주었고 온 나라에서 종교적 숭배의 본질을 변화시켰다. 다시 말해 페미니즘은 서구 형이상학의 이원론(세계는 언제나 두 개의 범주, 이를테면 우∙열, 선∙악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가설)이 성차별주의적 기반이 되고, 그런 사고가 유태 – 기독교 신앙 체제의 근본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던 것이다. – 230쪽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성차별적 지배와 억압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운동이며 젠더 차별을 종식시키고 평등을 창출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들을 끌어안는 투쟁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급진적인 운동이다.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모든 방면에서 성차별주의에 도전한다는 대전제에서 자꾸만 물러서고 개혁에만 초점을 맞출 때 페미니즘 고유의 급진성에는 혼란이 발생한다. 수많은 ‘페미니즘들’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파워 페미니스트’라는 용어를 사용한 최초의 집단이자 특권적 계급 권력을 추구한 보수파와 자유주의자 여성들의 정치적 이해(利害)에 봉사했다. – 245쪽
기생적(寄生的)인 계급 관계, 부와 권력에 대한 탐욕은 여성들이 빈민, 노동 계급 여성의 이해를 배신하게 만들었다. 한때는 페미니즘 사상과 동반했던 여성들이 지금은 반(反)복지(anti-welfare) 공공 정책을 지지한다. 그들은 자신의 입지에서 어떤 모순점도 보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에 단순히 페미니즘이라는 ‘브랜드’를 달았을 뿐이다. 페미니즘이 라이프 스타일이나 상품으로 재현되는 현상은 자동적으로 페미니스트 정치학의 중요성을 훼손한다. – 246쪽
출처 | http://blog.naver.com/mlnookang/22090091059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