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extoo에게 매천야록 원본을 선물합니다
게시물ID : history_268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흐르는은하
추천 : 0/4
조회수 : 836회
댓글수 : 32개
등록시간 : 2016/09/16 12:22:31
옵션
  • 창작글
매천야록 원본은 구레 매천사에 맡겨두었습니다
그러니 매천야록 원본이 없다는 주장은 취소해 주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상식을 저멀리 던져버린 황당한 주장들에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수 없었지만
댓글을 다시 한번 읽어보니 왜 그런 주장들이 나온건지 어는 정도 이해가 되기 시작했음
 
[1910년 이전에는 민비란 단어가 없었다 민비란 단어는 일본이 조선을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 낸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주어진 교리나 규범인 것이지 어떤 논리적 사고의 결과물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교리때문에 당대에 민비에게 할 말이 많았을 민중들을 다 벙어리로 만들어 버리고
당대 지식인들의 저술은 모두 1910년 한일합방후 일제에 의해 민비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이후의 것으로 넘겨버린다
 
일제의 강점에 분노하여 자결한 황헌같은 지사나,
의병으로 항쟁한 윤희순의사같은 분들이 일제가 조선을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낸
민비라는 단어를 차용해 쓰면서 일본의 조선 비하에 앞장섰다는것은
보통 상식인들로서는 상상할수 없는 것이지만  신앙이란 본래 그런것이다 
(두분다 일본에대한 정식 호칭은 왜놈이었음)
 
위의 교리가  준수된 결과
[매천 야록은 1920년 경술국치 10년 뒤의 기록이므로 1910년 이후의 사료이다]
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이 나온다
1895년에 작성된 윤희순의사의 격문은 1936년에 나온 해성 일성록(회고록)에 수렴되어 버리고
민비 당대에 저술한 중암집은 1912년에 나온 중암별집에 수렴되어 버린다
윤희순의사의 격문과 해성 일성록, 중암집과 중암별집이  다른것이란 사실은 무시되어 버린다
의병 활동때 백성들을 선동하는 격문이 쓰여지고 이후 격문들을 모아 의병가사집이 나오고
말년에 해성 일성록(회고록)이 나온 시간적 순서를 전혀 무시해버린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것인지 명성황후파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법률 용어를 빌려와 보자
 
1.문서의 진정 성립
 
원본-작성자가 최초로 작성한 서류
정본-원본의 복사본으로 공증권한이 있는 공무원이 원본과 동일하다는 인증을 한 서류
등본-원본을 복사한 서류
원본과 정본은 증거력이 있지만 등본은 증거력이 없다
사료에 적용하면 원본과 정본은 사료로 채택할수있지만 등본은 사료로 채택할수없다
 
매천야록은 원본 정본 필사본 세가지 모두 있다
황헌이 자필로 기술한 최초의 매천야록이 원본이고 황헌을 배향한 매천사 유물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필사본을 원본과 대조하여 한국사료총서 1집으로 발간한것이 정본이다
(공적으로 검증할 권한이 있는 기관이 필사본을 원본과 대조하여 동일성을 검증한것이니 그필사본이 정본인것이다
우리가 사료로 읽고있는것이 정본에 기초한것이다)
그리고 후손의 필사본이 등본이다(extoo가 1920년 나온것이라하는...이건 사료 가치가 없으니 부정해도되고 extoo가 부정하고 있다)
 
윤희순의사의 자필 격문의 원본은 그녀의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을것이고
국가 보훈처에서 윤희순의사의 의병 활동과 격문 살포를 검증하여 건국훈장으로 보훈하였으니 격문의 진정 성립은 인정된것이다
(증거력이 있고 사료로 채택할수있다)
 
문서의 진정 성립이 인정되면 내용에 대해서는 이른바 교차 검증이 필요하지만
민비로 호칭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교차검증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면 [민비는 조선인에게는 죽음을 내리고 외국인에게는 막대한 하사금을 내리곤했다
그래서 조선인은 민비를 저주하고 외국인은 민비를 찬탄했다]라는 사료가 있다면 민비가 ....했다는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검증이 필요하지만
문서 자체의 진정성립이 인정되면 그문서가 민비로 호칭하고 있는 사실은 증명되는것이다
해석으로 문자를 바꿀수는 없다
해석은 문자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것이지 해석의 한계를 넘어 다른 문자로 대체한다면 그건 해석이 아니라 새로운 창작인것이다
 
2.문서의 성립시기
 
사료의 진정 성립이 인정되면 그사료는 그것이 쓰여진 시기의 사료이다
매천야록은 그것이 최초로 쓰여진 1864-1910년의 사료이지 필사본이 세상에 나온 1920년(extoo가 주장하는)의 사료가 아니다
매천야록을 가내에 소장만하다가 오늘 세상에 공개했다하드라도 매천야록은 그것이 쓰여진 시기의 사료이지 2016년의 사료가 아니다
합무라비 법전은 1901년 발굴되어 세상에 나왔지만 1901년의 사료가 아니라 그것이 쓰여진 고대사의 사료이다
광개토대왕비도 근대에 발견되었지만 그비석의 물리적연도를 측정하여 고구려때의 것으로 검증되었다면
발견된 근대 사료가 아니라 그것이 쓰여진 고대사 사료이다
한단고기도 고대사를 기술하고 있지만 그것이 구한말에 쓰여진것이라면 구한말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사료일뿐이다
구한말 당시의 지구를 다 차지하고픈 민족의식의 과잉을 엿볼수있는 사료로서 그시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민족,인종주의에
기반한 제국의 팽창주의가 시대의 조류였으니까
 
결론은 민비 당대에, 1910년 일제 강점기 이전에 그시대를 산 지식인들의 저술에 민비라는 호칭이 나오다는 것이고
이를 기초로 저술을 남기지 않은 당대의 지식인들도 민비로 호칭하였을것이라는게 합리적이고
그아래의 민중들도 민비에 대해서 벙어리가 아니었을 것이니 민비 민씨 민자영 중전 등으로 호칭하였을것이라고
생각하는것이 합리적이란 것이다
그리고 민비같이 한 몸을 오직 외세에 의탁해 전전한 인물을 미화해서 누가 이익을 볼것인가?
이익을 보는건 외세이고 피해를 보는것은 민족의 자주정신이라는 것이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