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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역사의 대패배 용인전투
게시물ID : history_380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첫번째불꽃
추천 : 2
조회수 : 188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2/03/19 21:47:29
 용인 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1592년 음력 6월 5일 경기도 용인에서 이광과 윤선각 등이 이끄는 5만 명의 남도근왕군(南道勤王軍)이 겨우 1600명의 일본군에게 크게 패한 전투이다.
음력 4월 28일 조선의 맹장 신립이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크게 패하자 전라감사 이광과 전라도 방어사 곽영,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 경상도 순찰사 김수 등이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모은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이광을 맹주로 삼은 뒤 남도근왕군이라 칭했다.
음력 6월 4일에 최초의 전투를 치렀는데 김수가 홀로 경상도의 장사 50명에게 돌격 명령을 내리고 유곡 찰방 김충민이 적 1명을 베고 봉사 정기룡과 강만남과 군수 김경로 등이 각각 하나씩 베었고 동향인 박태고가 왜군 2명을 쏘아 죽이는 등 초기에 5명의 적을 죽여 전과를 올렸다.
음력 4월 28일 조선의 맹장 신립이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크게 패하자 전라감사 이광과 전라도 방어사 곽영,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 경상도 순찰사 김수 등이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모은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이광을 맹주로 삼은 뒤 남도근왕군이라 칭했다.
음력 6월 4일에 최초의 전투를 치렀는데 김수가 홀로 경상도의 장사 50명에게 돌격 명령을 내리고 유곡 찰방 김충민이 적 1명을 베고 봉사 정기룡과 강만남과 군수 김경로 등이 각각 하나씩 베었고 동향인 박태고가 왜군 2명을 쏘아 죽이는 등 초기에 5명의 적을 죽여 전과를 올렸다.
결국 조선군 5만 명은 겨우 1600명의 왜군에게 대패를 당했고 오직 광주 목사 권율만이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고 그 군사로 후에 이치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광은 책임을 지고 파직되어 유배되었고 이 전투에서 승리한 왜장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명장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또한 황진만이 자신의 부대를 온전히 유지한채 퇴각하게 되었다.
유성룡은 이 전투에 대하여 《징비록》을 통하여 '흡사 봄놀이 같았더라' 라고 힐평하였다.

4월 28일 
- 신립의 패전 소식을 전해 들음
- 2천명의 근왕병을 일으키고 상경

5월 5일
- 안음(安陰)에 도착

5월 6일
- 함양(咸陽)을 지나 운봉(雲峯)에 도착

5월 7일
- 남원(南原)으로 가려하는데 초유사 김성일이 "전라감사가 군대를 이끌고 공주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라는 말을 전해들음
- 임금의 파천 소식을 전해 들음
- 김성일의 권유로 김수는 도내의 적을 없애고 다시 근왕병을 일으키기로 결정

5월 8일
- 함양으로 되돌아 왔다가 점심 후에 안음으로 가서 비 때문에 6일을 보냄

5월 14일
- 함양으로 다시 돌아와 하루를 보냄.
- 전라감사의 전통(傳通 - 승정원에서 내린 임금의 명령)에 의하면 경상우도와 함께 병력을 일으키라 하고 있음
- "겨우 장사(將士) 100여명만 거느리고 근왕"한다는 기록

5월 16일
- 김수가 도사와 같이 도내의 적을 물리치고자 방어사 조경(趙儆), 조방장 양사준(梁思俊)과 관군 70여인 및 종사관 이조좌랑 이수광(李晬光)과 수찬修撰 신식(申湜)을 거느리고 운봉비전碑殿에 다다름
- 전주에서 돌아온 同僚 정종함(鄭終涵)이 조정의 소식을 전함(이산해, 류성룡, 윤두수 등등의 인사이동)
- 저녁에 남원에 도착함
- 병사 최원(崔遠)이 주둔하고 있음

5월 17일
- 계수역(契樹驛)에서 말에게 여물을 먹이고 쉬다가 임실현(任實縣)에 도착

5월 18일
- 전주 근처 신원(新院)에서 휴식하고 전주에 도착
- 순찰사 이광(李洸)이 주둔하고 있으나 성문이 굳게 닫혀서 북정(北亭)에 이르니 이광이 김수를 찾아옴
- 김수가 별관別館으로 들어가자 일행 중 인마가 점점 도망하여 흩어짐. 수령과 군관들도 스스로 말을 끌고 몰아야 함. 
- 경상감사도 자기의 식량을 가지고 말 안장도 스스로 얹어야 하고 일행 상하가 모두 제 양식을 지고 다녀야 하니 행로가 매우 어려워짐

5월 19일
- 큰 비가 내려 전주에 머무름
- 전라감사 이광이 부하장병을 이끌고 먼저 출발
- 남원과 장수(長水) 군대 2천여명은 배반하여 흩어짐
- 그에따라 경상도의 선문(先文 - 지방에 출장할 벼슬아치의 도착할 날짜를 그곳에 미리 통지하던 공문)도 반졸들에게 빼앗김

※ 전라감사가 품계에서 밀려서 그러는지, 아니면 조선군 편제상의 위치 때문인지는 모르나(이쪽은 확인 안해봤음) 전라감사의 부대가 먼저 출발하고, 경상감사의 부대가 뒤따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충청도군의 합류 이후에는 충청도군이 가장 마지막에 옵니다.

5월 20일
- 진전(眞殿 : 선원전의 별칭. 역대 임금의 초상을 봉안한 곳. 서울과 전주에 있음)에 도착
- 5리쯤 더 가니 함양倅(해당 지역의 수령?) 김락(金洛)이 병량을 운송하여 뒤따름
- 밤이 되도록 진흙길을 오느라 전신이 진흙투성이가 됨
- 삼례參禮역(전북 완주군 삼례읍에 있던 역)에 도착하여 쉬고 황혼 무렵 익산군에 도착
- 적군에게 가까이 가서인지 馬卒들이 거의 반이나 도망쳐 행차의 모양은 작은 고을의 행차와 같고, 행장(行裝)의 운반이 더욱 어려워짐.

5월 21일
- 큰 비가 옴.
- 용안龍安현에 도착하니 이 고을 서리胥吏 여러 사람이 대접해 줌.
- "10리쯤 더 가다 보니 호남과 호서 사이에 청포나루(菁浦津, 금강 가에 있는 나루)이 있는데 잔교棧橋를 놓아 육지 같이 되어서 통행하는 선박이 무려 300여척이나 된다하니 장관이다"라는 말이 있음
- 임천林川군(충남 부여군에 있던 지명. 1914년 부여군에 통합)에 도착하니 호남사상(전라감사)이 먼저 주둔하고 있음.
- 두 감사가 같은 방에서 잠.
- 그러나 경상감사 김수가 자헌대부(정2품 하계)이고 전라감사가 가선대부(종2품 하계)인지라 김수 소속 관리들은 상방을 차지함-_- 역시 계급이 깡패.

5월 22일
- 전라 감사가 먼저 정산(定山, 청양군 정산면에 있는 산)을 향해 출발, 경상 감사 일행이 뒤따라감.
- 부여 땅 은산銀山역에서 다시 만나 점심을 먹음.
- 어둠을 뚫고 정산현에 도착했고, 밤사이 폭우 때문에 부득불 자게 됨.

5월 23일
- 본도(경상도)에 전령을 보내려 하는데 가지고 갈 사람이 없음. 동료 이가를 돌려보내기로 함.
- 아침에 내린 비 때문인지 늦게야 떠남.
- 호남 순찰사(전라 감사)가 먼저 출발하였으나 얼마 가지 못하여 날이 저물었음.

5월 24일
- 김수가 사잇길로 공주 땅 유구維鳩역(충청도 성환도의 한 역)에 먼저 도착, 전라감사가 군대를 이끌고 도착하여 점심을 먹음.
- 김수가 먼저 온양溫陽군에 도착하니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尹先覺), 방어사 이옥(李沃), 병사 신익(申翼) 등과 그들의 부대와 만남
- 세 감사가 한 방에서 잠.

5월 25일
- 큰 비가 내려 온양에서 떠나지 못함.

5월 26일
- 전라 감사 먼저 출발. 경상 감사 출발.
- 10리쯤 갔는데 호남병이 앞에 막혀 갈 수 없어 부득이 말에서 내려 쉼.
- 산길로 해서 밤 2경에 아산 요로원(牙山 要路院)에 도착
- (두 사상이 같이 잤다는 기록을 보아서 충청도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

5월 27일
- 장계를 두 감사가 같이 봉하여 올림
- 직산稷山(충남 천안군 직산면에 있는 산)에 도착하여 산에서 말을 먹이고 점심을 먹음
- 전라감사는 수헐원愁歇院에서 주둔하여 감사들은 자주 만나게 되고 경기도 양성(陽城)의 성초평(省初坪) 산 위에서 결진結陳함(호남 사상은 조금 늦게야 한 곳에 모여 결진함)
- "끝없이 넓은 들에서 멀리 군대의 형편을 살펴보니 전후 80여리에 연이어 일대장관이라 할 만하다"
- 밤 새도록 비는 퍼붓듯이 내렸음. 저녁밥도 먹지 못하고 밤을 지새움

5월 28일
- 비가 줄기차게 내림. 흙탕물에 빠져서 행군이 매우 곤란.
- 호남 병마가 앞길에 꽉 차 있기에 할 수 없이 갈원(葛院)쪽으로 길을 잡아 잠시 휴식.
- 군관 최몽성(崔夢聖)과 이회(李晦)가 본도에서 뒤따라 여기에 왔음.
- 간신히 진위振威현(경기도 평택군에 있는 땅이름)에 이르니 전라 감사와 방어사 곽영(郭嶸)이 먼저 도착하여 있었음

5월 29일
- 큰 비로 진위현에서 묵음.
- 먼저 수원(水原)에 웅거하는 적을 없앤 다음에 도성에 있는 적을 정벌할 작정으로 제장들이 종일 의논함.

6월 1일
- 또 진위현에서 묵음. 그 이유는 휴병양사休兵養士를 위해서이고, 둘째는 충청감사를 기다려 같이 계획을 세워야 하기 때문
- 양호 병마와 치중輜重(말에 실은 짐)을 합하면 5만여명.
- 午시에야 호서 사상(충청감사) 도착.
- 전에 임진강(臨津江)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호서의 영리(營吏 - 영에 딸려 있는 아전)에게 자세히 들음.
"신립(申砬)의 동생 신길(申?)도 명장이라는데, 적수가 적다고 판단하여 많은 군병을 이끌고 강을 건너 경솔히 추격하다가 많은 적병이 반격하므로 그만 대패하니 아군은 모두 물에 빠져 죽고 신길과 김여물(金汝?)도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이 때 경성의 적은 병마가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걱정이 된다."
- 안동의 구화仇火역(경북 의성군에 있던 땅 이름으로 지금의 안동군 임하면) 금소역졸琴召驛卒(금소역 - 안동군 임하면 금소에 있던 역) 순석(順石)이라는 자가 금산에서 포거捕據가 되어서(포로가 되어서?) 용인까지 왔다가 도피하여 그만 호남군에게 붙잡혀 청로마부(靑路馬夫) 윤이允已를 보고는 통곡하거늘 감사가 죽이지 않고 구명했음.
- 청주에 오래 살던 여대덕(呂大德)이란 자가 두 딸을 왜적에게 시집보내고서도 충주 목사가 되었다고 하는데 충청 감사가 체포하여 참함.


6월 2일
- 수원 근처의 청호菁好역 북산에 결진하였으나 저녁밥도 굶었음.
- 밤새도록 큰 비가 내림

6월 3일
- 독성산(禿城 - 수원부에 있었던 산성이 있던 산)에 옮겨가 호남사상과 함께 결진. 이곳이 수원부 남산
- 수원에 웅거한 적들은 대군이 온 것을 알고서는 어제 아침밥을 먹자마자 황급히 도주하였다 함.
- 군량 40석과 말먹이 콩 50석을 판관으로부터 받아 와서 일행 군마에게 나누게 하였음.
- 10리 밖 용인 근처에는 왜적들이 여염집에 불지른 연기가 보임.
- 척후로 보냈던 장사들은 적을 만나 보지 못하고 돌아옴.
- 밤새 큰 비에 강풍

- "계초를 써서 사상께 올리니 사상께서는 찬획贊劃의 정신이 크게 전만 못하다고 하시고 웃으셨다." : 역시 중인 신분의 아전들이 장계의 초본을 쓰는 것일까요?
(찬획 : 국가의 변란이 있을 때 순찰사의 막료로서 문서를 작성, 전달, 수집하여 기밀정보를 담당하고 기획하는 영리 또는 선비들이 맡은 임시 직책)

6월 4일
- 아침에 삼도순찰사가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장계를 봉해 올림.
- 오후에 수원 북산으로 진을 옮기고 감사 셋이 다시 모임
- 멀리 바라보니 연염(烟焰 - 연기)이 곳곳에 치솟음.

최초의 전투
- 김수가 홀로 경상도의 장사 50여명에게 돌격 명령을 내림
- 적 중으로 뛰어든 유곡幽谷찰방 김충민(金忠敏)이 앞에서 돌진하여 적의 머리를 하나 베어 옴.
- 봉사 정기룡(鄭起龍)과 강만남(姜晩男)과 군수 김경로(金敬老)도 각각 하나씩 베어 옴.
- 동향인 박태고(朴太古)도 왜병 둘을 쏘아 죽임
- 정기룡의 전적 : 금산(금천) 접전에서 수급2, 수원 인근 1급, 총 3급 -> "당상관(堂上官)이 될만하여 축하할 일이다."

"적의 머리 1개를 베어서 얻으면 공사천 가릴 것 없이 등과한 것으로 하여, 2개를 얻으면 6품관으로 올리고, 3개를 얻으면 당상관에 올리게 되고, 적장의 머리를 베어 온 자에게는 봉훈하여 가선대부(종2품 하계)로 올린다고 듣고 있다."


6월 5일, 6일.
용인 전투 시작.

5만명의 조선군이 1600명의 왜군에게 대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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