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林志)』에 이르길 「처음 순제(順帝=126~144) 때에 낭야의 궁숭(宮崇)이 궐로 가서 스승 우길이 곡양(曲陽) 천수(泉水) 가에서 얻은 신서(神書)를 올리고, 흰 바탕에 붉은 경계를 둘렀고, 이름을 『태평청령도(太平靑領道)라 하고, 무릇 1백여 권이었다. 순제에서 건안 중엽에 이르기까지 5~60년이니, 우길은 이때 나이는 거의 백 살에 가까웠을 것이다. 나이가 어린이(悼)와 노인(耄)은 예법상 형을 가하지 않는다. 또한 천자가 순수(巡狩)하면, 나이가 백 살이 된 자를 물어, 가서 뵙는데, 나이든 이를 공경하고 친애하는 것이, 성왕(聖王)의 지극한 교화이다. 우길의 죄가 죽음에 미치지 않는데, 난폭하게도 잔인한 형을 가하여, 이내 죽였으니,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수신기(搜神紀)』에 이르길 「손책이 장강을 건너 허도를 습격하고자 하여 우길과 함께 길을 갔다. 이때 크게 가물어 가는 곳마다 두텁고 괴로웠다. 손책이 여러 장수와 관리, 병사들을 재촉해 빨리 배를 끌고 오게 하고는, 혹 자신이 일찍 나와 감독하다가, 장수와 관리들이 우길 부근에 많이 있는 것을 보고는, 손책이 이 때문에 격노하여 “내가 우길만 못해서 먼저 그에게 가는 것을 일삼는가?” 라 했다. 바로 우길을 붙잡아 들이게 했다. 그가 오자 꾸짖어 묻기를 “날씨가 말라 비가 오지 않고, 길에는 고생이 많아, 때맞게 지나가지 못하여서, 그래서 내가 일찍 나왔는데, 경은 그 근심을 같이 하지 않고, 배 가운데 앉아서 귀신같은 물건을 만들고 있으니, 내 군대를 패배하게 하는 것은 지금 마땅히 없애라.” 고 했다. 사람을 시켜 포박하여 땅 위에 두어 햇빛에 드러나게 하고는, 비를 빌게 하면서, 만약 하늘과 감응하여 한낮 중에 비가 내리게 하면 응당 사면할 것이나, 그러지 못하면 주살할 것이라 했다. 갑자기 구름의 기운이 위로 모여 약간 정도만 합치더니, 대낮 중 즈음이 되자, 큰 비가 한꺼번에 내려 계곡이 가득 찼다. 장수와 병사들은 기뻐하며 우길이 반드시 구원될 것이라 여겨, 아울러 가서 경축하고 위로하였다. 손책이 끝내 그를 죽였다. 장수와 관리들은 슬퍼하며 함께 그의 시체를 묻었다. 밤이 되자, 홀연히 다시 구름이 일어 그 위를 덮었는데, 다음날 아침 가서 보니 (그 시체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고 한다.
=================
사서에 나오는 우길에 대한 대략적인 행적이다. 배송지나 여러 사가들은 우길이 100여세를 훌쩍 넘어 살았기에 기록이 잘못 되었거나 말이 안된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른 가설을 제시해볼까 한다. 손책에 대해 나오는 우길 관련 얘기는 강동 지방에 대한 손책의 영향력을 볼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손책은 조정에서 강동 지방에 정식으로 임관한 지방관들을 무력으로 단기간에 평정한다. 그러다보니 강동에 대한 지배력이나 영향력이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손책이 허공의 빈객에 의한 습격으로 죽음을 맞이하게되는 것은 그러한 부분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각설하고 태평도가 순제 때 포교하기 시작했다면 후한 말에는 황건적의 난이나 장로의 오두미도처럼 상당히 교세를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우길이란 사람은, 아니 우길은 인명이 아니라 태평도 종교 지도자의 직책명이 우길이 아니었을까? 고조선의 단군처럼. 비슷하게 유비가 매질했던 독우를 사람이름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독우는 관직명이다. 이 독우는 이름이 알려지지않아 그저 독우란 관직명으로만 기록되었다. 우길이란 사람의 알려진 행적은 대개 저것뿐인데다 태평도란 종교단체 역시 알려진 바가 적다. 그렇다보니 사서에서도 정확히 기록하기가 어려운것은 아니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