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은 외척이나 귀족들의 권한이 강력해서, 왕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강력한 제약을 걸곤 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역대 왕들은...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식이 하는 일에 딴지거는 걸 제도화해버렸죠.
왕이라 해도, 자식이 아버지에게 이리저리 지시하는 건... 유교 문화권에선 불가능한 일이니까.
책임은 자식에게 미루고 권리만 행사하는 일본 특유의 이 통치제도를...
인세이라고 부릅니다.
2.
일본의 왕, 덴노는 일본 정부로부터 강한 정치적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일본국 헌법의 1~8조는 왕가와 그 권한, 계승 방법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왕가에 소속된 사람들은 실질적으론 굉장한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금수저, 죽을 때까지 의식주 보장이지만...태어나서 죽을때까지 아무런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없다는 건 답답한 상황일 겁니다.
아무리 실권이 없어도, 왕은 정치가이니까.
3.
일본 덴노는 머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초딩 시절, 카미카제 전술에 대해 "그냥 병력을 소모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할 정도로 똑똑했죠.
바꿔서 말하자면, 일본군의 그 모든 병신 짓을 보고도... 아무 말 못했고, 미군에게 고개 숙이는 일을 당한 겁니다.
그래서 평화주의자입니다.
거기에 만 82세의 사람이 "나 늙어서 은퇴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걸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실권 없는 명예직이라도, 한 국가에서 벌어지는 행사가 한 두개는 아닐테니까.
4.
문제는 일본 헌법에는 왕이 어려서 업무를 대행하는 '섭정'에 대한 항목은 있지만, 왕이 은퇴해서 상왕이 되는 상황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덴노를 꼭두각시로 만들었지만, 그거까진 생각 못했죠.)
헌법을 개정해야 하는데, 이게 크리티컬 히트입니다.
은퇴한 상왕은 법적 지위가 미묘한지라, 법 개정없이 지금 은퇴해버리면 덴노는 '정치적 발언에 대한 자유'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상황을 보면, 아베가 좋아할 말은 절대 안할 겁니다...)
결국 헌법 개정을 해야하는데...
다음 덴노가 될 사람은 딸 밖에 없으니, 아들로만 승계하는 규칙 바꾸고 싶을 것이고...
이 떡밥들은 한국의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보다 불판을 달궈놓을 떡밥이라, 전쟁 못하는 국가로 규정된 헌법 9조 개정을 묻어버릴 파괴력이 있죠.
어느 나라나 개헌은 전체 의원의 2/3 동의를 필요로 하기에, 그리고 덴노에게 이래라저래라하는 의원이나 장관들이 칼침 맞은 적이 많기에...
실질적으로 한 5년간 평화주의를 선언한 일본국 헌법9조를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수정할 기회는 날라간 겁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교황청에서 여자 추기경이나 교황을 뽑을 수 있게 승계 규칙을 바꾼다고 생각해보세요.
한국에서 메갈이 페미니즘 단체라고 인식당하는 바람에 온갖 범죄에도 옹호자를 찾는 거 생각하면... 다른 사안들은 나가리될 겁니다.)
전혀 정치적인 발언이 아니었지만, 고도의 정치적 발언일 수 밖에 없는...
정치적 발언을 금지당한 아키히토의 인생 마지막 역습이네요.
아베에게 빅엿 제대로 날렸습니다.
5.
물론 평생을 정치적 발언 안했는데... 아키히토는 정치적인 발언을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정치적인 발언이 금지된 덴노들이 어떻게든 정치적인 발언을 할 방법이 생겨난다...는 점에선
일본 정부 입장에선 제대로된 스트레스 감이겠죠.
12세기에 있었던... 21세기에 인세이라니!
** 정치/시사 관련 이야기이긴 한데... 기본적으로 딴나라 이야기니까. 팝콘이나 먹읍시다.
출처 | http://www.vop.co.kr/A00001057033.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