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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먼치킨 장군 가르친링
게시물ID : history_377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첫번째불꽃
추천 : 10
조회수 : 2252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2/03/14 22:05:26
읽기 귀찮은분들을 위해서 요약

1.7세기토번제국이 쫌 짱세짐 그래서 세계최강국이라고 불리는 당제국이랑 투닥거림
2.토번제국에 가르친링이라는 장수가 있는데 많이 먼치킨임... 근데 토번출신이라 묻힘...
3.티베트는 지금도 불교중심(라마교) 그래서 첸포(贊普:황제)중심으로 서술하며 티벳불교를 지키는 선한역활로 남음 나머지는 악한 세력으로 서술
4.가르친링이라는 짱센 먼치킨 장수가 있는데 무신대표세력임 그래서 문신들이랑 안좋음 사이가
5.첸포가 죽고 첸포의 유언대로 6왕자를 세우려고하는데 문신 세력은 다른 왕자를 지지함. 이에 중앙조정이 가르친링의 가족을 억류하고 위협하여 수하의 무장들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하지만, '대공무사'한 가르친링은 내전을 피하기 위해 문신들의 말을 따름
6.당이 이틈을 노려 30만대군을 보냄(거의 당의 해외투사할수있는군사력 전부)이에 토번제국 궁지에몰림
7.그러나 가르친링은 초먼치킨장수라서 84전84승0패의 전적을 가짐 한번도 안지는 신공으로 5만으로 30만 괴멸시킴 당은 이후로 엄청나게 약해져서 동서남북으로 우환거리가 다생김(여기에 발해도포함됨) 자기들을 동쪽정부 토번제국을 서쪽정부라고 인정해줌.
8. 하지만 첸포가 실권자인 가르가문을 몰아내고 친정을 행하려 하고, 이를 문신세력들이 부추김. 가르친링을 따르는 군부세력을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지만, 토번의 대의와 질서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고(2000명도같이), 아들을 당으로 망명보냄.
9.아들 가르궁린은 당의 명장이 되어 토번으로 진군, 아버지의 복수를 갚음. 

왠지 요약이 겁나 길어진느낌이 나는구만...




[1].출생과 집권

토번(吐蕃)의 최고 명장이자 7c 최고의 명장이라 칭함받는 가르친링(論欽陵)에 출생에 대한 기록은 사실상 없으며 태어난 연도 역시 각 기록마다 다르므로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토번의 명재상(名宰相) 가르통첸(祿東贊)의 2째 아들로 어릴적부터 창 다루는것에 뛰어났고 군사적 지략이 뛰어났으며 시와 문학에도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가르(Mgar)라는 말은 티벳어로 군사(軍士)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런것으로 볼때 그의 가문은 대대로 군사적 활동을한 귀족가문임을 추측할 수 있다. 혹 티벳 전설에는 가르통첸이 문성공주를 대려올때 그녀와 몰래 통혼하였고 그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말이 있으나 신빙성이 없으며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대표적인 증거로 가르친링(論欽陵) 아들인 가르궁린(論弓仁)이 도망치며(가르친링은 이후 왕권강화에 장애가 되어 핍박받았고 내란을 피하기 위해 가르친링은 자살한다. 이에 그의 아들 궁린과 동생 찬파는 당나라로 망명했다.) 지은 비가(悲歌)에 이런말이 나온다.



『가르궁린(論弓仁)의 비가(悲歌)』

부인은 비록 고개를 넘는다 마는

사랑하는 아들들은 모두 어디있느냐?

할머니는 서 계실 수 없을 정도로 늙으셨는데

일세의 영웅인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계실까?



이 시에 할머니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가르궁린(論弓仁)은 가르친링(論欽陵) 아들이고 가르궁린(論弓仁)에 할머니면 할아버지 가르통첸(祿東贊)의 부인이다. 중국사서에도 가르통첸이 부인을 뒀다는 기록이 있다. 당 태종(唐 太宗)이 낸 6가지 문제를 모두 풀자 당 태종(唐 太宗)은 가르통첸에게도 공주를 하사하려했는데 이에 가르통첸은 자신에게는 이미 부인이 있다고 말한다. 가르친링도 부인이 한명이었던것을 보면 가르가문은 일부일처제였던것으로 보이고 이로보아 가르친링(論欽陵)은 전설대로 문성공주의 아들이 아닌 정통 토번 귀부인에 아들이었다.



어쨋든 그의 어린시절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청년(아마도 15~18세)이었던 658년 아버지 가르통첸(祿東贊)을 따라 토욕혼(吐谷渾) 정벌에 참여하였고 토욕혼(吐谷渾)을 구하기 위해 온 당나라 명장(名將) 소정방(蘇定方)과 군을 맡대고 소규모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이렇듯 그는 청년 시절부터 이미 뛰어난 명장이었던것이다. 이후 667년 아버지 가르통첸(祿東贊)이 사망하고 형이 가르친네(Mgarchinae)가 아버지 직위인 대상룬(宰相)에 오르자 자신은 아버지의 군권을 세습하여 천하병마도원수(天下兵馬都元帥)에 올라 군권을 장악하였다.



국가의 내부일을 맡고 있는 대상룬(宰相)과 국가의 외부일을 맡고 있는 천하병마도원수(天下兵馬都元帥)를 이렇듯 가르가문이 독점할 수 있었던 환경은 다음과 같다. 송첸캄포때 가르통첸(祿東贊)은 군권만 장악한 대신이었고 정치는 보통 톤미삼보따라는 명재상이 장악하고 있었다.(가르통첸이 국가 외부일에 능했다면 그는 티벳어 창제든 국가 내부일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러다가 톤미삼보따가 나이가 들어 죽으면서 천하병마도원수(天下兵馬都元帥) 즉 군권쪽을 장악하던 가르통첸은  대상룬(宰相)도 겸하게 되어 내부일까지 맡게된것이다. 이로서 실상 가르가문은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이렇게 가르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고 두 직을 겸하고 있던 가르통첸(祿東贊)이 죽으면서 대상룬은 첫째인 가르친네(Mgarchinae)가 맡게 된거고 가르친링(論欽陵)은 천하병마도원수(天下兵馬都元帥)에 오른것이다.







[2].당나라에 전쟁을 선포하다.

천하병마도원수(天下兵馬都元帥)에 오른 가르친링(論欽陵)은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꿈을 이루러 하였다. 실상 가르통첸(祿東贊)은 당과의 화친을 주장했으나 그는 철륵에 반란을 이용하는등 친당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사실상 힘을 키운뒤 당과 전쟁을 치루자는 생각을 가진 자였다. 이러한 그의 영향은 아들인 가르친링(論欽陵)에게 그대로 갔다. 가르친링(論欽陵)은

666년 군사10만명을 거느리고 들어와 당나라가 차지한 청해지역인 황중(湟中)을 대대적으로 공격한것이다.



당시 황중(湟中)에 수비를 맡고 있던 당나라 장수 이근행(李謹行)은 병사들보고 땔나무나 베어오라는등 평소에 대비치 않았다. 이는 그동안 토번이 대대적임 침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적이 이르렀다는 보고를 들은 이근행(李謹行)은 그때서야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며 군사를 모으고 대비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대비하지 않았던 그는 잔꾀를 부리기로 하였다. 그는 성문을 열게한뒤 마치 연의에서 제갈량이 사마의를 속일때 쓴 방법을 그대로 재연한것이다.



이에 신중한 성격이었던 가르친링(論欽陵)은 매복군이 있음을 염려하여 성안에 들어가지 않고 황중(湟中)를 대대적으로 약탈한뒤 돌아갔다. 기록은 이렇다.



『구당서 권199 하 말갈전(舊唐書 卷199 下靺鞨傳)』

인덕(麟德664~665)연간에 (이근행이) 영주도독으로 관직을 옮겨 역임하였다. 그 부락 집안의 노복 수천명과 재력으로 변방을 굳세게 막아 지키니 이인(夷人-오랑캐-)들이 두려워 꺼리게 되었다. 거듭 우령군대장군에 임명하고 적석도 경략대사로 삼았다. 토번의 논흠릉(論欽陵-가르친링-)등이 10만명을 거느리고 들어와 황중(湟中)을 노략질 하였는데 이근행(李謹行)의 병사들이 땔나무나 하는 등 평소에 대비치 않다가 갑자기 적이 이르렀다고 듣고는 마침내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며 성문열 열어놓고 그들을 기다렸다. 토번(吐蕃)은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결국에는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다.



황중(湟中) 전투를 당나라는 승리로 기록하고 있으나 본인은 다르게 본다. 이 전투에서 당나라는 황중(湟中)에 성을 지킬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그 일대가 완전 초토화되버렸고 토번에 피해는 거희 없는 상황이었다. 중국측 기록은 이근행에 성 수비에 대해서만 기록할뿐 황중(湟中)일대가 초토화되었다는 기록은 하지 않았다. 이렇듯 당나라의 방심은 큰 화를 자초한것이었다.



667년 당나라가 고구려 원정에 몰두 하는것으로 노려 가르친링(論欽陵)은 강주(姜州) 12주(州)를 공격하여 점령하여 당나라의 허를 찔렀고 이로서 강족(姜族)들은 토번(吐蕃)치하로 들어갔다. 다음해인 668년 군사를 다시 몰아 당나라의 안서사진(安西四鎭)을 공격하여 토번을 침략하려는 당나라 안서사진(安西四鎭)에서 토번을 침략하기 위해 준비하던 당나라군을 붕괴시켰다. 이렇게 그는 청해일대를 완전 장악하면서 당나라의 침공을 미리 저지시킨것이다. 이러한 안서사진(安西四鎭 공격으로 인해 당나라는 토번 침략을 1년 더 미루어야했고 토번은 청해일대를 완벽히 장악함으로서 더욱 단단한 기반을 다 질 수 있었다.







[3].대비천 대첩(大非川 大捷)과 안서사진(安西四鎭) 점령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 제국은 맹장 설인귀(薛仁貴)를 나파도행군대총관(邏婆道行軍大總官)으로 삼고 아사나도진(阿史那道),곽대봉(郭待封),왕효걸(王孝傑)을 부장으로 고구려를 정벌했던 정예병들과 돌궐군으로 이루어진 20~30만 대군으로 하여금 토번(吐蕃)을 대대적으로 침공하였다. 이에 가르친링(論欽陵)은 20만 군을 이끌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출전하였다. 설인귀는 아사나도진과 곽대봉을 불러 "오해는 땅이 험하고 기후가 매우 나빠 우리의 죽음의 길로 위태로운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즉 빠르면 공적이 있으며 더디면 패하리라. 이제 대비(大非)령이 넓고 평평하니 두 울타리를 설치하고 안의 군수품에 진력하여 1만인을 머물러 수비하게 하고 나는 길을 배로 빨리가서 도적(토번)을 덮쳐 질서정연하지 못하게 하고 멸하겠다." 하였다. 이에 곽대봉(郭待封)을 남게 해서 군량 밑 수송로를 지키게 하고 설인귀는 경고 망동치 말라고 곽대봉에게 충고한뒤 진군하였다. 가르친링(論欽陵)은 전면전을 펼치지 않았다. 그는 당나라를 청해 내부로 끌여들여 전멸시킬 작전을 세운다. 당나라 본대를 유인하기 위해 가르친링(論欽陵)은 동생인 가르찬파(論贊婆)에게 2만에 군대와 양 2만두를 주며 싸우는척 하다가 거짓으로 달아나라고 하고 출전시키켰다. 설인귀(薛仁貴)군과 만나 싸운 가르찬파(論贊婆)는 형이 일러둔대로 패하는척 하며 양 2만두를 두고 갔다. 설인귀(薛仁貴)는 이 가르친링 계략에 걸려들어 교만해지고 추격하여 토번(吐蕃)의 오해성(烏海城)으로 진군하였다. 가르친링(論欽陵)은 군사 만여명 정도만을 오해성(烏海城)에 주둔시키고 적들을 막게 한뒤 자신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적군의 뒤로 진격하였다. 이 오해성(烏海城)에 성주는 아마도 토욕혼 출신 토번 장수 소화귀(素和貴)일 가능성이 큰데 과거에 토욕혼은 오해(烏海)에서 당군과 대결한적이 있었고 토욕혼에 영토였으므로 이에 따라 지리적으로 훤히 하는 소화귀(素和貴)를 성주로 삼았을 것이다.



설인귀(薛仁貴)는 20~30만 대군으로 오해성(烏海城)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가르친링(論欽陵)은 곧 바로 가르찬파(論贊婆)에게 퇴각하는척 한 군사를 다시 돌려 곽대봉(郭待封)이 지키고 있는 당나라 군량미가 보관된 대비령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설인귀(薛仁貴) 본대를 멀리 유인하고 보급군을 격파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한편 보급지를 지키게된 곽대봉(郭待封)은 평민 출신인 설인귀(薛仁貴)가 지휘하는것을 마음에 들어하질 않아 경계를 게을리 하고 있었다. 이는 토번에게 큰 기회였고 가르찬파(論贊婆)가 2만 병사를 이끌고 기습해오니 대비하지 않고 있던 곽대봉(郭待封)군은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군량미를 빼앗겼다. 보급군이 함락됬다는 소식에 놀란 설인귀(薛仁貴)는 급히 돌궐 기병대를 보내었으나 이 역시 가르친링이 예상해두고 매복해 있었기에 격퇴되었다. 가르친링(論欽陵)은 10만 군을 이끌고 당군의 후군을 공격하고 오해성(烏海城)에서도 성문을 열고 0병사를 밖으로 내어 공격하게 하니 설인귀(薛仁貴)는 갑작스런 토번 대군의 등장과 앞뒤로 공격받는 처지에 놓이게되자 군을 퇴각시키기 시작했다. 이것이야 말로 가르친링(論欽陵)이 노리던 수 였다. 가르친링(論欽陵)은 설인귀(薛仁貴)군에 퇴각로를 대비천(大非川)밖에 없게 만들었고 이에 따라 설인귀(薛仁貴)는 대비천(大非川)으로 퇴각하였다. 대비천(大非川)에 이르른 설인귀는 대비천(大非川)에 가로막혔기에 더 이상 퇴각 할 수 없었고 포위되었다. 그리고 마침네 포위전 끝에 설인귀(薛仁貴),아사나도진(阿史那道),곽대봉(郭待封),왕효걸(王孝傑)등 모든 당나라 장수들이 사로잡혔다. 이에 가르친링(論欽陵)은 다시는 침공하지 말라며 훈계만한뒤 돌려보냈는데 이때 첸포(贊普:황제)인 망송망첸(芒松芒贊)이 왕효걸(王孝傑)을 보고 자신의 부친을 닮았다며 후하게 예우하고 오랫동안 토번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말하겠지만 큰 실책이었다. 왕효걸(王孝傑)은 뛰어난 장수였다. 그는 토번에 머무르는 동안 토번의 지리와 군사를 둘러보며 정보를 캐나갔다. 그러나 왕효걸(王孝傑)은 어찌됬든 패장이었기에 패전 책임으로 서민으로 전락하였고 전쟁에 참여할수 없게 되었다.



설인귀(薛仁貴)는 우리나라에 익숙한 이름이다. 그는 고구려(高句麗) 멸망에 주요인물이었으며 당나라의 최고 맹장이었다. 단 화살 3발로 10만 위구르군을 굴복시켰던 설인귀(薛仁貴)이다.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의 멸망은 통한의 역사가 아닐 수 없기에 우리로서 이 대비천 대첩(大非川 大捷)은 참으로 통쾌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 대비천 대첩(大非川 大捷)의 책임으로 설인귀(薛仁貴)는 참형될뻔 했으나 그동안의 공으로 참형은 면했고 대신 그 동안 세운 모든 공이 사라지고 서민으로 떨어진다. 참으로 통쾌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가르친링(論欽陵)은 승전하자 마자 승기를 몰아 당나라로 진격하니 국경이 송주(松州),양주(武州),무주,수주(壽州) 즉 사천성에 인접하게 되었다. 670년 가르친링(論欽陵)이 군을 재정비하여 안서사진(安西四鎭)을 공격해 수십성을 함락시켜 마침네 안서사진(安西四鎭:오늘날 신강성)을 모두 함락시켰으니 중국 사서 기록을 따르자면 1만리에 이르르는 영토로 확장시켰다. 이후 하서일대를 약탈하여 당나라 군대를 정신 없게 만들었고 이로서 당의 재침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신중한 인물이었고 무리한 전쟁은 피하려 하였다. 비록 대비천 대첩(大非川 大捷)에서 승리하였다 하더라도 여전히 당나라는 강력한 제국이었다. 당나라는 군사를 다시 정비하여 연이어 침략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이런 장기전으로 가게 되면 토번(吐蕃)으로서도 힘든 상황이 된다. 가르친링(論欽陵)은 이에 문성공주와 송첸캄포 통혼을 위해 자신의 아버지와 동행했었던 지혜로운 신하 중종(仲琮)을 사신으로 당나라에 보낸다.



한편 당나라의 황제 당 고종(唐 高宗)은 대단히 진노한 상황이었다. 하기사 20~30만 대군이 궤멸되는것도 모자라 자신들이 믿고 출전시켰던 명장들이 모조리 사로잡히고 훈계받는 치욕을 당했으니 말이다. 토번 사신 중종(仲琮)을 본 당 고종(唐高宗)은 곧 바로 "첸포(贊普:티베트 황제)는 조부(할아버지:송첸캄포)가 더 어질고 좋았다. 왜 침공했는가?"라고 따졌고 이에 중종(仲琮)은 "용맹하고 날래며 결단력이 강하여 결정이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심히 부지런히 다스리고 있습니다. 하여금 주인을 감히 아래에 속임이 있겠습니까? 또 토번은 차고 고달픈 들에 삽니다. 재물은 적습니다. 오해는 음이 성해 여름에는 눈이 쌓입니다. 여름에는 털을 겨울에는 털가죽옷을 입습니다. 까닭에 목민(유목민)들은 풀과 물을 쫓습니다. 추우면 성에 거하며 천막에서 삽니다. 견디다 못해 쳐들어 가게 되는것입니다. 소용이 없으니 마땅히 중국은 만개중 하나를 나누어 주어야합니다. 다만 임금이 아랫 사람에게 낮낮 힘쓰는것을 논하는 일은 스스로를 낮추는 것입니다."라며 지혜롭게 답하였다. 이에 당 고종(唐 高宗)은  "토욕혼(吐谷渾)은 토번(吐蕃)과 더불어 외삼촌과 외손자 관계이다. 그런데 토번(吐蕃)은 토욕혼에서 도주한 장수 소화귀(素和貴)를 받아들이고 토욕혼(吐谷渾)땅을 침범해 빼앗았다. 이에 짐은 설인귀로 하여금 모용씨(慕容氏)를 도와주고 토번을 징벌케 하였다."라고 말했고 중종(仲琮)은 이에  "신이 명을 받들어 왔으나 소문과 다르옵니다."라고 답하였다.



토번 사신 중종(仲琮)은 자국을 철저히 낮추어 말하였다. 어떻게 보면 어떻게 조국을 그렇게 낮출 수가 있냐 라고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지혜로움이 아닐까? 그는 자국을 낮추고 불쌍한 나라로 설명함으로서 당나라를 침략한 사실을 정당화 시킨것은 물론이요. 또한 전쟁 책임을 회피함과 동시에 "다만 임금이 아랫 사람에게 낮낮 힘쓰는것을 논하는 일은 스스로를 낮추는 것입니다."라고 하며 당 고종(唐 高宗)의 자존심을 살려주었다. 귀곡자에서 말하는 낮춤으로서 나아간다는 책은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이렇듯 중종의 지혜로운 답변으로 당 고종(唐 高宗)는 노기를 풀고 토욕혼(吐谷渾)을 토번(吐蕃)땅으로 인정해줌은 물론이요. 전쟁에 책임을 묻지도 않았다. 이렇듯 가르친링(論欽陵)의 대활약으로 토번은 당나라의 대대적인 침략을 격파했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영토를 넓힐 수 있었고 또한 지혜로운 신하 중종(仲琮)덕분에 그 영토를 당으로부터 인정받고 많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국가에 흥망은 인재에 달려있다는 것이 참으로 맞는 말이다.







[4].대의(大義)를 위한 가르친링(論欽陵)에 대결단

지혜로운 신하 중종(仲琮)의 말 몇마디로 얻은 평화는 몇년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런 평화를 틈틈이 노려 가르친링(論欽陵)은 당나라의 하서일대를 약탈하게 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676년 당나라가 상서좌복야 유인궤(劉仁軌)를 조하로 보내 방어하게 하였고 이에 따라 토번과 당나라 사이에서는 소규모 전투만이 벌어졌다. 그러나 당나라는 기회를 계속 노리고 있었고 마침네 좋은 기회가 왔으니 676년 토번 첸포(贊普:황제)인 망송망첸(芒松芒贊)이 급사한것이다. 전시중이었기에 토번 조정에서는 나라의 혼란을 염려하여 망송망첸(芒松芒贊)의 죽음을 숨겼다.



그러나 망송망첸(芒松芒贊)의 죽음은 결국 들통났다. 이에 따라 독립을 노리던 토번(吐蕃) 서부 속국이었던 샹슝국(象雄國)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따라 가르친링(論欽陵)은 군을 이끌고 출전하여 진압하였다. 다음해인 677년 샹슝국(象雄國)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연차적인 반란에 가르친링(論欽陵)은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왕위 계승이었다. 망송망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한명은 적자(嫡子)인 치토슨(器弩悉弄)이었고 또 한명은 6살난 아들이었다.(6살난 아들에 이름은 기록 되어 있지 않다.)  망송망첸(芒松芒贊)은 죽기전까지 6살난 아들을 후계자로 지목 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가르친링(論欽陵)은 6살난 왕자를 보호하였다.



망송망첸(芒松芒贊)의 왕비인 몰록(沒祿)씨와 대신(大臣)이었던 국살약(麴殺若)은 당나라와의 전쟁을 반대하며 항시 가르친링(論欽陵)을 견제하였다. 또한 적자(嫡子)인 치토슨(器弩悉弄)은 몰록(沒祿)씨에 아들이었기에 몰록(沒祿)씨와 국살약(麴殺若)은 황명을 어기고 치토슨(器弩悉弄)을 왕위로 올리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당시 가르친링(論欽陵)에 대해 큰 불만을 품고 있는 속국 샹슝국(象雄國)을 동원하기로 한다. 그들은 샹슝국(象雄國)군을 수도인 라싸로 불렀고 궁을 점령하여 황명을 어기며 치토슨(器弩悉弄)을 첸포(贊普:황제)로 올렸고 가르친링(論欽陵)에 형인 가르친네(Mgarchinae)를 궁에 억류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토번(吐蕃)의 장수들은 격분하였다. 당시 국살약(麴殺若)은 문신(文臣)파였고 가르친링(論欽陵)은 무신(武臣)파였다고도 볼 수 있었다. 군을 동원하여 황궁을 점령하고 치토슨(器弩悉弄)을 첸포(贊普:황제)로 올리며 가르친네(Mgarchinae)를위협한것은 토번 장수들을 분노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또한 이 소식을 들은 당나라는 곧 바로 이간계를 쓰기 시작한다. 당나라는 배행검(裵行儉)을 보내어 가르친링(論欽陵)이 몰록(沒祿)씨,국살약(麴殺若)의 군대와 싸우게 만들게 하려 하였다.(그틈을타 청해를 점령하려 한것이다.) 이 이간계에 걸려 가르친링의 장수들이 크게 분노하며 당장 군사를 이끌고 청해를 떠나 라싸로 진군하여 몰록(沒祿)씨,국살약(麴殺若)을 베고 6살난 아들을 예정대로 왕위에 올리자고 했으나 가르친링(論欽陵)은 지금 당군과 맞대고 있는 상황에서 군사를 돌리면 청해를 빼앗긴다는 것을 알기에 6살난 왕자에게 어떠한 위해도 하지 않겠다는 것과 자신이 계속하여 군권을 장악하는것을 조건으로 치토슨(器弩悉弄)을 첸포(贊普:황제)로 인정하니 그가 치둑송첸(赤都松贊)이다.



당시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가르친링(論欽陵)이 라싸로 진군했다면 손쉽게 점령하였을 것이다. 어찌보면 이것이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과 가르친링(論欽陵)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연개소문(淵蓋蘇文)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쿠테타는 좋지 못한 결과를 가지고 왔다.(대표적인것이 당나라의 침략 명분을 만들어낸것) 물론 쿠테타를 일으키지 않았어도 당나라는 침공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에 비해 가르친링(論欽陵)은 대공무사(大公無私)라고 할 만한 선택을 한 것이었다. 이러한 가르친링(論欽陵)에 선택에 대해 중국인들조차 놀라워했고 『책부원귀(冊府元龜)』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책부원귀(冊府元龜)』

의봉 4년 첸포가 죽었다. 적자(嫡子) 치토슨은 대신(大臣) 국살약(麴殺若)과 함께 왕년(往年)에 병마를 징발했다. 만첸칸포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귀국하여 칸포가 되었다. 그때 나이가 여덟 살이었다. 그의 동생은 여섯 살로서 논흠릉(論欽陵:가르친링)의 부대에 있었다. 흠릉(欽陵:가르친링)이 강성하여 치토슨의 동생을 받들어 주(主)로 삼으려 했지만, 마침내 흠릉(欽陵)이 대의(大義)를 위해 살약(殺若)과 협심(協心)함으로써 치토슨의 왕위가 그비로소 정해졌다.



중국사서조차 이 사건에 대해서는 대의(大義)를 위한 결단으로 말하고 있다. 분명 가르친링(論欽陵)은 자신의 권력과 군사력을 동원하면 자신의 부대에 있는 6살 왕자를 올릴 수 있었지만 대의(大義)를 위해 그것을 접어둔것이다. 이렇게 하여 내분은 마무리 되었고 당나라는 이득을 챙길 수 없었으며 이간계는 실패하였다. 이 모두 가르친링(論欽陵)의 대결단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겠다.







[5].숭풍령 대첩(承風嶺 大捷)과 인식가 대첩(寅識迦 大捷) 토번(吐蕃)의 우세

이렇게 쭉 평화를 유지하다가 마침네 678년 당나라가 중서령(中書令) 이경현(李敬玄)을 제군대총관(諸軍大總管)으로 삼고 공부상서(工部?書) 유심례(劉審禮)를 부관으로 삼아 18~25만 대군을 이끌고 공격하게하자 가르친링(論欽陵)은 이에 직접 출전하여 10만 군대를 이끌고 이에 맞섰다. 양군은 숭풍령(承風嶺)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사실 당나라 중서령(中書令) 이경현(李敬玄)은 문신(文臣)으로서 유약하며 병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다. 또한 이경현(李敬玄) 그 자신 역시 자기자신을 알았기에 당 고조에게 여러차례 군임무는 빼달라고 상소한바도 있었다.(그는 문학적 재능에 뛰어났지 전쟁에서는 잼병이었다.) 이경현(李敬玄)이 싸울 마음이 없자 공부상서(工部?書) 유심례(劉審禮)가 선발대로 공격에 나서니 이에 가르친링은 발지설(跋地設)을 선봉장으로 맞섰다. 토번의 불패명장 가르친링(論欽陵)의 지휘하에 발지설(跋地設)의 공격에 유심례(劉審禮)의 선발대는 무너졌고 유심례(劉審禮)는 토번군에 겹겹이 쌓인 방진의 창에 격살되었다.



선발대가 무너졌음에도 이경현(李敬玄)은 가르친링(論欽陵)에 명성을 익히 들었기에 그를 두려워하여 이를 지원하지 않았다. 당군 선발대의 진열이 일제히 무너졌고 이에 당나라군 수만명이 죽었다. 가르친링(論欽陵)은 기세를 몰아 직접 당나라 본진까지 진군하였고 당나라는 본진까지 무너지게 되었다. 이경현은 가르친링군에게 포위당해 사로잡힐뻔 했으나 간신히 탈출하였다. 이에 이경현(李敬玄)과 휘하장수들은 두려워하여 전의를 상실하고 회군할려고 하자 가르친링(論欽陵)은 당나라군을 진흙수렁으로 몰아 당나라군은 진흙수령에 막혀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고 장수 발지설(跋地設)로 만여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고지(高地)에 진을 치게해 당나라를 추격하였다.



계속된 추격대의 공격에 당(唐)나라 군이 전멸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장수가 등장한다. 바로 백제(百濟) 유민출신 당나라 명장 흑치상지(黑齒常之)이다. 흑치상지(黑齒常之)는 이경현(李敬玄)에게 자신이 토번군을 막겠다고 말하였고 승낙받았다.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단 500명의 정예군만을 이끌고 발지설(跋地設)추격군에게 결사항전을 벌였고 격전 끝에 발지설(跋地設)이 패하고 퇴각하여 이경현(李敬玄)의 당군은 구사일생으로 무사히 퇴각하였다. 그러나 이미 많은 병력을 잃은 뒤였다. 흑치상지(黑齒常之)가 아니었으면 사실상 대비천 대첩(大非川 大捷)때와 마찬가지로 당나라의 전 장수들이 사로잡혔을지도 모른다. 어찌됬든 이렇듯 당나라는 대패하고 말았다.



679년 10월 토번의 문성공주(文成公主)가 대신(大臣) 논새조(論塞調)를 파견하여 첸포(贊普:황제)인 망송망첸(芒松芒贊)가 죽은 것을 고하고 화친을 청하자 황제(唐고종)가 낭장 송영문(宋令文)을 토번에 장례사절로 보냈다. 이로서 잠시 동안의 화친이 성립되었다. 680년 가르친링(論欽陵)은 내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몸소 호구조사에 참여하였고 680년 말기 전쟁은 다시 발발하여  가르친링(論欽陵)은 680년 사천 서북부 지역의 전략적 요새인 안융성(安戎城)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또한  명장 소화귀(素和貴)와 동생 가르찬파(論贊婆)로 하여금 3만대군으로 당나라 사천일대를 침공하게 하여 이경현(李敬玄)의 군대를 무찔렀다. 그러나 흑치상지(黑齒常之)가 3천 기병을 이끌고 습격함으로 이경현(李敬玄)을 잡지 못하였다. 682년 당나라가 다시 침략할 기세를 보이자 군사를 일으켜 탁주,송주,익주를 침략하여 크게 약탈하였고 기록을 보면 이러한 토번의 약탈로 당나라 사천지방의 재정이 무너질 정도였다.



685년 형인 가르친네가 죽자 그 직위 대상룬(宰相)직을 맡게 되었고 외정과 더불어 내정도 맡게 되었다. 한편 당나라는 빼앗긴 안서사진(安西四鎭)을 되찾기 위해 군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침네 689년 무측천(武則天)이 문창우상 위대가(韋待價)를 안식도대총관으로 임명하고 안서대도호 염온고(閻溫古)를 부총관에 임명하여 10만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토번(吐蕃)이 장악한 안서사진(安西四鎭)을 치게 하였다. 이에 가르친링(論欽陵)은 군을 이끌고 인식가(寅識迦)강으로 이동하여 당군과 대치하였다. 당군은 가르친링(論欽陵)에 대해 잘 알기에 진격하지못하였고 때는 겨울이었기에 폭설이 일어나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체 당군은 그곳에 진을 쳤다. 이때 가르친링에 토번군을 강을 건너 당나라군을 공격하였고 당나라군은 대패하였다. 퇴각하던 당군은 폭설로 인해 대다수가 얼어죽었고 전투는 당나라의 참패로 끝났다.  무측천(武則天)은 이 패전에 매우 노하여 위대가(韋待價)를 수주로 유배시키고 염온고를 참형에 처하였다.





이렇듯 당나라의 안서사진(安西四鎭) 탈환을 위한 첫전투는 참혹하게 끝이났다. 한편 가르친링(論欽陵)은 대상룬(宰相)직도 겸하게 되었기에 내정일에도 참여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라싸로 이동하게 되었다. 가르친링(論欽陵)이 청해~신강에서 라싸로 이동하게 됬음으로 군권은 사실상 동생인 가르다고리(喝爾悉多干)가 갖게 되었고 가르다고리(喝爾悉多干)가 안서사진(安西四鎭)을 지키게 된다.







[6].안서사진(安西四鎭)을 빼앗기고 군에 3분에 2를 잃다.

그러나 당나라는 안서사진(安西四鎭)을 탈환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692년 무측천(武則天)은 명장 당휴경(唐休璟)의 상소로 왕효걸(王孝傑)을 좌무위대장군으로 복직시키고 아사나충절(阿史那忠節)과 당휴경(唐休璟)을 부총관으로 삼아 돌궐군과 더불어 정예부대인 금아군(金牙軍) 30만을 내주어 안서사진(安西四鎭)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이는 사실상 올인과 같았다. 직업군인 금아군(金牙軍) 30만을 동원한다는것은 당의 주력부대를 대부분 동원한다는 것이었고 이는 도박과 같았다.



앞서 말했지만 왕효걸(王孝傑)은 대비천에서 사로잡혔을때 첸포(贊普:황제)인 망송망첸(芒松芒贊)이 자신에 부친과 닮았다 하여 후하게 예우하였고 왕효걸(王孝傑)은 그때 토번을 정탐하였다. 전쟁에 패배한 대가로 서민으로 전락한 그를 그동안 알아주는 이가 없어 왕효걸(王孝傑)은 전투에 참여 할 수 없었지만 명장 당휴경(唐休璟)은 그를 알아보고 천거함으로서 전쟁에 투입된 것이다. 지피지기 백전불태라 했으니 토번(吐蕃)에 대해 훤히 알며 전쟁에 뛰어난 왕효걸(王孝傑)은 당나라에게 있어 참으로 든든한 장수였다.



한편 안서사진(安西四鎭)을 지키고 있는 가르친링의 동생 가르다고리(喝爾悉多干)는 15만 대군을 이끌고 맞서 싸웠다. 도덕령에서 양군은 만나 혈전을 치루었는데 당나라에 장수 난대도위 장귀경등이 맹렬히 싸우고 왕효걸(王孝傑)의 뛰어난 지략으로 당나라가 승리하였다. 이어 당나라는 안서사진(安西四鎭)중 3개의 진을 점령하였고 가르다고리(喝爾悉多干)가 이끄는 토번을 연패시켰다. 마침네 가르다고리(喝爾悉多干)가 마지막 안서사진(安西四鎭)인 소륵에서 6~10만 군대를 잃는 대참패를 함으로서 전쟁은 당나라의 승리로 끝이났다.



이 전투는 우리나라식으로 말하자면 칠천량해전과 다를것이 없었다. 이 전투로 토번은 사실상 대부분의 병력을 잃었고 동원 할 수 있는 병력이라고는 이제 5~8만 가량뿐이었다. 10만 가량 동원 할 수 있었지만 당시 사천에서도 당과 대립중이었기에 다른 지역에서 군을 빼올 수 도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가르친링(論欽陵)은 바로 전선에 복귀하였고 694년 발론찬(勃論贊)을 보내어 돌궐의 괴뢰 수장 아사나뇌자(阿史那子)를 설득하여 서돌궐군과 연합을 할려고 하였다. 당시 독립을 위해당과 투쟁을 벌이던  아사나뇌자(阿史那子)는 이를 승낙하였고 10만 대군을 이끌고 냉천과 대령을 침공했으나 왕효걸(王孝傑)이 5만 군을 이끌고와 이들을 크게 격파시켜 6만명을 참하는등 돌궐의 지원군은 궤멸되었다. 이로서 토번을 도울 수 있는 나라는 이제 사라진것이었다. 이어 당나라는 한사충(韓思忠)으로 하여금 토번을 공격하는등 토번(吐蕃)을 점점 조이기 시작하였다.







[7].기적의 전투 소라한산 대첩(素羅汗山 大捷)

이렇듯 안서사진(安西四鎭)에 참패로 점점 전세는 토번(吐蕃)에게 불리하게 이끌어 지고 있었다. 무측천은 이에 기뻐하며 금아군 30만 모두에게 상을 내렸고 그중 용감하게 싸운 144명의 전사들은 무측천이 친히 표창할 정도였다. 토번(吐蕃)의 운명은 표현하자면 칼 끝 같은 운명이요. 바람 앞에 등화였다. 당나라의 정예군 금아군(金牙軍) 30만이 언제 진격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동맹국이던 서돌궐은 멸망했다. 또한 내부에서는 대신(大臣) 국살약(麴殺若)이 전쟁을 반대하고 화친을 주장하고 있었다. 안으로든 밖으로든 토번은 최악의 상황을 직면하였다.



696년 가르친링(論欽陵)은 이러한 힘든 상황에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다.





『Dpa'o gTsug-lag phreng-ba 연대기,Lhobrag판,목판본에 기록된 가르친링의 시』


많은 작은 새가 한 마리 매에 의해 살해되며
많은 작은 물고기가 한 마리의 수달피에 의해 죽임을 당하네



크게 자란 뿔에도 불구하고
수사슴은 짦은 뿔을 가진 야크를 당하지 못하네



백년된 소나무도 하나의 도끼에 베어지며
강은 작은 배로 건널 수 있다네



평야전체에서 자라나는 대맥과 쌀은 하나의 물방아로 빻아지고
뭇별들은 하나의 태양에 의해 빛을 잃네



계곡 밑에서 발화된 불이 산을 태우고
한 샘물의 물이 산과 평원의 모든 나무를 운반하네



하나의 돌이 평원에 있는 단단한 돌을 흙으로 만들고
풀전체는 버려진 철조각 보다 빨리 썩네



솥에 가득 찬 물도 소금을 넣으면 짜게 되고
무수한 풀도 낫 하나로 베여지며


가느다란 화살로 여러마리 야크가 죽는다네.





해석해보자면 많은 범용한 사람이 뛰어난 인재 한명을 이기지 못한다는 뜻이며 적은수의 군대로 당나라의 군대를 격파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렇듯 가르친링(論欽陵)은 위태한 상황임에도 후퇴하거나 화친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3~5만 군대만을 이끌고 결전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698년 가르친링(論欽陵)은 3만의 군사를 일으켜 임조를 공격하여 당군을 격파하였고 이에 당나라는 크게 분노하였다. 무측천은 왕효걸(王孝傑)을 숙번도행군총관으로 임명하고 돌궐군과 더불어 정예부대인 금아군(金牙軍)과 돌궐군으로 이루어진 30만대군을 다시 내주어 토번을 정벌하게 하였다. 이에 가르친링(論欽陵)은 군사를 총집결하였으나 가르다고리(喝爾悉多干)의 패전으로 인해 움직일 수 있는 군대가 3~5만 정도뿐이었다.



물론 사천일대나 다른 방면의 군대까지 끌어모은다면 10만 이상의 병력을 모을 수 있었겠지만 당시 사천에서도 당군과 대치중이던 상황이기에 뺄 수 있는 상황이아니었다. 3~5만의 군대로 당나라 최정예부대 30만을 상대해야하니 그야말로 육지의 명량해전(鳴梁海戰)이었다.



698년 7월 마침네 혈전은 시작되었다. 금아군(金牙軍)과 돌궐군으로 이루어진 30만 당나라 정예 대군은 가르친링(論欽陵)이 이끄는 3~5만 토번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놀라운 기적이 벌어졌다. 698년 7월 부터 699년 1월까지 전투는 계속 됬으나 토번군은 패배하지 않았다.(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전투 과정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이에 당 조정에서는 699년 1월 루사덕(婁師德)에게 10만 군대를 증원군으로 지원을 보냈다.



3~5만군대로 30만 대군도 맊기 힘든데 이제 40만 대군을 맊게 된것이다. 그러나 가르친링(論欽陵)은 패배하지 않았다 그는 3월까지 당군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다. 그리고 마침네 699년 3월 소라한산(素羅汗山)에서 양군은 서로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다. 그야말로 이 소라한산(素羅汗山) 전투는 기적 그 자체였다. 정예부대인 금아군(金牙軍)과 돌궐군으로 이루어진 당나라 40만 대군이 토번군 3~5만에게 참패를 당한것이다. 왕효걸(王孝傑)과 루사덕(婁師德)은 병사한명 이끌지 못하고 단기로 도망쳐왔고 무측천(武則天)은 크게 진노하여 왕효걸(王孝傑)을 서민으로 강등시키고 루사덕(婁師德)을 원외사마로 강등시켰다. 아쉬운점은 이 소라한산 대첩(素羅汗山 大捷)에 상황이 기록되지 않아 어떻게 싸웠는지 알 수 없다는것이다. 안서사진(安西四鎭)에서의 대패로 열세적이게 된 토번은 이 기적적인 승리는 세계의 흐름을 변경시켰다. 토당전쟁(吐唐戰爭)은 당이 열세인 환경으로 바꾸었다. 토번(吐蕃)의 영향력은 당나라 장안성 인근까지 가게 되었고 당나라는 이제 방어에 열중하게 되었다.







[7].가르친링(論欽陵)의 꿈과 종결

이렇게 소라한산(素羅汗山) 대첩으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 버렸다. 토번은 당나라보다 군사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당나라는 이에 따라 토번의 침략을 대비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것이다. 699년 열세적으로 내몰린 당나라는 결국 화친하기 위해 곽원진(郭元振)을 토번(吐蕃)에 사신으로 보내었다. 곽원진(郭元振)이 가르친링(論欽陵)을 만나 말하기를 "동쪽 조정에서 일을 고합니다. 좋은 맹세가 끝이 없다가 오늘날에 이르러 끊어졌습니다. 요즘 변방이 어지럽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그것이 효도입니까? 아버지 일을 아들이 배반했습니다. 그것이 충성입니까?" 가르친링이 답하기를 "그러하면 천자(天子)가 화친을 허락하였는가 두 나라(토번.서돌궐)를 탐하여 주둔시킨 군대를 물러가게 했는가? 각 사진의 각 군장들로 하여금 어찌 서돌궐을 당나라가 지키는건가." 곽원진(郭元振)이 말하였다. "이미 당이 십성(十性:서돌궐)을 안서로 서토를 쳐 다스림을 나누었습니다 안서의 각 국가의 주인 행정 구역이 다릅니다 만일 여러 부족과 더불어 토번이 부족을 나눈다면 화가 있을지니 미래를 위해 서돌궐을 당과 엮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르친링(論欽陵)이 답하였다. "사자의 꾀가 우리의 각 부족을 빼앗는 것에 뜻이 있다. 당나라의 변방이 근심되는가? 그런데 그대들은 우리의 땅과 재물을 탐한다. 그쪽의 청해 비롯한곳에서 어찌 잠시 전쟁을 아니하자고 하는것인가? 돌궐부족은 자갈 사막이 넓다 또 중국과는 심히 멀다 어찌 편안함이 있겠는가? 너희 당나라는 속과 안이 간사하다. 사이(四夷)가 당나라에게 모두 두려워 비록 나란히 있으나 바다밖 땅 사이에서 닳아 없어지거나 멸망하지 않을것이다. 토번은 맏 아들이 독재하나 다만 형제가 소심한 까닭에 재상자리를 얻고 보전하였다. 돌궐은 너무 멀며 그대들과 싸우기 일수이다. 안서사진을 원하지 않을 것이니 서돌궐에 대한 지배권을 달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도와주겠다.  청해지역에서는 근심이 없어질것이다. 화친을 맺어 줄것이니 이에 어김이 없을것이다." 그러나 사자 곽원진(郭元振)이 이를 거부하였다.



이 내용은 『신당서(新唐書)』에 나오는 내용이다. 당시 토번(吐蕃)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동안 토번을 속국 취급 해왔던 당나라는 스스로를 "동쪽 조정"이라 칭하였다. 즉 토번(吐蕃)을 서쪽 조정으로 대등한 관계로 해주었던 것이다. 또한 이 내용은 가르친링이 어떠한 꿈을 가지고 있는지 알려준다. 내용을 보면 가르친링은 화친의 대가로 서돌궐땅을 요구하였다. 즉 그의 꿈은 서돌궐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토번을 대유목제국으로 만드는것에 있었던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않그래도 호랑이인 토번(吐蕃)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었다. 당은 이를 거절하였고 가르친링(論欽陵)은 이에 당나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하기로 한다.



역사가 항상 그렇고 일본(日本) 속담에 "적은 혼노지에 있다."라는 말이 있듯 진짜 적은 내부에 있었다. 699년 말년 첸포(贊普:황제)인 치둑송첸(赤都松贊) 마침네 나이가 들었으니 친정을 하기 시작하였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대신(大臣)인 국살약(麴殺若)으로 하여금 가르(Mgar,論)가문을 탄압하기 시작한것이다. 이렇게 되어 가르친링(論欽陵)의 당나라 공격은 이룰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가르가문 탄압에 부하 장수들이 쿠테타를 권하게 되었다. 사실상 이는 무신과 문신들에 싸움이었다. 국살약(麴殺若)은 문신들을 주로 이끌었고 가르친링(論欽陵)은 무신들을 주로 이끌었다. 그러나 가르친링(論欽陵)의 선택은 참으로 놀라운것이었다. 가르친링(論欽陵)은 국가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거부하고 또한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아들인 가르궁린(論弓仁)과 동생인 가르찬파(論贊婆)를 당나라에 투항시킨것이다. 아직까지 군권은 가르친링(論欽陵)에게 있었다. 그가 만약 쿠테타를 일으킨다면 충분히 첸포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된다면 첸포를 신성하게 여겨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중앙집권이 해제되고 토번(吐蕃)은 큰혼란에 빠질것이 분명했다.



그의 선택은 어찌보면 드라마틱하였다. 가르친링(論欽陵)은 동생인 가르브론(喝爾勃論).가르타구(喝爾悉多干)와 손주등 가족들과 2천명의 부하(무신세력)들과 함께 청해호(靑海湖)에서 집단으로 자살하였다. 국가에 적이 되지 않으면서 가문을 잇는 방법을 택한것이었다. 가르친링(論欽陵)의 아들 가르궁린(論弓仁)이 당나라로 도망칠때 청해호에서 지은 비가(悲歌)는 아직까지도 전해진다.



『가르궁린(論弓仁)의 비가(悲歌)』

부인은 비록 고개를 넘는다 마는

사랑하는 아들들은 모두 어디있느냐?

할머니는 서 계실 수 없을 정도로 늙으셨는데

일세의 영웅인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계실까?



이 가르(Mgar,論)가문의 비극을 역사에서는 그저 역사속에 일로서 기록될뿐 그들에 슬픔은 기록되지 않으니... 아... 역사는 개인의 비극과는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어찌됬건 이후 기록을 보면 호부호자(虎父虎子)였던가? 가르궁린(論弓仁)은 당나라 역사에서 손꼽히는 명장이 되며 이후 토번과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는 그야말로 복수혈전을 치룬다. 또한 스스로 하늘이 자신들에게 준 명장을 제거한 토번(吐蕃)은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하게 되고 당나라는 다시 토번보다 군사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토번은 안사의 난이 일어나서야 다시 당나라를 제압하고 군사적 우위를 거둘 수 있었다. 그의 자살은 토번에게 그 어떤 손실보다 가장 큰 손실이었다.



이렇듯 7c 최고의 명장은 이렇게 드라마틱하며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당은 토번을 상대하기 위해 주력부대를 서쪽으로 이동시켰기에 나당전쟁(羅唐戰爭)에서 신라(新羅)는 승리를 거둘수 있었고 그의 활약으로 당나라는 대부분의 주력부대를 상실 하여(실상 가르친링의 활약으로 당은 직업군에 60%가량을 손실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당의 국력이 크게 감소하면서 돌궐 2제국의 흥기가 가능했고 거란의 봉기가 가능했으며 거란이 봉기함으로 발해건국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의 시처럼 한 사람의 준재(俊才)가 만인을 당해냈다.




사이(四夷)가 비록 당나라를 모두 두려워하여 비록 나란히 있으나,

바다밖 땅 사이에서 닳아 없어지거나 멸망하지 않을것이다.

-가르친링(論欽陵)-





참고문헌:

『구당서 권199 하 말갈전(舊唐書 卷199 下 靺鞨傳)』

『摘自《三晉歷史人物》,書目文獻出版社,本文作者:王振芳』

『티베트 역사 산책, 김규현 저』

『티벳의 문화(Tibetan Cuivilization), R.a 슈타인 저』

『신당서 권216 토번 상(新唐書 卷216 吐蕃 上)』

『자치통감 권202(資治通鑑 卷202)』

『책부원귀(冊府元龜)』

『구당서 권93(舊唐書 卷93)』

『자치통감 권204(資治通鑑 卷204)』

『무측천 평전 왕쌍회 저』

『구당서 토번전(舊唐書 吐蕃傳)』
출처:http://cafe.naver.com/sagasagasaga/4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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