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내용은 2006~2007년 지하철 공익요원을 하며 겪은 경험담입니다.
#71 [Lonely Planet]
공익요원으로 지하철에 처음 배정되었을 때는 우리 반 인원이 6명이었지만, 점점 감축되더니 1년 만에 3명으로 줄어들었다.
2명이 휴무로 빠지면 나 혼자 근무해야 하는데 그런 경우가 잦았다.
그 넓은 역을 혼자 관리해야 했다.
사고가 났을 때 제대로 대처를 못하면 1차적으로 내 책임, 2차적으로는 관리자인 역장 책임이라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바쁜 역장은 혼자 출근한 나를 들들 볶았다.
근무시간 대부분을 승강장을 돌면서 보냈다.
휴식시간은 1시간에 10분도 되지 않았다.
CCTV 모니터에 내 모습이 10분 이상 안 보이면 금방 역장에게서 승강장을 돌라는 전화가 왔다.
식사시간에는 역무실에서 CCTV 모니터를 보면서 밥을 먹게 했다.
밥 먹다가 승객 신고나 휠체어 리프트 호출이 오면 바로 달려나갔다.
한 번에 휠체어 리프트 호출이 두 군데 이상에서 오면 처리가 지연돼서 지체장애인들에게 욕을 퍼먹었다.
근무가 힘든 건 참을만했는데 외로운 건 참기 힘들었다.
지하철에는 원래 취객이 많지만, 연말연시에는 특히나 취객이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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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쓰러져 있다는 승객의 신고가 들어와서 가보니 중년 남성이 술에 취해 승강장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자고 있었다.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질 않고 자기는 취해서 도저히 열차를 타고 갈 수 없으니 가만히 쉬게 내버려 두라며 웅얼거렸다.
긴 실랑이 끝에 눕지 말고 벤치에 앉아서 쉬었다 가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그러면 더는 신고가 들어와 나를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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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체장애인을 도와 휠체어 리프트를 작동시키고 있는데 술 취한 중년 남성이 옆에서 나를 지그시 노려보다가 다가오더니 꼬인 혀로 구시렁거렸다.
역장 개.새끼가 역사 운영을 개떡같이 한다고 욕을 내뱉는다.
약간 동감했지만, 옆에 있던 지체장애인이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을 쳤기 때문에 그를 멀찌감치 쫓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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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무실에 올라왔더니 이번에는 출구 쪽에 술 취한 중년 여성이 있다고 나보고 처리하란다.
계단에 잔뜩 구토해놓고 벤치에 엎드려 있는 중년 여성에게 댁에 연락하게 연락처 좀 알려달라고 하니 취해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고개를 격하게 흔들며 집에는 절대 연락하지 말란다.
결국, 부축해서 밖으로 데려가 택시에 태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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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무실에 돌아오자마자 또 매표소에서 시비 걸고 있는 취객 좀 처리해 달라는 호출이 왔다.
욕을 하며 난리 치는 술 취한 중년 남성을 겨우 달래서 승강장으로 데려갔다.
비틀거리길래 옆에서 팔꿈치를 잡고 부축해주니 연행당하는 것 같아 기분 나쁘단다.
승강장에서 열차가 들어올 때까지 옆에 있으니 감시하는 거냐면서 저리 꺼지라고 한다.
감시하는 거 맞다.
선로로 추락해 다치거나 죽는 경우는 자살자보다는 취객이 훨씬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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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한 청년이 역무실에 찾아와서 역 밖의 환풍기에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고 꺼내달란다.
역무원이 그 환풍기는 우리 담당구역이 아니라고 했고, 거기서 시비가 붙었다.
자기 친구가 형사이고 어쩌고, 또 다른 친구는 역무원이고 저쩌고...
한참을 역무실에서 난리 치다가 가더니, 잠시 후 다시 찾아와서 자기가 직접 환풍기 뚜껑을 열고 내려가 꺼내왔다고 자랑했다.
그는 추락사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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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시간에 승강장을 도는데 승강장 구석에 누군가 구토를 해놨다.
청소용역실에 연락을 하고 승강장을 다시 도는데 얼마 가지 않아 또 구토해놓은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발견한 곳이 모두 4군데였다.
매표소에 잠시 앉아 쉬고 있는데 승객안내 봉사활동하는 학생이 와서 엘리베이터 쪽에서 싸움이 났다고 했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자 수십 미터 밖에서부터 우렁찬 욕설이 들렸다.
중년 여성 두 명과 노년 여성 한 명이 엉겨 붙어 싸우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다가 서로 부딪힌 게 발단이 되어 사람 많은 공공장소에서 욕설을 내뱉고 싸우고 있다.
옆에서 아무리 말려도 들은 척 만 척 서로 욕하기 바빴다.
보통 사람들은 만취하지 않은 이상 공공장소에서 저렇게 큰 소리로 떠들지는 않는다.
사회적 지위나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들면 쪽팔려서라도 그만둔다.
하지만 저런 부류들은 주위의 눈총 따윈 신경 안 쓴다.
시선이 쏠리면 오히려 보란 듯이 더 크게 소리친다.
천박한 싸움일수록 목소리가 제일 큰 사람이 이길 확률이 높다.
밤샘근무를 마치고 오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야간근무가 휴무라서 3일간 휴일이다.
계속 사람들에게 시달렸더니 집 밖으로 나가기 싫어졌다.
식욕이 없어서 점심은 건너뛰고 가볍게 머리를 비우고 볼 수 있는 헐리웃 영화 두 편을 봤다.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영화를 봤다.
라면을 먹으며 다른 영화를 봤다.
다시 영화를 두 편 연속으로 봤다.
저녁밥을 차려 먹으며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영화를 봤다.
점심으로 라면을 먹으며 영화를 봤다.
다시 영화를 세 편 연속으로 봤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관성적으로 다시 영화를 틀었다.
세 편 연속으로 봤다.
보람차고 충실한 휴일이었다.
지하철에서 종일 사람들에게 지겹게 시달리다보니 쉬는 날에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려고 대부분 집에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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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그때 그렇게 몰아서 봤던 영화들의 내용이 대부분 기억나질 않는다.
지하철에서는 안전사고가 꽤 빈번하게 일어나지만, 3~4명의 역무원과 1~2명의 공익근무요원으로는 넓은 역의 안전사고를 모두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안전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근본적인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 보다는 우선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어야만 직성이 풀린다.
안전사고가 날 때마다 쏟아지는 비난과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변명거리가 필요한데...
이때 요긴하게 쓰이는 게 CCTV와 공익근무요원이다.
사고가 일어났을 때, 공익요원이 사고 현장 CCTV에 찍혀있으면...
"저희 공익요원이 이렇게 열심히 근무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을 수가 없었던 어쩔 수 없는 사고였습니다."
공익요원이 CCTV에 찍혀있지 않으면...
"근무태만한 공익요원을 당장 징계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비난의 화살은 공익요원에게만 쏠린다.
그래서 사고가 난 후에 상부에서 책임소재를 따질 때 제일 먼저 사고 당시 공익요원의 위치부터 파악한다.
사고가 벌어지기 전에 미리 안전장치를 해서 사고를 막는 것보다는 사고 당시에 CCTV에 공익요원이 얼마나 예쁘게 찍혔는가가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