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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끼 따던 노인
게시물ID : art_260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anni
추천 : 5
조회수 : 91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4/26 0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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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원작 - 방망이 깎던 노인, 윤오영(尹五榮)



벌써 3-4년 전이다. 내가 갓 취업 한 지 얼마 안 돼서 강남에서 일 하던 때다. 새로나온 맥프로를 보기 위해 일단 홍대에 내려야 했다.
프리스비 맞은편 상가 구석에 포토샵을 들여다 보는 노인이 있었다. 누끼 하나 따 가지고 가려고 따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 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누끼 하나 따는 것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든 혼자 마법봉으로 따시던지."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따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따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따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 레이어 저 레이어 추가하며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따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타야 할 차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따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맡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딴단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퇴근 시간 지난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서 따시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차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따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누끼란 제대로 따야지 따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따던 것을 퀵마스크로 전환해 픽셀을 보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펜툴을 이리저리 찍어보더니 다 됐다고 내 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누끼다.

퇴근시간을 놓치고 야근을 해야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누끼를 따 가지고 디자인이 될 턱이 없다. 클라이언트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상도덕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프리스비 내부를 바라보고 섰다. 그 때, 바라보고 섰는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노인다워 보였다. 부드러운 눈매와 흰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명시와 증오도 감쇄된 셈이다.

회사에 와서 누끼를 내놨더니 사수는 이쁘게 땄다고 야단이다. 자기가 딴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노인이 잘 따준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사수의 설명을 들어보면, 앵커 포인트가 너무 많으면 누끼가 각이 지게되고 베다가 나오기 쉽상이라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옛날부터 누끼는 올가미로 겉을 따고 지우개로 마무리를 하면 좀체 누끼를 찾아볼 수 가 없다. 그러나 요새는 마법봉을 써서 딴다. 금방 딴다. 그러나 깨끗하지가 못하다. 그렇지만 요새 남이 보지도 않는 것을 몇시간씩 걸려 가며 올가미 딸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시안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탬플릿은 얼마, 직접 디자인한 시안은 얼마, 값으로 구별했고, 구디구수(NDNE:Nine-Design, Nine-Edit)한 것은 세 배 이상 비싸다. '구디구수(NDNE)'란 아홉 번 디자인 하고 아홉번 수정 한 것이다. 눈으로 봐서는 다섯 번을 했는지 열 번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단지 말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 조차 없다. 어느 누가 클라이언트가 클레임 걸지도 않는데 아홉 번씩 디자인 하고 수정 할 이유도 없고, 또 그것을 믿고 세 배씩 값을 줄 사람도 없다. 옛날 사람들은 디자인은 디자인이요 생계는 생계지만, 누끼를 따는 그 순간만은 오직 아름다운 누끼를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디자인을 만들어 냈다.

이 누끼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젊은이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디자인이 만들어 질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삼겹살에 소주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야근하고 퇴근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프리스비 간판을 바라다 보았다. 커다란 아이패드 프로 끝에 애플펜슬이 꽂혀있었다. 아, 그때 그 노인이 저 펜슬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누끼를 따다가 손목이 나갈뻔한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 도연명(陶淵明)의 싯구가 새어 나왔다.

오늘, 회사에 출근했더니 후배가 Sketch와 Origami로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전에 브러쉬툴과 펜툴로 힘겹게 디자인 하던 생각이 난다. 포토샵을 킬때 나오던 눈깔을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포토샵 풀네임도 보기 힘들다. 문득 3-4년 전 누끼 따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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