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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관뚜껑의 행방...
게시물ID : history_254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그때그인간
추천 : 1
조회수 : 2516회
댓글수 : 19개
등록시간 : 2016/02/15 09:53:41
<매국노 이완용의 관 뚜껑은 어디로 사라졌나 >

이병도와 김창룡 이야기를 『시민의신문』에 4회에 걸쳐 연재하고 있던 2003년 5월 나는 잇따라 두 건의 제보를 받았다. 그것은 질곡의 현대사와 영욕을 함께 했던 이병도와 김창룡이라는 두 인물의 "반면교사로서의 진면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언과 사료였다. 익명의 제보자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보내온 「육군 소장 김창룡에 대한 태극 무공훈장 수여의 건 품의」(1955년 작성된 정부 문서)에 대한 소개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이병도와 관련된 이야기만 하기로 한다. 

나에게 제보를 한 주인공은 한 원로급 대학 교수였다. 내가 연재하고 있던 기사를 흥미롭게 보다가 전화를 걸었다는 그는 "실증사학의 대부로 알려진 이병도 박사가 친일 매국노의 대명사인 이완용의 조카 손자라는 사실을 아느냐"고 물은 뒤 다음과 같은 사연을 알려 주었다. 

"해방 직후 전북 익산 백성들이 이완용의 묘지를 파헤치고 관을 끄집어내 불태웠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불에 타다만 이완용 관 뚜껑을 보관하고 있던 한 주민이 이것을 원광대 박물관에 기증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병도 박사가 원광대를 찾아가 그 관 뚜껑을 역사 연구에 쓰겠다고 설득해서 가져간 뒤 개인적으로 없애버렸다고 한다. 믿을만한 역사학계 인사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인데,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보기 바란다." 

충격적인 내용의 제보였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할아버지의 실증사학 얘기는 역사를 올바르게 보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이건무 박물관장의 해명은 설자리를 잃게 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몇 번이나 강조한 대로 이병도는 실증사학의 대부로 알려진 역사학자다. 실증(實證)할 수 없다면 정사(正史)로 기록하지 말라는 사관(史觀)에 입각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BC 8세기 전 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학설을 주창했다. 물론 그런 주장은 일제시대 식민사관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으면서 수립된 측면이 강하다. 

그런데 그렇게도 실증사학을 강조했던 그가 정작 "가문의 수치"를 우려해 공사(公私)도 구분하지 못한 채 할아버지 뻘인 이완용의 관 뚜껑이라는 역사 유물을 태워버렸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제보의 사실 여부를 추적하던 중 누군가로부터 10여 년 전 『시사저널』에서 그런 기록을 본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 마침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는 『시사저널』 1992년 8월 27일자 기사(정희상 기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완용의 후손들은 잃어버린 과거의 권세와 민족의 손가락질을 견디기 어려웠는지 모른다. 지난 1979년 이완용의 증손 이석형 씨는 전북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 뒷산에 묻혀 있던 이완용과 이항구 부부의 묘를 직접 파헤쳐 화장시켜 버렸다. 

이완용의 관 뚜껑에는 붉은 페인트로 일본 정부가 부여한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이위대훈위 우봉이공지구(朝鮮總督府 中樞院 副議長 二位大勳位 牛峯李公之柩)"라 씌어 있었다. 이완용 부부의 관 뚜껑은 주민이 가져갔다가 원광대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그러나 원광대에는 이 관 뚜껑이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원광대 박물관장이었던 박순호 교수는 "소장 직후 이완용의 친척 되는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가 내려와 총장님을 설득해 관 뚜껑을 가져가 태워버렸다"고 밝혔다. 

애초의 제보 내용과는 약간 차이가 있긴 했지만, 그것은 역사학자 이병도가 쓰고 있던 위선의 가면을 벗겨내는 결정타가 되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가문의 수치" 숨기느라 역사 유물 불태운 실증사학자

한편 이완용과 관련된 역사 자료를 추적하던 중 나는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기록을 발견했다. 우봉 이씨 시조(始祖)인 이공정(李公靖)의 23대손인 이완용이 일제로부터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의 직책과 후작 작위를 받으면서 "잘 나가던" 시절에 "가문의 영광"을 위해 시조의 묘지를 찾아내 대대적으로 개축한 사실이 있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그 내용은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을 지낸 윤덕한의 역작 『이완용 평전』(중심)에 다음과 같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일당기사』(이완용 사망 다음 해인 1927년 그의 조카이자 비서인 김명수가 엮은 책, 일당은 이완용의 호)에 의하면 이공정의 분묘는 언제 없어졌는지도 모를 만큼 오래 전에 없어져 우봉 이씨 가문에서 그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완용이 죽기 1년 전인 1925년 5월경 황해도 장단군 소남면 지금리 서원동에 사는 문창업이라는 사람이 장단군 소남면 유덕리 마답동에서 이공정 묘의 지석을 발견해 이완용에게 들고 왔다. 

이완용은 사실 우봉 이씨가 생긴 이래 그 집안에서 배출된 수많은 인재 가운데서도 가장 출세한 인물이었다. 비록 매국노라는 손가락질은 받고 있었지만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을 3년 이상 지냈고 당시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으로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 시조의 묘 지석을 우연히 발견한 시골 촌부가 그것을 들고 이완용을 찾아온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지석은 죽은 사람의 이름과 출생 및 사망 일자, 행적, 무덤의 모양과 방향 등을 기록해 무덤 앞에 묻어둔 판석을 말한다.

이완용은 이 지석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6월 5일 우봉 이씨 종친 몇 명을 데리고 현장에 가서 직접 조사를 했다. 그 결과 이 지석이 이공정 분묘에서 나온 것임을 확신하고 이 사실을 전국의 모든 우봉 이씨 종친에게 통보한다. 이어 6월 28일 자신의 옥인동 저택에서 종친회의를 열어 이공정의 분묘를 개축하고 석물을 설치하기로 최종 결정한다. 결국 잃어버렸던 우봉 이씨 시조의 묘를 23대손인 매국노 이완용이 찾아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역사의 아이러니를 목도하게 된다. 할아버지(이완용)는 "가문의 영광"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쌓은 재물과 권력을 동원해 조상의 분묘를 화려하게 개축했지만, 손자(이병도)는 "가문의 수치"가 널리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부끄러운 조상의 분묘에서 나온 관 뚜껑을 없애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할아버지(이병도)는 일제가 역사왜곡을 위해 급조한 조선사편수회에서 부역한 전력을 가지고 있건만, 손자(이건무)는 할아버지가 창씨개명을 안 했으니 친일 논쟁은 부당하다고 강변하고.......... 
출처 http://buldog.sisain.co.kr/entry/%EC%9D%B4%EC%99%84%EC%9A%A9-%EA%B4%80%EB%9A%9C%EA%BB%91%EC%9D%98-%ED%96%89%EB%B0%A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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