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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
게시물ID : history_2537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그때그인간
추천 : 0
조회수 : 55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6/02/12 09:52:54

한자 李丙燾
영어음역 Yi Byeongdo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통정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양판석

일제 강점기 하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아버지는 이학수이고, 어머니는 이지항이다. 부인은 김병임이며,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다.

이병도(李丙燾)[1923~1991]는 1923년 5월 11일 하동군 양보면 통정리 347번지에서 태어났다. 1940년 11월 21일 일본군 배속 장교 겸 부산 병참 기지 사령관 노다이의 총지휘 아래 ‘경남 학도 연합 군사 대연습’이 있었다. 부산과 마산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경기관총과 38식 소총으로 무장시켜 동군(東軍)과 서군(西軍)으로 나누었는데, 동군에는 부산제2상업학교·부산중학교, 서군에는 동래중학교·마산중학교·진주농업고등학교·진주중학교가 편성되었다.

동군은 부산 구포역에서 하차하여 김해 방면으로 진격하고, 서군은 김해 진영역에서 하차한 뒤 김해 방면으로 진격하여 한림정 근처 김해평야에서 접전이 일어나는 양상의 모의 전투 훈련을 하였다. 이틀 간 진행된 야영 훈련부터 한국 학생들에게는 힘든 산지(山地)로 경로를 우회시키고 보급품도 적게 지급하는 등 차별 처사가 있었다.

훈련한 뒤인 11월 23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제2회 경남 학도 전력 증강 국방 경기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전년도 우승 학교인 동래중학교가 우승기를 들고 앞서 입장하는 것이 원칙인데 일본인 학교인 부산중학교를 선두 입장하게 하였다. 경기가 시작된 이후에도 한국 학생들이 1위를 하게 될 상황이면 일본인 심판이 트집을 잡아 다시 시합을 시켰고, 불리한 코스를 배정하는 것은 물론 이길 듯하면 반칙이라며 세워 놓고 아예 한참 후에 달리게 하였다.

‘심판의 판정은 신성하고 절대 불가침하다’며 부산중학교를 1위로 발표하고 우승기를 수여하자, “노다이 부정 심판이다. 우리가 승리자니 우승기를 내 놓으라”고 항의하면서 일장기 하강식 때 일본 국가 대신 「아리랑」과 「도라지」 등을 부르며 야유하였다. 곧이어 운동장은 학생들에 의해 항일 현장으로 바뀌어 일경과 헌병이 도주하고, 부산중학교 학생들은 경찰의 보호 아래 퇴장하였다.

1,000여 명의 학생들은 운동장 입구에서부터 거리 행진을 시작하여 금지곡을 부르며 시내 중심가로 진출하였다. 상급생들은 1, 2, 3학년을 귀가시키고, 오후 8시경 노다이 육군 대좌 사령관의 관사를 찾아갔으나 도피하고 없자 유리창과 외등을 깨트리고 귀가하였다. 이 사건으로 학생 200여 명이 경찰에 끌려가고 이병도를 비롯한 15명이 항일 지도 학생으로 구속되었다.

당시 이병도는 부산제2상업학교 5학년 대표이었기 때문에 주모자로 지목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하였고,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대구고등법원에 공소를 제기하여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었으나, 대구에서도 징역 8개월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41년 12월 15일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광복 후에는 초등학교 교사로 교육자의 삶을 살았으며, 1991년 11월 21일 별세하였다.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부인과 함께 안장되어 있다.

199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http://hadong.grandculture.net/Contents?local=hadong&dataType=01&contents_id=GC0340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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