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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에 대한 세가지 오해
게시물ID : history_2537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그때그인간
추천 : 2
조회수 : 991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6/02/12 09:42:33

터넷이 보편화 되면서 사람들의 생활이 이전에 비해 매우 편리해졌고, 특히 과거에는 아무나 쉽게 접해볼수 없었던 정보나 자료를 누구나 쉽게 열람 찾아볼수 있다는 이점이 생겼다. 하지만 이러한 편리함과는 반대로 인터넷을 통해 쉽사리 유포되는 루머나 미신(迷信)도 생각보다 많다.


 그 대표적인것 한두가지 정도를 꼽자면, 가령 1987년에 있었던 KAL 858 폭파사건이 안기부 조작이라는 이야기다. 80년대엔 그저 친북성향의 극렬 운동권 학생들이나 주장했던 이야기가 지금은 인터넷에 버젓이 심심찮게 유포되고 있는 현실이다. 또 한편으론 80년 5.18 당시 광주에 북한 특수군이 유입되었다는 루머도 최근엔 떠돌고 있다. 80년이라면 그 당시 광주는 물론 육해공의 경계도 철통같이 지켜지던 계엄령하였는데, 대체 북한 특수군 1개 대대가 무슨수로 광주에 투입될수 있었다는것인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누구나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이런 루머들은 인터넷에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을 통해 널리 유포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이러한 루머들은 대개 그 배후에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깔려있는 것들이라 유포되는 과정에서 왜곡과 과장 부정확한 사실들이 씨줄날줄로 뒤섞이고 혼합되어 그 왜곡의 정도가 점점 심해져 그야말로 미신(迷信)과 같은 상황이 되어버리고 만다. 인터넷에서 퍼지는 미신은 이와같은 정치문제에만 국한되어있지 않다. 가령 방송,연예가와 관련된 사실관계가 전혀 다른 루머도 적지않게 유포되고 있고 과학이나 종교와 관련된 루머도 꽤 많이 떠돌아 다니며 네티즌을 미혹케 하고 있다.


 역사분야도 이 문제에선 자유로울수가 없어 인터넷상에서 떠돌아다니고 있는 대표적 미신 하나를 더 이상 방치해둘수가 없어 외람되나마 필자가 총대를 메기로 했다. 이른바 한국 사학계의 거두(?)라는 이병도 교수가 친일파이며 우리나라 역사가 이병도 교수의 식민사학의 영향권하에 아직도 있다는 미신(迷信)이다. 사실 이 미신은 KAL 858 의혹설보다도 훨씬 뿌리가 깊다. 저 1980년대 이른바 환단고기류 서책들이 심심찮게 세상에 떠돌아다니기 시작하면서, 그때부터 이 환단고기를 추종하는 사람들로부터 나온 이야기가 바로 이병도와 관련된 루머이자 미신이다. 그 미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 사학계의 거두 이병도가 친일파며 그 이병도가 퍼트린 식민사학이 아직도 우리나라 사학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권 사학자들은 이병도가 무서워서 지금까지 그 누구도 제대로 반론 하나 제기한 사람이 없으며 (심지어 이병도의 뜻을 거스르면 논문 심사 통과도 잘 안시켜 준다는 등) 셋째로는 이병도가 죽기전에 쓰고간 참회문(?)이 있다는 것이다.


 이병도는 누구인가. 호는 두계(斗溪)로 1896년 태어나 일제치하인 1925년부터 27년까지 ‘조선사 편수회’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1934년 5월 민족주의자인 이상백,손진태,이희승등과 뜻을 모아 일제 식민사관에서 벗어나 ‘한국학자가 주도하고, 한국어로 한국역사를 가리치자’는 취지하에 ‘진단학회’를 결성했으며 해방후엔 ‘국사대관’을 저술했고, 이후에도 쭉 우리나라 사학계의 거목으로 자리잡았던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한국 사학계가 아직도 이병도의 영향권하에 있다는것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르고 퍼트리는 헛소문이다.


 1. 한국 사학계가 아직도 이병도의 영향권 하에 있다 ?


 우리나라 정통사학계에선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지만,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사실 한가지가 있다. 실은 우리나라 사학계에선 지금까지 두 번의 반역이 이루어졌다. 그 첫 번째가 1960년대 있었던 이기백 교수의 이병도에 대한 반역이고, 두 번째는 1990년대 이래 이루어지고 있는 이종욱 교수의 이기백 교수에 대한 반역이다.


 실은 이기백 교수가 바로 ‘우리나라 사학계에서 이병도 사학의 한계를 극복한 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기백 교수가 1967년 ‘한국사 신론’을 저술했을때 나온 평가다. 3,40대들은 아마 학창시절 국사교과서 뒷페이지 필히 쓰여져 있던 ‘이기백 감수’를 기억할 것이다. 바로 그 이기백 교수다. 그 시절 출간되는 국사교과서가 모두 이기백 교수의 감수를 거쳐 쓰여진 책이란 이야기다.


 무엇보다 이기백 교수는 남강 이승훈 선생의 종손이며 일제시대 농민운동을 한 밝맑 이찬갑 선생의 아들로 명백한 독립운동가 집안의 자손이다. 지금와 생각해보면 환빠들이 애초에 타겟으로 이병도를 잡았던것은 아마도 독립운동가 집안인 이기백 교수는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니까 상대적으로 의혹을 제기하기 쉬웠던 이병도를 타겟으로 잡아 매도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따라서 그 의도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매우 저열하고 괘씸하다.


 그리고 근래에 이루어지고 있는 또다른 반란이 바로 신라사 전문가인 이종욱 교수의 이기백 교수에 대한 도전이다. 현재 이종욱 교수는 ‘신라 정통론’을 주장하며 학계에 새로운 논란의 핵심으로 부상되고 있다. 흥미로운것은 애초에 이기백 교수가 이병도의 직계였고, 이종욱 또한 이기백의 직계였다는 점이다. 학문분야라는게 보통 상식적으로 제자가 스승의 논리를 뒤집는게 쉽지 않은일이란걸 생각해보면 이 두 가지 반역사건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따라서 한국 사학계가 아직도 이병도의 영향권하에 있으며 심지어 이병도가 무서워 제대로 반론을 제기하는 학자 하나 나오지 않았다는것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르고 하는 소리다. 무엇보다 이병도는 1989년 세상을 떠났는데, 죽은지 이미 20년이 되는 사람을 두려워 할 이유가 뭐가 있는가.


 2. 이병도가 무서워 아무도 반론을 제기 못한다 ?


 필자는 이병도가 1975년 저술한 ‘한국 고대사 연구’를 직접 구입 꼼꼼히 탐독해 본 사람이다. 그리고 발견한 사실이자 결론은 현재 한국 사학계는 이병도의 영향권하에 있기는 커녕 이미 멀어져도 한참 멀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선 첫 번째로 이병도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칠지도 문제에 대해 ‘한국과 일본 교류의 증거’라 주장했지만, 현재는 칠지도를 ‘백제 근초고왕이 일본에 하사한것’이라는게 이미 정설로 굳혀진지 오래다. 두 번째 그 유명한 풍납토성에 관한 이야기다.


 지난 1997년 1월 한국 고대사학계를 통째로 뒤흔든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바로 풍납토성 내부 발굴과정에서 그곳이 백제 왕성터임을 증명해주는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된 것이다. 백제 최초의 수도인 위례성의 위치가 어딜까. 이것은 풍납토성 발굴 이전까지 우리나라 사학계의 가장 큰 논란거리였다. 애초 1980년대엔 서울올림픽 준비과정과 관련 송파구 방이동 일대에 체육공원을 설치하려는게 정부의 방침이었다. 허나 그 과정에서 몽촌토성 유적이 다량으로 발굴되면서 정부방침은 ‘백제역사관’을 짓겠다로 바뀌었고, 이후 ‘몽촌토성’이 백제 첫 왕성일 가능성이 유력하게 제기되었다.


 허나 90년대에 들어 몽촌토성에 이어 풍납토성 유적에서 유물이 대거 발굴되면서 학계는 다시한번 고무되었고, 이후 백제 왕성터는 풍납토성 또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석촌동 고분군까지) 잇는 거대한 지역이란 설등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사실 풍납토성 발굴은 한국 고대사 연구에 있어 하나의 큰 분수령이 된 사건이기도 하다. 원래 그 이전까지는 ‘삼국사기 초창기 기록은 믿을수 없다’는 이병도의 학설이 좀처럼 반론을 제기하기 힘들어 깨트리기 어려운 주장이었고, 바로 이것이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다. 헌데 풍납토성 발굴 유물을 방사성 탄소로 측정해본 결과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시기와 거의 맞아떨어짐으로써 이때부터 ‘삼국사기 초창기 기록은 믿을수 없다’고 한 이병도의 학설이 깨지기 시작했고, 삼국사기 초창기 기록이 믿을만 하다는 학계의 믿음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1975년 발간된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이병도는 ‘풍납토성터’와 관련 풍납동이 상습침수지역이고 (바로 해마다 장마철이 되면 관련 속보에 오르내리던 그 풍납동 아니던가) 게다가 수도 입지조건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과도 맞지 않는다며 풍납토성터는 ‘왕성 가능성이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매우 야릇한 미소를 지어가며 읽어보았다. - 사실 배산임수가 결국 풍수지리학적 개념임을 감안한다면 2천여년전 마한 54개 부족국가중 하나일 뿐인 소국가 백제를 세운 온조세력에게 그와같은 개념이 존재했을리 만무하지 않는가.


 사실 작금의 풍납토성 문제를 보면 오히려 이병도의 천동설을 깼다는 기쁨(!) 때문인지 풍납토성(또는 몽촌토성등을 포함한 그 일대)을 너무 성급히 백제 왕성으로 정의내린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는것이 사실이다. 실제 아직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일부 있기는 하다. 요지는 왕성으로 보기엔 규모가 너무 작다는 것인데, 솔직히 풍납토성,몽촌토성을 비롯한 그 당시 보다 정확한 왕성규모를 알아낸다는것은 작금의 송파,잠실 일대 아파트단지 밑바닥을 전부 뜯어내 확인해보기 전엔 불가능한것 아닌가.


 세 번째로 저 유명한 일본의 ‘임나일본부’설과 관련된 광개토태왕릉비에 대한 이야기다. 한때 일본이 ‘광개토태왕릉비’를 날조했다는 설(設)이 꽤 오랫동안 나돌았었고, 이는 역시 일본이 태왕릉비문을 근거로 삼국시대 한반도에 일본의 고대국가가 존재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것과 관련이 있다. 한편 ‘한국 고대사 연구’에선 이병도는 이 날조설에 대한 확인은 안타깝지만 훗날로 미루는것이 좋겠다 언급하고 있다.


 사실 이건 당연한 이야기다. 우선 ‘한국 고대사 연구’가 출간된게 1975년이다. 이때는 냉전시대고 중국은 공산국가였을때다. 하물며 이때 누가 감히 대놓고 직접 중국까지 가서 태왕릉비문을 확인해보고 오자는 주장을 할 수 있겠는가. 이때는 아마  태왕릉비 날조설이 일본의 임나일본부설 주장과 관련 심심찮게 나돌고 있었을것이고, 이병도는 그 부분에 대한 입장을 그와같이 피력한 것이다. 지금이야 냉전이 끝난지 어언 20년 이상이 지났고, 중국과 수교한지도 그 정도의 시간이 흘렀으니 누구나 자유롭게 중국에 다녀올수 있고, 따라서 우리측 판독문도 인터넷에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구해볼수 있으나, 이때(70년대)는 일제시대 일본의 판독문 외엔 돌아다니고 있는게 없었을것이고, 그로인한 답답한 심경은 정통사학계건 재야건 누구나 다 마찬가지였을것이다.


 참고로 신묘년 백잔임OO라 운운한 기사와 관련 백제사 전문가 이도학 교수등이 근래에 내놓은 새로운 해석은 다음과 같다.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으므로 이때까지 조공을 해 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 이래로 건너오자, (고구려가) 매번 격파했으므로, 백제는 (배반하여) 신라를 (침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광개토태왕비문은 태왕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만든 비문으로, 여기서 병자년 백제 대원정과 관련한 신묘년 기사는 어디까지나 백제 침략을 위한고구려의 명분이요 구실일 뿐이다.


 한편 ‘한국 고대사 연구’의 광개토태왕에 대한 고찰(考察) 부분에선 흥미로운 구절이 하나 눈에 뜨인다. 이병도는 광개토대왕에 관한 고찰에서 그의 후연등에 대한 경략에 대해 이와같이 평가했다. ‘요하 이동의 땅은 완전히 또 영구히 고구려의 소유한 바가 되었으니, 저 옛날 중국 육국(六國)의 연(燕)이 고조선 땅을 침략하여 요동군을 설치한 이래, 약 6,7세기 동안 그곳이 외족(外族)들의 지배 또는 침략의 대상이 되어왔다가 이제 완전히 고구려의 소유로 돌아오고 말았다. ’


 잠깐 ! 그런데 이거 어째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같지 않은가. 소위 재야사학 또는 환빠들은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칭송할 때 고구려의 정신이 옛 고토(故土)의 회복인 다물(多勿)정신이요, 다물사상이었으며 그것은 바로 (중국에 빼앗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자는 정신이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리고 바로 그 고조선의 옛 땅을 모두 회복한것이 광개토태왕때에 이르러서였다고 말했다.


 가만, 그렇다면 이것은 둘 다 똑같은 이야기가 되지 않는가 ? 이병도는 태왕의 후연 경략의 의의를 고조선 옛 땅 회복이라 말했고, 환빠들도 태왕의 업적이 고구려 다물정신(옛 고조선땅 회복)을 이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니 사실 이 두가지는 똑같은 이야기다. 서로 똑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엉뚱하게 이병도를 식민사학자라 매도해온 것이다. 물론 고조선 또는 고구려의 실 지배지가 어디까지였는가가 중요한 핵심 논란사항이긴 하지만.


 네 번째로 알아두어야 할 문제가 우리나라 사학계가 아직도 이병도의 영향권하에 있고, 이병도가 무서워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시대상황의 변화를 전혀 고려(考慮), 인지(認知)하지 못한채 떠들고 있는 헛소리다.


 작금의 인문학계 변화의 경향이 대개 그러하지만 사학계 역시 현재는 80년대 대학을 다닌 486 그룹이 차츰 사학계의 주류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 개인적으로 안타깝긴 하지만 시절의 그와같이 변한것을 어쩌란 말인가 - 헌데 현재의 진보성향의 486 사학자들이 아직도 이병도 영향권하에 있고 이병도가 무서워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다고 ? 상식적으로 그 사람들이 이병도가 친일파고 식민 사학자라면 그냥 놔둘 사람들인가 ? 차라리 ‘현재의 사학계 주류는 모두 80년대 대학을 다닌 친**파 운동권 출신이라 환단고기를 인정하려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그게 훨씬 설득력 있을것 같다.


 3. 이병도의 참회문 ???


 또 한가지 마지막으로 이병도에 관한 루머 한가지를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수년전부터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이병도가 죽기전에 자기 죄를 참회하고 갔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근거가 되는 참회문은 모 신문에 이병도가 기고한 기고문이다.


 헌데 사실 참회문 운운 하는데서부터 종교적 냄새가 폴폴 풍겨 의심이 가기도 하지만, 일단 학문연구적 관점에서 참회문이란 의미를 곱씹어본다면 결국 자신의 과거 연구발표가 오류였음을 시인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아니면 자신이 지금까지 숨겨놓고 은폐해왔던 무슨 중대한 역사의 비밀(예를 들자면 환단고기 같은것)이라도 있다는 소리일까 ?)


 우선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소위 이병도의 참회문은 1986년 10월 9일에 이병도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특별 기고문이다. 그리고 이 글은 ‘단군제사가 일제때 끊겼다’는 대 제목하에 단군은 신화아닌 우리 국조라는 내용의 글이다. 우선 필자는 이 글이 이병도의 과거 연구와 어떻게 다른것인지 ‘한국 고대사 연구’의 단군조선(檀君朝鮮)에 관한 고찰(考察) 부분과 면밀히 비교분석 해봤다.


 일단 조선일보 기고문과 한국 고대사 연구의 단군조선 부분 그 두편의 긴 글을 모두 다 소개할수는 없는 글이고 간단하게 요약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조선일보 기고문을 요약하자면 가령 ‘서낭당의 어원은 천왕당’이라던가 ‘상달은 수리달’ 등등 단군신화와 관련된 어원 분석. 그리고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 언급한 소위 고기(古記 : 옛 기록)에 대한 언급 및 면밀 비교분석 그리고 아사달 위치비정과 그리고 단군이 실재했음을 증명하며, 그 제사가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져왔으나 일제때 끊겼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결국 다시 이야기하자면 단군조선이 실존했으며 단군도 신화속 존재가 아니고 그 제사가 조선시대에까지 이어내려왔으나 일제때 끊겼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이병도의 연구결과인 셈이다.


 그렇다면 ‘한국 고대사 연구’에 실린 단군조선 고찰 부분은 어떤 내용일까. 요약하자면 우선 단군이 신화가 아닌 실재했으며 이를 부정하는것이 잘못된 일이라 분명히 못박으며 글이 시작되고 있고, 삼국유사 및 제왕운기에 실린 내용들을 면밀 분석해가고 있다. 그리고 우선 단군신화의 설화유형을 다른 민족,국가의 설화유형 사례들과 비교 분석해가며 환웅 및 웅녀등의 설화 유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단군에 대해 정치적 수장보다는 제사장의 의미가 더 크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즉, 어떻게 해서든 단군이 실존(實存)했음을 증명하고자 애쓰고 있는 글이다.


 이어 나오는 단군의 도읍 아사달의 위치 문제는 글자그대로 아사달의 위치에 대한 이병도의 연구내용이고, 86년 조선일보 기고문과 비교하자면 눈길가는것이 아사달의 평양설,구월산설등 여러 설등을 소개하는 가운데에서도 단군 제사가 고려조에까지 이어져 내려왔음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한국 고대사 연구’는 근본적으로 1975년에 나온 책으로 86년 기고문과 10년 세월의 차이가 있다. 헌데 중요한것은 여기서 이병도의 연구주제인 첫째 단군은 실존했는가 둘째 아사달의 위치는 과연 어디인가 그리고 셋째로 단군의 제사가 언제까지 이어져 내려왔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큰 줄거리는 크게 변한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75년 당시엔 이병도의 단군조선 연구가 아직 ‘진행형’이었던 것이고 86년의 ‘특별기고문’은 그와같은 단군조선 연구의 결정판이 되는 것이다. (이후 이병도는 1989년 사망)


 ‘한국 고대사 연구’와 86년 기고문에 약간 차이가 있는것이 있긴 한데 그것이 아사달 위치에 대한 이병도의 입장 변화다. ‘한국 고대사 연구’에선 이병도는 아사달 위치를 평양이거나 그 인근일 것이라 했으나 조선일보 기고문에선 다른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정도수준의 입장변화는 학문 연구과정에서 얼마든지 있을수 있는 일이다.


 중요한것은 과연 이병도가 단군과 고조선을 부정한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다. 환빠들이 조선일보 기고문을 참회문 운운 하는것은 결국 자신들이 주장하는것이 맞다는 소리를 하기 위함 아닌가. 물론 이병도야 환단고기에 대해선 생전 단 한번도 언급한적이 없다. 그러나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선 그 실존여부를 꾸준히 증명하고자 노력해온 사람임이 두 개의 글 비교과정에서 확인된다.


 이병도의 단군과 고조선 연구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 이를 알자면 결국 1948년에 세상에 나온 그의 ‘국사대관’을 봐야 확인이 가능할것이나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거기까진 구해보지 못했고, 다만 57년 국사대관을 소장하고 있다는 인터넷 블로거로부터 단군과 고조선 관련 부분에 한해서만 대충 그 내용을 접해볼수 있었다.


 증언에 의하면 이병도는 57년 국사대관에도 단군과 고조선이 실존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결국 이병도의 단군과 고조선 연구는 그 이전부터 이미 시작되어 ‘한국 고대사 연구’를 세상에 내어놓을 75년 당시엔 아직 ‘진행형’이었고 86년 조선일보 기고문이 결정판이 되는것이다. 그리고 그 연구과정에서 사소한 입장변화나 새롭게 발견한 사실등은 있을지언정 핵심 연구과제의 그 큰 줄거리는 변한것이 없다.


 실제 ‘한국 고대사 연구’ 서문에서도 이병도는 ‘이전에 연구했던것들중 서술방식이나 지엽적 문제에 대해 수정할 부분이 있고, 새로 보충할 내용들도 많아서’ 새 책을 내게 되었다고 밝힌바 있다. 아마도 ‘한국 고대사 연구’에 실린 한사군이라던가 고구려,백제,신라등 삼국시대 또는 그 이전의 부여나 옥저,동예,가야등 고대국가 문제등에 대해서도 ‘수정하거나 보충할 부분’은 많았으리라.


 결국 이병도의 한국 고대사에 관한 연구중 단군과 고조선 문제에 관해 이병도가 중점을 두고 연구,증명하려 애쓴 부분은 결국 단군과 고조선의 실존(實存)여부 그리고 아사달의 위치에 대해서이며, 그 연구과정에서 단군에 관한 제사가 고려는 물론 조선에까지 이어진것을 확인한것이고 1986년 그 단군제사가 일제(日帝)에 의해 끊겼다고 결론을 내린것이다.


 따라서 소위 환빠나 재야사학계에서 이병도의 참회문 운운하며 인터넷에 유포하고 있는 86년 10월 조선일보에 낸 이병도의 기고문에 대해선 정작 정통사학계의 역사학자,역사학도들은 ‘이병도가 제 잘났다고 자랑한 글에 불과’하다며 냉소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진보성향의 역사학도(역사매니아)는 ‘이병도야말로 진정한 국수주의자 아닌가’하며 황망해하기까지 했다.


 4. 현재 고대사학계의 거두는  - 고구려 노태돈, 백제 이도학, 신라 이종욱


 학문이란 것이 원래 근본적으로 한 학자가 자신의 평생을 걸고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로 그 학자만의 아집이나 자기 연구성과에 대한 자부심, 또는 권위의식 같은것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나라 역사학계라고 해서 그와같은 경향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며, 필자만해도 이런저런 역사카페에서 활동하면서 그러한 권위의식에서 우러나는 분위기 때문에 종종 위압감을 느껴본적도 있다.


 하지만 다른것은 몰라도 우리나라 역사학이 소위 식민사학자(?)라는 이병도의 영향권하에 있으며, 이병도가 무서워 아무도 반론을 제기 못한다는식의 환빠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과 다른 거짓선동이다. 오히려 현재 우리나라 사학계는 독립운동가 집안의 자손이며 바로 이병도 사학의 한계를 극복한 학자라 평가받는 이기백 사학의 영향권하에 있다고 보는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 고대사학계에서 권위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이들이 있을까 ?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에 대해 알아보는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것 같다. 요즘 보통 고대사학계의 거두로 평가받는 사람으로는 고구려는 노태돈, 백제 이도학, 신라 이종욱으로 불리고 있다.


 이중 신라사 전문가인 이종욱 교수(1946년생. 서강대 총장)의 경우는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신라정통론’을 주장하며 이기백 교수의 학설까지 뒤엎은 사람이니, 당연히 이병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며, 백제사 전문가인 이도학 교수(1957년생. 한국 전통문화학교 교수등 역임)의 경우는 역사스페셜 같은 TV 프로그램 인터뷰에도 자주나와 대중적으로 친숙한 사람이기도 하며 역시 이병도 학설에선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다. 고구려사 전문가인 노태돈 교수(1943년생. 서울대 역사연구소장) 역시 그의 저서 ‘단군과 고조선사’를 살펴본 결과 이병도와는 관점이 많이 다름을 알 수 있었다.


 5. 맺는말


 이병도에 관해 인터넷과 일반인들 사이에 잘못 알려진 사실관계를 규명하려다가 뜻밖에 글이 길고 장황해지는 바람에, 아무래도 결말 맺는 말을 조금은 덧붙여야 할 것 같다. 필자가 늘 하는 이야기지만 현재 한국사회에서 민족문제를 논하기엔 이것이 역사,종교,정치,이념등의 문제가 굉장히 복잡하게 얼키고 설켜버려 상황이 매우 복잡하고 난감하게 되어버렸다.


 어찌되었거나 우리나라 정통사학계를 많이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소위 ‘환단고기’는 그 전승과정과 세상에 공개되는 과정 - 필사가 되었든 산에서 얻었든 그 외 무엇이 어찌되었든간에 - 에 결국 민족주의 계열 종교단체와 인사들이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것 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다시 이 글에서 이 문제를 깊이있게 풀어나갔다간 어디까지 또 이야기를 진행시켜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하고 다만 환단고기라던가 규원사화 또는 이유립이나 계연수등에 대한 정보는 그래도 ‘위키백과’에 현재 객관적으로 수록되어 있으니 이를 참조 바란다.


 역사를 흔히 어제를 돌이켜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말한다. 또 마르크시즘의 영향을 받은 어떤 지식인은 역사를 배우는 이유에 대해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여 인간의 미래에 대한 진보를 이루기 위함’이라고 했다. 어느쪽이 되었든 결국 역사의 역할은 어제를 돌이켜 오늘과 내일의 지표를 삼는 등대가 되는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그 어떤 정치적 또는 종교적 목적에 의해 이용되는 이용물이 되어서는 매우 곤란한 것이다. 헌데 유감스럽게도 현재 우리사회엔 역사를 자신들의 종교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 그것이 진짜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이병도의 ‘한국 고대사 연구’를 꼼꼼히 읽어본 필자는 이병도가 식민사학자인가 민족사학자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선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환빠들은 앞으로도 이병도를 계속 식민사학의 거두라 매도하며 우리나라 사학계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도구로 삼을것이고, 다만 한가지 참고로 알아둘 필요가 있어서 덧붙이는 사항은 오히려 486 지식인중엔 이병도의 역사관이 ‘너무 민족주의적’이라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는것 정도는 알아두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분명한 사실은 현재 우리나라 사학계가 아직도 이병도의 영향권하에 있다는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오히려 우리나라 사학계는 이병도보다는 이기백 교수의 영향권하에 보는것이 정확할것이다. 그리고 이병도 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달려온것 또한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학계였다는 점도 분명히 알아두었으면 좋겠다.

[출처] 이병도에 대한 세가지 오해|작성자 훼드라

출처 http://blog.naver.com/whaedra/22058014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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