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전후삼한고
게시물ID : history_253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ayDream2017
추천 : 1
조회수 : 1819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6/02/10 22:06:20
옵션
  • 펌글
님들이 하도 제가 올린 자료가 위서라고 무시하고, 저보고 환빠라고 놀려서 이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제가 위만을 조선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고 저보고 동북공정을 주장하는 자라고 말씀하셔서 답답한 마음에 이 글을 올리려고 합니다. 혹시 신채호 선생님도 환빠라고 하지는 않겠지요?

前後 三韓考[편집]

1. 인용서의 선택[편집]

1.1. 인용서의 진위 변별[편집]

아직 지중 발굴이나 고적 탐사나 고물 연구 같은데 지식과 기구가 모두 부족한 우리로서는 우리 고사를 연구하려면 오직 고인의 끼친 서적으로 자료삼을 뿐인 것은 물론이다. 서적이라면 우리의 것뿐 아니라 隣國의 것도 가하며, 往代의 소위 正史라는 것보다도 혹 신화 소설 妖談 잡서에서 직접 혹 간접으로 사적 가치를 더 얻는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는 선택할 줄을 안 연후의 일이라, 어찌 아무 변명도 없이 조선에 관한 기재만 있으면 산해경이나 죽서기년이나 抱朴子나 博物誌같은 것을 가치를 묻지 않고 인용하며, 후인의 위조라고 擧世가 다 말하는 堯典과 禹貢의 嵎夷니 島夷니 하는 것을 가져다가 4,5천년전 조선사의 한 페이지를 채우려 함은 또한 가소한 일이 아니냐. 페리클레스의 무록에 의하여 아테네는 매양 스파르타를 이긴 줄로 알며, 기원 390년 카리 병화 이후의 로미인이 추록한 로마 고사에 의하여 고 로마의 연대 사적등을 믿으면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고사를 논술함에 먼저 인용서의 가치를 성찰할 것이다.

1.2. 조선 고사의 殘缺[편집]

조선 최고의 사적을 神誌秘詞라 한다. 신지를 혹은 인명이라 하며 혹은 서명이라 하나, 졸견으로는 신지는 본래 고대의 관명, 삼한사의 臣智 곧 “신치”니 역대 신치의 신수두 祭日의 致語를 모은 것이 있었던가 하니, 그 全書가 남아 있으면 혹 조선의 호메로스 시편이 될는지도 모를 것이나, 불행히 신지의 것이라고는 참 것인지 거짓 것인지도 모를 震壇九變圖(진단구변도)란 이름이 大東韻海(대동운해)에 보이며, 비사 10구가 고려사에 보이며 그밖에는 유락된 3구가 전할 뿐이요, 고구려의 국초 유기 백권이니, 이문진의 신집 5권이니, 백제 고흥의 서기니, 신라 거칠부의 국사니 하는 것까지도 그 서명만 우리 귀에 남아 전하고 그 1자도 인간에 유락하지 못하였다. 그리 된 원인은 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일 대사건에 약론하겠지만 어디 우리 조선의 사학계와 같이 白沙地(백사지)된 사회가 있으랴. 그러면 우리가 무슨 서적에 의하여 고사를 말할까

1.3. 지나 사가의 조선에 관한 기록[편집]

인국의 서적에서 탐색한다 하자. 고대 우리의 인국 가운데 남의 일까지 적어줄 만한 문화를 가진 나라가 오직 지나뿐이요 지나의 信史(신사)를 찾으려면 사마천에게 第一指를 屈할 터이나, 그러나 사마천은 충실하게 원방 외국인 이집트 바빌론의 역사를 채록하던 희랍의 헤로도투스 같은 사가가 아니요, 즉 공자 춘추의 尊華攘夷, 詳內略外, 爲國諱恥 등의 주의를 견수하던 頑儒라. 그러므로 조선을 중국의 일부인 浙江지방과 等視하여 사기에 朝鮮兩越을 合傳하며, 또 그 조선전이란 것이 조선사가 아니요 다만 연 제 流寇의 수령 위만이 조선을 침략한 기록일 뿐이며 조선의 연과 전쟁한 대 사실 같은 것도 흉노전에 동호란 이름아래 기록하여, 만일 위략이 아니면 조선의 일도 알 수도 없게 되었다. 반고 한서의 조선에 관한 기록은 사기의 것을 초습했을 뿐이며, 범엽 후한서의 조선에 관한 기록—동이전—은 삼국지의 것을 초습한 중 거기다가 妄改한 것이라(제3절에 상론). 만일 조선사의 재료될 가치가 있는 자를 구하면 양서의 것은 모두 털끝마한 가치가 없고, 오직 曹魏末 西晉初의 사가의 저작인 진수의 삼국지는 부여 고구려 등의 관제 풍속과 삼한 70여개국의 국명과 기타 모든 것을 약술하여 중국사 중에 附見한 조선 기록의 가장 칭찬할 것이며 진수와 동시대인인 왕침의 위서에는 단군의 이름 왕검을 적었으며 어환의 위략에는 대부례, 조선왕 부, 조선왕 준의 약사를 적어서 근세의 동국통감, 조선사략 등에 보인 기부 기준 삼한 78국 명 등이 모두 피등의 끼친 이삭을 주운 것이다. 위서와 위략은 이제 망실하여 겨우 일연의 삼국유사와 배송지의 삼국지 주에 인용한 것이 여존하였을 뿐이니 어찌 가석하지 않은가.

1.4. 조선인의 기록으로 지나사책에 초록된 삼국지의 조선 사실

삼국지의 부여 고구려 삼한 등 傳에 使者는 “사리”요, 沛者는 “부리”요, 對盧는 “마리”요, 樂浪은 “펴라”요, 구야(狗邪)는 “가라”요 , 안야(安邪)는 “아라”니, 이는 다 한자의 음의 초성이나 뜻의 초성을 가져다가 쓴 삼국시대의 이두문이요, 漢人의 自譯이 아닌즉, 이것이 모두 魏將 관구검이 환도성에 入寇하였을 때 고구려의 기록, 혹 전설을 가져다 전한 것이 있어서 삼국지, 위서, 위략 등 저자가 진귀한 조선사의 자료를 가졌던 것인가 한다. 다만 피등이 조선 본위의 조선사를 짓지 않고 중국사 四夷傳 가운데 부록하는 조선사를 지었은즉 그 채위한 바가 자연 소략하였을 것이다.

1.5. 삼국지의 조선에 관한 기록 전부를 신용할 수 없는 조건

그러한즉 삼국지 등서 중에 있는 부여 삼한전 등을 곧 고구려 사관의 기록과 같이 보아 진귀품으로 사랑함이 가하나, 순전히 그렇게만 여길 수 없는 것은 1) 피등이 또한 중화인인고로 역대 중화 사사가의 타국에 대한 병적 심리를 가져서 그 기록 중에 비사실의 誣錄을 끼웠으니, 예를 들면 위략에 대진(大秦: 羅馬)의 秦자에 부회(傅會)하여 백색인종인 대진인을 중국인의 자손이라 하며, 진한(辰韓)의 辰자 음에 맞추어 진한은 秦人—진시황의 진—이 秦의 長城役을 피하여 동천한 자라 하여 이와 같은 망설이 적지 않으니 피등을 偏信하다가는 그 欺弄의 붓에 속을 뿐이며, 2) 당 태종이 고의로 고구려를 침랴하려 할새 自家臣民의 고구려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중국 고서에 보인 조선에 관한 문자를 거의 다 塗改한 의심이 없지 아니하니, 이는 평양패수고에 상론한 바이어니와, 조선사상 소위 삼한 사군의 訟案의 분분한 것은 당 태종의 도개한 서적을 그대로 준신함이 또한 한 원인이 되며, 3) 倒字, 오자, 漏字, 疊字 등이 많음이니, 예를 들어보이면 삼국지의 本列傳 序에 “窮追極遠踰烏丸骨都”라 하였으나 고구려에는 오골성과 환도성은 있었지마는 오환성과 골도성은 없은즉, 대개 상문의 烏丸傳이 있음을 인하여 骨, 丸 양 자를 倒換하여 烏骨丸都를 烏丸骨都라 한 것이며, 馬韓傳에 臣智惑加優呼臣雲遣支라 하였으나 臣의 음은 신이니 臣蘇塗, 臣濆活 등의 臣과 辰韓, 辰王 등의 辰과 같이 모두 太의 뜻이요 遣支는 “크치”라 그 뜻이 大兄이니 “신크치”는 곧 太大兄인즉, 臣雲遣支의 雲자는 곧 下文의 臣雲新國의 雲자를 첩사하여 臣遣支를 臣雲遣支라 한 것이며, 辰韓弁辰傳의 진변 24국내에 軍彌馬延 양국을 첩사하여 26국이 되었으니, 이상의 것은 다 상문 하문에 의하여 발견할 수 있는 것이거니와, 이외에 발견할 수 없이 된 訛, 誤, 倒, 漏된 자도 적지 아니할 것이라. 이것도 연구상 일대장애라 할 것이다.

1.6. 삼한에 관한 기록

삼한은 역래 사가의 논쟁되어 오는 제문제 중 하나인 동시에 또한 가장 중용한 문제, 가장 곤란한 문제라. 이제 1) 서적을 선택하여 先儒와 近人의 韓 혹 朝鮮 등 字의 보인 글이면 모두 인용서로 보는 폐를 제하며 2) 선택한 서적 중에서 다시 그 眞妄을 분간하여 일반 誣錄을 辨正한 결과 삼국지 위략 등으로 主하며, 사기의 흉노전 봉선서 조선열전으로 副하며 국어 관자 등으로 輔하여 연구의 자료를 삼아서 전후 삼한고를 논술하려 한다.

2. 前 三韓三 朝鮮의 전말[편집]

2.1. 삼한의 所自出[편집]

한구암 선생이 한강의 남북을 갈라 그 북은 조선이 되며 4군이 되며 고구려가 되고, 그 남은 삼한이 되며 신라 가라 백제 등 3국이 되었다고 주장한 후, 후래 학자가 靡然風從하여 이의가 없었으나, 구암 이후 삼한만 삼한으로 알고 전 삼한이 있음을 모르므로 이와 같은 실착이 있는 것이다. 무슨 증거로 전 삼한이 있다 하는가.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 원년에 “先是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是爲辰韓六部”라 하고 38년에 “自辰韓遺民…無不畏懷”라 하고, 위략 삼한전에 “辰韓…爲流離之人故爲馬韓所制”라 하고, 삼국지 삼한전에는 “辰韓在馬韓之東其耆老傳世自言 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라 하니, 避秦役 3자는 이미 전절에 그 위증됨을 변정하였거니와, 기술한 바 신라본기와 삼한전의 말을 대조하여 보면, 진한은 원래 북방에서 천래하여 마한의 할지를 받아 우거한 자이며, 삼한전에 변한은 없고 변진만 있으니 이것은 변한 진한 양국의 유민이 遷來한 자가 함께 잡거하여 득명한 明證이니, 그러면 진 변 양한의 이주민이 있기전에 경상 좌우도가 모두 마한의 땅이었음을 볼지니, 그러면 진변 양 한의 본토는 타지에서 구함이 가한 것이다.

2.2. 삼한은 곧 삼조선[편집]

전 삼한의 역사를 말하려면 먼저 조선이란 의의와 삼조선의 내력을 밝힐 필요가 있다. 1) 조선에 대하여 김학봉의 朝日鮮明, 여지승람의 東表日出, 안순암의 鮮卑山東 등 각종의 해석이 있으나, 이는 곧 中京의 뜻인 가우리로 입명한 고려를 山高水麗의 뜻으로 해석한 것 같은 후세 문사의 傅會요 본의가 아니다. 관자에 八千里之發朝鮮, 發朝鮮不朝, 發朝鮮之文皮의 等語가 있고, 사기와 大戴禮에 發肅愼이 곧 발조선인 동시에 조선과 숙신의 동일한 명사가 양 종의 역이 됨이 명백한데, 견륭제의 만주원류고에 숙신의 본음을 珠申이라 하였으니, 그러면 조선의 음도 주신이요 管境의 뜻이 됨이 명백하며, 2) 삼조선은 고려사에 단군 기자 위만을 삼조선이라 하였으나, 이는 역대를 구별하기 위하여 가설한 삼조선이나 流寇首領의 위만이 역대의 하나됨이 가소한 일이거니와, 이밖에 따로 實有한 조선이 있으니, 사기 조선열전에 始全燕時에 甞略屬眞番朝鮮이라 한 바, 서광이 가로되 眞番은 一作 眞莫이라 하고, 색은에는 진번을 2국으로 證하였으니, 그러면 진막도 2국이니 진과 번과 막이 곧 3조선이니, 중국인이 타국의 명사를 쓸 때에 매양 文從字順을 구하여 장단을 임의로 하는 폐가 있으므로 (불경의 역에 比類가 더욱 많은), 진 번 막 조선이라 쓰지 않고 혹 莫자를 去하여 진번조선이라 하고, 혹 번자를 거하여 진막조선이라 함이니, 이것이 이른바 진 번 막 3조선이니 眞番莫은 곧 辰弁馬요 삼한의 韓은 大의 뜻과 제일의 뜻으로 왕의 명칭이 된것이니, 건륭의 이른바 韓은 관명이요 국명이 아니라 함이 近可한 해석이다.

眞番莫이나 辰弁馬는 모두 ‘신’ ‘불’ ‘말’로 讀할 것이니, 진번막 삼조선은 箕準南遷 이전 북방에 있던 전 삼한이니 진번막 삼조선은 신 불 말 三國의 뜻이요, 진 변 마 삼한은 신 불 말 三王의 뜻이라. 다 같이 신 불 말의 譯일 것이면 어찌하여 하나는 진번막이 되고 또 하나는 진변마가 되었는가. 이는 이두문 초창시대에 면치 못할 일이라. 다같이 신라 본기에 보인 쇠뿔한이지만 舒弗邯, 舒發翰, 角干의 딴 자를 쓰게 되었으며, 다같이 고구려말 “마리”지만 對盧, 莫離支의 딴 자를 쓰게 되었으니, 만일 職官志에 角干 一名 舒弗邯 又名 舒發翰이란 기록이 없으면 어찌 각간의 角이 羊角, 鹿角, 獐角 등의 각이 아니고 오직 牛角인 쇠뿔의 뜻인 것을 알 수 있으며, 만일 김유신전에 연개소문을 大對盧라 한 문자가 있는 동시에 고구려 고기에 개소문 대막리지라 한 문자가 있지 아니하면 어찌 對盧의 對의 “마차”의 초성을 찾아서 對盧가 莫離支와 동일하게 “마려”로 발음되는 줄을 알 것이냐. 동일한 신라본기와 삼국 고기로도 이와 같은 착잡이 있거든 하물며 6백 년 전 진개가 入寇하였을 때 얻어 전한 前三韓의 이름 신 불 말이 燕國의 史記로부터 사마천의 사기에 옮기어 眞番莫이 되고, 6백년 후 관구검이 입구하였을 때 주워간 後三韓의 이름 신 불 말이 辰弁馬가 됨이야 무슨 기괴하게 여길 것이 있으랴. 관자의 발조선은 삼조선 중의 번조선일 것이며, 설문의 樂浪番國도 번조선일 것이며, 대조영의 국호인 震은 辰韓이나 辰國의 辰에서, 궁예의 국호 摩震은 마한 진한에서 取義함일 것이며, 송서에서는 辰韓 馬韓을 秦韓 慕韓이라 하여 그 취용한 한자가 서로 같지 아니하니, 이와 같은 것은 매양 연혁으로부터 명의를 찾을 것이다.

2.3. 前三韓의 명칭[편집]

삼조선의 명칭은 三京에서 비롯한 것이니, 三京은 고려사와 신지비사에 보인 扶蘇樑, 五德地, 百牙岡이니, 이른바 단군 삼경이 이것이요, 삼경은 조선 고대 종교의 대상인 삼신으로 말미암아 설시한 것이니 삼신은 곧 고기에 보인바 桓因, 桓雄, 王儉 등 삼신이다. 다만 그 고기가 불교도의 撰集한 바이므로 迦瑟羅(가슬라)를 迦葉原(가섭원)으로, 毗處王(비처왕)을 炤智王(소지왕)으로, 기타 모든 명사를 佛書의 것으로 妄改(망개)하듯이 환인 환웅의 양 명사는 법화경의 석제환인이나 석가의 별명인 大雄에 맞추어 개작한 이름이요 본래의 명칭은 아니다.

사기 封禪書에 “三一神者天一地一太一……三一之中太一最貴……五帝者太一之佐[26]”라 하니 천일, 지일, 태일은 곧 삼신의 별명이며, 屈原의 九歌에 東皇太一이란 가명이 있은즉 태일 등 삼신의 명이 사마천 이전부터 중국에 유행되었음을 볼 것이며, “啓棘賓商九歌是歌”의 句로 推하면 東皇太一의 가명이 굴원 이전의 고대로부터 중국 연해 민간에 유행되었음을 볼 것이니, 대개 조선 고대에 산동 강소 등지에 이식한 인민, 곧 彼史에 이른바 九夷가 삼신의 명을 전하여 漢族이 漢子로 譯하여 혹은 歌名에 혹은 信條에 오름이니, “신”의 역이 太됨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太一은 신한의 뜻이요, 天一은 말한의 뜻이요, 地一은 불한의 뜻인듯하니, 신 불 말 삼한에 신한의 首位에 거함은 봉선서의 三一之中太一最貴의 뜻이면 신한의 밑에 大官 5인을 두어 5가라 칭하니 이는 5개의 국무대신이요, 전국을 동 서 남 북 중 5개 부로 나누어 5가가 軍民兩政을 分掌하고 시시로 각기 本道에 出駐하여 “사리”라 칭하니 薩, 使者, 舍利등이 그 譯이니 사리는 出駐의 뜻일 것이며 亂時에는 5인이 戰事를 분담한 5大將이 되어 “크치”라 칭하니 遣支, 遣智, 儉側, 大兄 등이 그 譯이니 크치는 대장의 뜻일 것이다.

다섯 臣이 신한을 보좌함은 봉선서의 “五帝者太一之佐”의 뜻이니, 이는 상고에 미신의 神界를 人事에 응용하여 3왕 5가, 3경 5부를 관할한 三頭五臂의 관제라. 그 상세는 타일 관제고에 별론 하려니와, 삼국시대의 辰王, 太王, 大王은 다 신한의 역이니, 고구려는 태왕의 밑에 “부리” “마리”의 좌우보를 두어 3·1을 擬하여 국내 평양 한성을 3경이라 하고 전국은 順那, 消那, 灌那, 絶那, 桂那의 5부에 나누니 또한 조선의 遺形이요, 신라와 백제는 3두5비에 1臂를 가하여 3두 6비가 된 것이다.

2.4. 전삼한 창립자 단군[편집]

최근에 간행된 東史年表에 鷄林類事 曰檀倍達 國那羅 君壬儉이라 하여 단군을 倍達那羅壬儉이라 解하였으나, 계림유사는 이미 망실하고 오직 陶宗儀의 說郛에 게재한 고려의 말 몇마디만 남아 있는데, 거기에 그런 말이 없으니 그 저자가 어디서 이를인용하였는지 據然히 取信하기 어렵다. 동사강목 考異에는 “삼국유사에 神壇의 樹下에 降하여 호를 壇君이라 하였으나, 고려사 지리지에는 檀木下에 강하여 호를 檀君이라 하였다 하였는데, 동국통감에서 고려사를 좇아 檀君이라 하였으므로 이제 此를 從한다” 하였으니, 이와 같이 단군의 壇이 원래 木변의 檀이 아니요 土변의 壇인 것은 순암 선생 같은 沈沈한 학자도 시비를 캐지 않고 세력을 따랐으니 괴이한 일이다.

삼국지 삼한전에 거하면 마한 열국이 각기 별음을 設하여 蘇塗를 세우고, 천신의 主祭者인 1인을 두어 天君이라 號하며, 有罪者가 소도의 읍에 逃入하면 索還치 못한다고 하고, 또 그 게재한 54국 가운데 臣蘇塗란 1국이 있으니, 蘇塗는 수두로 수두는 고어에 神壇을 가리키는 말이니, 열국의 수두는 곧 열국의 신단이요, 臣蘇塗는 신수두니, 열국의 신단을 續管하는 최대 신단이 있는 나라를 가리킨 것이다. 현금까지 關北 지방에는 數村이 연합하여 一大樹林을 周圍하여 금줄을 매고 그 이내를 신단이라 칭하여 大祭를 행하니, 비록 고금의 변천이 없지 못할 것이나 오히려 그 의식의 일반을 전한 것이니, 대개 단군왕검이 이와 같은 수림의 신단 수두 하에서 출현하여 시대의 방편을 따라 三神五帝의 神界를 說하며, 자기가 곧 3신의 1인 신한의 화신이라 칭하고 조선이라 운하는 雛形的國家를 建함이니, 그 신단이 土築이나 石築이 아니요 자연한 수림의 신단인즉, 土변의 壇을 써서 단군이라 하지 않고 木변의 檀을 써서 단군이라 한다 하면, 이는 紫檀, 白檀의 檀이 아니라 새로 字義를 내어 “수두나무 檀”이라 함이 가한 것이다.

흉노전에 보면, 흉노는 제단 있는 곳을 休屠國이라 하니, 휴두는 곧 수두일 것이요, 또한 수림의 제단이므로 漢人이 이를 농성(蘢城)—衛靑傳—이라 하고 후래의 편의로 草頭를 去하여 龍城이라 하였으니 사기 한서 후한서 진서 등에 보인 모든 龍城이 이것이니, 흉노도 조선의 민족과 원래 同原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태고의 혹 동일한 치하에 있던 시대가 있었던 듯 하다. 어떤 때는 신수두로서 3조선 전토의 명칭을 삼은고로 神誌의 진단구변도가 있음이니, 진단의 震은 신수두의 신의 음이요 진단의 단은 신수두의 수두의 뜻이다.

왕검은 王의 半義를 취하여 “님”을 취하고 儉의 全音을 취하여 “금”을 취하여 “님금”으로 讀하는 것이니, 혹 王자가 이미 님금의 뜻인데 하고로 半義만 취하였는가 하겠지만, 삼국사기 소지(紹智)의 주에 一作毘處라 함을 보면 炤가 이미 비치라는 뜻인데 구태여 智자를 가하여 비치로 독함과 같은 것이니, 삼국사기 중에 이와 같은 예를 찾으려면 심히 많으나 飜擧치 아니한다.

조선 1세 건국자의 이름이 “님금”인 고로 역대 제왕의 존칭을 임금이라 한 것이니, 이는 기괴한 지나 周公의 諱名法이 수입되기 이전의 일이며, 님금은 神壇主祭者의 칭이요, 신한은 정치 원수의 칭이나, 이때는 신단 주제자가 곧 정치의 원수가 되는 때인즉 임금이 곧 신한의 직권을 병유하였을 것은 물론이다. 혹은 말이 인도(印度) 범어(梵語)의 스투파(stupa)가 조선에 들어와 수두가 되고 일본에 들어가 소도바가 되고 중국에 들어가 탑(塔)이 되었다 하니, 이것도 일종 참고할 말이 되나, 그러나 한두개의 偶同으로써 그 所自出을 판명함은 너무 급거한 의론이라 할 것이다.

희랍사를 독하면 중앙의 대 델피神殿을 가진 델피국이 있고, 열국에 각기 小 델피의 신전이 있었다 하니, 이것이 조선의 신수두와 같지 아니한가. 波斯史를 독하면 전국을 統御하는 대왕이 있고 대왕 하에 諸小王이 있었다 하니, 이것이 삼국시대 태왕의 하에 각 소왕이 있음과 같지 아니한가. 서양 중고에 耶蘇敎의 武士團에서 부인으로서 敎師를 삼았다 하니, 이것이 신라의 源花와 같지 아니한가. 애급 고대에 太陽日의 수인 360여개를 쓰기를 좋아하여 나일강의 본명에도 360여란 의미가 있다 하니, 단군고기의 “主穀主命主刑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事”와 여지승람에 기한 묘향산 고적의 “三百六十餘宮”이 또한 그와 같지 아니한가.

이는 모두 본론의 범위가 아니라 姑捨하거니와, 역사는 시대와 경우를 따라 성립하는 것이니 비록 변쇄한 미신의 기록이지만 수두와 수두의 敎義에서 나온 3경 5부의 건설된 원인을 알아야 삼조선 고사를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우와 같이 대강 진술하였다.

2.5. 전삼한 강역과 연대[편집]

이때까지 진술한 것은 겨우 전삼한 곧 삼조선의 존재한 證實과 그 건립된 원인과 그 國制의 대략뿐이어니와, 이에서 따라오는 3개 문제의 하나는 삼조선의 범위다.

범위에 또 양별이 있으니 첫번째는 삼조선 각자의 범위요 두번째는 삼조선 전체의 범위다. 첫번째의 구별은 명언할 수 없으니 만주원류고에 요동의 番汗縣을 弁韓의 故地로 지정함이 近理하니, 대개 삼조선중에 불한의 관경이 가장 지나와 密邇한 고로 발조선이란 명사가 가장 먼저 지나인의 서적에 보인 바라. 燕 王喜가 조선을 침략하여 영평부의 盧龍縣을 요서라 하고 이 이동을 요동이라 칭하였은즉, 불한의 서울이 당시에 內遷하였으나(下文에 상론), 당초에는 요하 이서와 개원 이북이 모두 번조선의 舊壤이었을 것이며, 후삼한중 변진 양 한은 遷來한 것이나 마한은 본토에 있던 것이니, 마한의 전신인 막조선은 알기가 쉽다 할 것이나, 다만 위만의 난에 임진강 이북을 전실하였으니 그 본토의 전체로 말하면 대개 압록 이동이 모두 그 舊壤이었을 것이며, 신한의 구양은 가장 模捉할 수 없으나, 신한은 임금의 겸임인즉 왕검성 즉 금 海城縣이 그 서울이라 하면 요동반도와 길림 등지가 곧 신한의 부분인 진조선의 구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조선이 截然 각별한 국가가 아니요 다만 신한의 통치하에 약간의 구별을 가진 국가가 될 뿐이다.

동국총목의 “檀君疆域北至黑龍江南至鳥嶺”이 삼조선 전체의 강역이 될 것이나 흑룡강 조령 등은 고대 명칭이 아닌즉 고사에서 나온 기록이 아니요 후인의 억설이다. 그러나 후삼한의 辰弁이 천래하기 이전에는 조령 이남이 거의 黃落하여 인거가 없었을 것이니, 총목의 억설이 대개 근리하며, 문헌비고에 고죽(孤竹: 영평부)이 춘추 이후에 조선 소유가 되었다 했으나, 이는 백이를 한족(漢族)으로 인(認)하는 동시에 그 본국인 고죽을 漢族의 國으로 認한 것이다. 건륭의 도서집성에는 고죽을 北夷의 하나라 하였으니, 夷가 비록 范漠한 명사이나 漢族이 아님은 명백하니, 秦開戰 이전에는 고죽이 조선의 일부이던 것도 명백하다 할 것이며, 사기 흉노전에 直上谷以往者東接濊貊朝鮮이라 하였은즉 조선과 지나와 흉노의 분계를 이로써 대강 알 것이다.

3개 문제 중 두번째는 삼조선의 연대다. 금인이 보통 조선 건국부터 前甲子까지 4257년이라 하니, 왕검 이후로부터 동 북부여 분립 이전까지 그 사이 범막한 장세월의 사적이 전부 殘缺하였는데, 이것을 어디서 고증하였는가 하면, 고기에 “檀君與堯竝立於戊辰”이라 한 것을 據하고 邵康節皇極經世書의 唐堯이래 연대표에 의해 정한 연조라. 그러나 확극경세서에 적힌 연대를 믿을 것이냐. 사주보는 자가 남의 미래의 행년을 내면 1세부터 70세, 80세까지 내지만, 그 행년이 꼭 맞는 것은 아니니, 지나연대를 사마천 사기에 周召共和로부터 연표를 비롯함은 그 이전 역년을 알 수 없는 까닭이어늘 소강절이 자기의 자랑하는 象數學으로 아무 증거도 없이 商이 幾百幾十歲, 周가 기백기십세, 심지어 某帝는 재위 약간세, 모왕은 재위 약간세…… 등 고 국조와 고 제왕의 사주를 내었으니, 이러한 것으로 증실을 삼아 지나 연대 중 당요의 기원에 대조하여 단군의 연대를 알려고 함은 愚擧이다.

고구려의 기록으로부터 전한 위서의 “往在二千歲有檀君王儉立國阿斯達”이 본문의 전부를 잃고 오직 십수자의 단구로 전한즉 준신할 만한 확실한 가지가 있고 없음을 모르나, 오히려 조선의 고기라 한즉 고구려로부터 그 이전 2천년이면 距今 4천년 내외이니, 이와 같은 成數나 存記함이 가하며, 기자도 황극경세서의 주 무왕 연대와 대조하여 거금 幾年이라 하지만, 무왕 연대도 또한 당요의 연대와 같으며, 기씨 선우씨의 족보에 인하여 기자를 태조 문성왕이라 하고, 그 이하 마한까지의 시호와 역년이 詳備하나, 그러나 태조 문성 등의 諡가 상고에 있지 아니하며, 혹은 후왕의 追崇이라 하나 조선에서 諡法을 씀이 삼국 말엽에 비롯하였거늘, 이제 그 이전에 마한 때에 시법이 있었다 함도 不成의 설이니, 기자는 거금 3천년 내외에 조선에 건너온 인물로만 앎이 가하다.

3개 문제 중 세번째는 조선의 흥망 변천한 사적이다. 이는 재료가 연구의 여지를 주지 않는 가장 난문제이나 이 문제를 또한 2분하니[27],

(가) 단군 기자의 替代, 즉 기자가 일개 지나 망명객으로 들어오자 어떻게 단군을 代하여 왕이 되었는가의 문제이다. 壇은 수두요, 수두는 고대의 조선 전체를 총칭한 이름임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그때 제왕은 오직 제1세 왕검과 제2세 부루가 고기에 보일 뿐이요, 기자와 그 후예라 운하는 조선왕 否, 조선왕 準은 조선사략에 보였으나 기실 기자의 일은 사기 한서와 소설류의 삼재도회에서, 부와 준의 일은 위략에서 初出한 것뿐이라. 李朝 이전의 조선인의 붓으로 쓴 기자의 사실은 겨우 삼국유사에 “壇君…避箕子”의 십수 자이며, 삼국사기에 “箕子受封於周室”의 7자가 쓰였으니 이것은 사기에 적힌 것을 초록한 것이라. 신라 말의 유일무이한 지나 숭배자로 제왕연대력을 쓴 일종 사가 최치원도 일찍 한 마디 말도 기자에게 미침이 없음은 하고이며, 위서에 단군왕검을 기하였는데 그 동시의 저작인 삼국지와 위략에는 왕검을 배고 기자만 載하여 부여 고구려 등의 문명을 기자에 歸功하였음은 하고이며, 遺事의 말과 같이 단군이 位를 退하고 기자에게 주었다 하면 神壇樹林의 권위가 이미 衰死한 징후이거니, 기자 이후 천여 년에 해모수 해부루 고주몽이 모두 단군 혹 檀君子라 칭함은 하고이며, 또는 삼국 초엽까지 조선 전체를 震壇이라 칭하는 이름이 남아 있는 것은 하고인가. 중국사에 조선에 관한 무슨 말이 있으면 그것을 가져다가 조선사 어느 책장에 집어넣고, 만일 彼我의 기록이 서로 모순되면, 자가의 추측으로 한두자를 개정 혹 첨부하여 없는 사실을 날조함은 역대 사가의 관습이니 遺事에 檀君…避箕子가 어찌 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명백한 반대의 증거가 없는 이상에는 일종 의문으로 고대의 기록을 깨치지 못할 것이라. 아직 특별한 발견이 있기 전에는 기씨 연대를 그대로 두고 볼 것이다.

(나)는 삼조선의 결국 즉 삼조선이 일시에 공망하였느냐 하는 문제다. 사기 조선전에 始全燕時嘗略屬眞番朝鮮 이라 하니, 이것이 아마 삼조선의 최후일 것이다. 이는 곧 진개가 入寇하여 滿番汗 이북 2천리를 沒失하던 때의 일이다. 만번한은 곧 한서 지리지에 보인 文番汗의 양현이요, 番汗은 전술한 만주원류고에 이른바, 변한의 舊地 즉 불한의 서울이다. 근세의 선유들이 2천리를 오증하여 만번한을 대동감 이남에 와서 찾았으므로 졸저 평양패수고에 이미 명백히 변증하여 금 대동부부터 熱河 등지를 지나 요동까지 2천리임을 논술하였으니 여기에 더욱 復載치 않거니와, 이는 삼조선 건국 이후 미증유한 대외 전쟁의 실패며 三頭정치 붕괴의 동기가 됨이다. 신조선이 붕괴하여 삼국이 되니 其一은 興京縣, 桓仁縣 등지로 들어가 불조선 유민과 연합하여 진번국이 되고, 又一은 경상우도로 들어와 변진국이 되니, 전자는 신조선 유민이 주가 되고 불조선 유민이 부가 되어 진번이라 이름하고, 후자는 불조선 유민이 주가 되고 신조선 유민이 부가 되어 변진이라 이름함이니, 이는 대개 인구의 다과에서 선후 차서를 정한 이름인듯하고, 又一은 단순한 신조선 유민들이 경상좌도로 건너가 진한6부를 건설하니 이 가운데 진한과 변한은 다 마한 南遷한 뒤의 일이라, 차절 후삼한고에 상술하려 한다. 신불 양조선의 또 일부 인민의 後來가 燕寇衛滿에게 趨附하여 위만조선이 성립하니, 위만전에 이른바 役屬眞番朝鮮蠻夷와 侵降其旁小邑眞番臨屯皆來服屬이 이를 가리킴이라. 말조선은 신 불 양조선의 대패 멸망한 끝에 홀로 진개의 방어에 성공하여 조선이란 이름을 보전하고, 또 조선왕 부는 진시황의 중국 통일 후 만리 장성의 威燄에 四海를 전율케 하는 때에 정병을 선하여 요새를 守하여 半壁의 강산이라도 보수함이러니, 不肖子準이 繼位하여 위만을 신임하여 西鄙를 할여하며 宿衛를 허하다가 마침내 反攻을 만나 남방으로 달아나 조선이란 이름을 버리고 다만 말한이라 칭하니, 삼국지와 삼국사기의 이른바 마한이니, 마한 진한 변한은 다 전삼한 후신으로 남방에 재설된 삼한이다. 나의 창명으로 후삼한 혹 남삼한이라 정하고 그 상세는 차절 삼한고에 보인다.

3. 후삼한 – 삼국지에 보인 羅 加 濟 삼국[편집]

3.1. 후삼한 고증에 대한 선유의 오류[편집]

한구암 안순암 정다산 한대연 숙질 등 제선생이 비록 전삼한의 존재한 것을 인정치 못하였으나 辰弁馬 삼한을 곧 신라 가라 백제라 하여 최고운의 羅麗濟 삼국에 분배한 삼국설을 벽파하여 후삼국의 강역을 정돈한 공은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 중에도 後生小子의 校正을 待하는 다소 오류가 없지 않으니, 그 제반 오류가 이하에 열거한 3者의 대 오류에서 원인한 것이다.

(가) 참고서의 誤니, 범엽의 후한서의 동이열전은 곧 진수 삼국지의 동이열전을 초록한 자니, 그 실례의 하나를 들어 보인다. 삼국지 동옥저전에 王頎别遣追討宫盡其東界問其耆老海東復有人否 … 說得一布衣從海中浮出 … 兩袖長三尺 … 一人項中復有面[28]라 한바, 왕기는 曹魏의 장수요, 궁은 고구려 동천왕의 이름 위궁의 약자인즉, 다 후한 이후의 사람인 고로 왕기 이하 13자를 刪去하고 고구려 耆老의 自言으로 作하여 삼국지의 것을 초록하였다. 이 같은 사적 가치없는 요괴담의 초록이야 우리에게 何關이랴마는, 초록뿐이면 오히려 가하나, 이제 중대한 기록을 개찬하여 삼국지에는 “準…將其左右宮人走入海居韓地自號韓王準後絶滅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29]”라 하였거늘, 후한서에는 “準…將其餘衆數千人徒入海攻馬韓破之自立為韓王凖後滅絶馬韓人復自立為辰王[30]”이라 하였다. 진수, 어환, 왕침 등은 다 관구검과 동시의 人으로 儉이 가져간 고구려의 기록을 得見한 자일 것이니, 曄의 개찬이 어찌 狂擧가 아니랴. 그런데 선유들은 다만 후한이 삼국의 전대인 것만 알고 후한서 저자 범엽이 삼국지의 저자 진수의 후인 것은 미처 생각지 못하였던지, 매양 후한서에 보인 삼한으로 주요 재료를 삼고 삼국지는 도리어 보조로 인용하였다.

(나) 偏信의 오니, 당 태종의 중국고사 중 조선에 관한 기재를 妄刪 혹 위조하였음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그뿐 아니라 당 태종의 백여 년 후 당 덕종때의 賈耽은 그의 소위 四夷연구의 전문가로서 더욱 조선과 중국관계를 잘 아는 자이었는데, 그 저서 四夷述의 序에 “玄菟樂浪陷於漢建安之際”라 하여 2군이 고구려에게 함락됨을 한탄하였거늘, 이제 후한서에는 그와 비슷한 말도 없고, 삼국지에는 公孫康이 屯有縣 이남의 地를 분하여 대방군으로 삼았다 할 뿐이며, 또 위 명제(魏明帝: 曹睿)가 대방태수 劉昕과 낙랑태수 鮮于嗣를 보내어 海를 越하여 2군을 정하였다 하여 대방 낙랑이 일찍이 公孫淵에 함락되었음을 말하였으나, 그러나 대방이 현도가 아니며 공손연이 고구려가 아니니 이것을 곧 가탐의 말한 바로 간주함이 불가하니, 그러면 진수, 범엽 등이 종족적 편견으로 현도 낙랑의 失陷한 大事를 厥함이 아니면 곧 후인의 妄刪이며, 또 삼한전에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攻帶方郡崎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二郡遂滅韓[31]”이라 하였으니, 下文에 據하면 진한의 전국 수가 12국인데 8국을 奪하여 4국만 餘하였다가 후에 그 4국까지 멸함이니, 그러면 신라 왕국이 어디에 존재하였던가. 그런데 선유들은 매양 古記의 斷爛한 문자는 다 버리고 오직 후한서 삼국지 등을 거하여 故事를 단정하려 하였다.

(다) 해석의 오니, 辰韓, 辰王 등의 辰은 臣蘇塗, 臣濆活, 臣智, 臣遣支, 臣雲新 등의 臣은 그 음이 신인데 元의 義요 總의 義로 三國時人이 이를 太라 譯한 자며, 卑離는 불이니 平地의 義요 郡會의 義로, 백제 지리지의 夫里, 扶餘 등이 다 同音同義며, 狗邪, 安邪, 彌烏邪馬 등의 邪는 다 그 음이 라니, 駕洛의 洛과 加羅의 羅가 동음이어늘 선유들이 이두자의 해석을 몰랐으며, “準…入海”는 곧 조선 남방을 가리킨 것이니, 지나인이 고대에 島나 半島를 모두 海 혹은 海中이라 한 고로 조선에 응용한 것이니, 한서에 “朝鮮在海之中越之象是也[32]”와 博物誌에 “燕伐之朝鮮亡入海[33]” 등에서 볼 수 있거늘, 선유들은 매양 準을 浮海南奔으로 認하였다.

제一로 인하여 오류가 생긴 것이 또 二니 一, 마한은 전후 삼한을 통하여 箕氏一姓 —否와 準을 箕子의 후예라 하면 — 선유들이 후한서에 거하여 準의 攻破하기 이전의 마한을 原有의 마한이라 하고, 공파한 마한을 기씨의 소유한 마한이라 하고, 진왕이라 자칭한 마한을 기씨멸절한 뒤의 마한이라 하여 3개의 마한으로 나누며 二, 선유의 말에 중국 21사의 조선열전이 모두 當代 병립한 隣國을 기재한 것인즉, 후한서나 삼국지의 삼한도 곧 지나 후한과 삼국시대에 상당한 羅 加 濟 삼국이요, 그 백년 혹 천년 전의 삼한이 아니라 하여 역대 사가가 후한서와 삼국지에 보인 사실을 羅 加 濟 삼국 이전에 향하여 찾으려던 愚擧를 갈파함은 실로 千確萬確한 견해라 할 것이나, 다만 후한서로 인하여 마한을 3개로 나누어 진왕의 마한을 최후의 마한으로 인하여 이에 백제를 조치할 곳이 없으므로 드디어 백제본기의 온조가 마한을 멸한 사실을 부인하고 즉 진수 범엽의 저서하던 때 백제 건국 2백년 후 까지도 마한이 따로 존재하였음을 주장하여 架空의 筆로 전대의 2백년 수명을 연장하고, 그리하여 辰弁 양한을 신라와 가라로 인정하는 동시에 백제만 삼한 권외에 축출하여 연대와 사실의 대착오를 이루었다.

제二로 인하여 오류가 생긴 것이 또 二니 一, 辰韓을 秦人의 避役者라 한 妄證은 이미 변론하였거니와, 선유들은 진수 범엽 등의 기록을 신용하여 드디어 신한을 지나인의 자손으로 認하는 동시에 그러면 어찌하여 진한에 지나인의 언어 문자와는 비슷도 아니한 斯盧, 已祗, 不斯 등 國의 국명이 있느냐의 의문이 있으므로, 이에 해동역사 지리고에는 진한의 명은 秦人의 避役東來者로 말이암아 나고, 6부의 명은 위만의 2세인 우거의 신민들이 이주한 뒤 始한 줄로 말했으나, 이같이 辰韓이 秦人이 이주한 한국이라 解할진대, 삼국사기 혁거세 원년에 辰人以瓠爲朴, 居西干辰言長者之稱의 辰은 모두 秦人이란 秦일진대, 어원학상으로 고구하여 朴이나 거서간이 결코 고대 지나인의 언어가 아니었으며, 二, 삼국지에는 後準僭號稱王이라 하여 기자 자손이 대대 侯爵으로 오다가 준에 至하여 비로소 稱王한 줄로 말하며, 위략에는 朝鮮侯見周衰燕自尊爲王…亦自稱王[34]이라 하였으니, 삼국지나 위략에 적힌 사실이 다같이 관구검의 所傳이련마는, 此一절이 다 각각 다름은 각기 尊中國의 습관으로 사실에 위반되는 사실을 쓴 것이 명백하거늘 이런 辨駁이 없음은 고사하고 선유 중 혹 辰王의 辰이 人臣의 臣으로 作하여 臣屬한 侯王의 義로 妄解한 이가 있다.

제 三으로 인하여 생긴 오류가 더욱 허다하니, 이제 略擧하면, 一, 辰國을 辰韓이외에서 찾아 삼한 이전에 辰이란 특별한 1국이 있는 줄로 認하며, 二, 辰王을 태왕 이외에 찾아 진국이란 특별한 일국의 왕으로 오인했으며, 三, 따라서 辰王, 臣蘇塗 등의 본의를 몰라 삼한의 관제 풍속 등을 거의 다 오증했으며, 四, 한강 남북을 갈라 북은 조선이 되고 남은 진국 혹은 한국이 되었다 하여 고래로 남북의 종족이 各別한 것으로 오증하였으며, 五, 卑離와 夫里를 동음으로 보지 못하였으므로 백제 이외에서 마한을 찾았을 뿐더러 마한 열국의 위치를 많이 오증하였으며, 六, 이상과 같이 이두자를 辨解치 못하므로 삼한전 중에 言語不與馬韓同不暗句麗言語 등의 기록을 과신하여 異字로 쓴 同名을 발견치 못하였으며, 七, 海자의 오해 같은 것은 비록 그다지 중요치 아니하나 陸行南走로 認하면 구 평양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현금의 평안 황해 경기 충청 등도를 지나 準의 新都라 하는 金馬國—익산까지 중간 천여리가 모두 준의 신민인 고로 좌우 궁인을 거느리고 도망하는 패잔한 同時行次가 無恙함인 줄 알 것이며, 沿海南走라 하면 이와 반대로 육행의 위험을 연상할 수 있는 제왕에 舊都돠 新都 중간 모든 지방이 準의 管境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문도 발생할 것이다.

3.2. 中 삼한의 약사[편집]

上文은 선유들의 오류를 지적한 것뿐이다. 이제부터 후삼한의 역사를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眞番莫을 삼조선이라 하고 신라 가라 백제를 후삼한이라면 眞番莫 삼조선은 이미 멸망하고 羅 加 濟 삼국은 아직 건설되기 전에 準의 마한과 眞番 양국은 유민이 건설한 진한과 변한의 양 자치부락은 무엇이라 이름할까? 佛家에서 전신은 已脫하고 후신을 未得한 그 중간 暫有의 身을 中陰身이라 하니, 이것은 전후 양 삼한의 중음신이라 함이 가나하, 지금 다만 중삼한이라 이름하고 후삼한의 역사를 말하기 전에 먼저 중삼한의 역사를 말하고자 한다. 중삼한의 역사를 兩段에 분하니,

一은 마한의 건국이다. 준이 왕검성을 버리고 금마군에 천도하여 어찌하여 조선의 舊名으로 국호를 삼지 아니하였는가? 이는 위만의 조선과 구별하기 위함일 것이다. 고대에 천도하면 매양 그 지방의 이름으로 국명을 삼았으니, 백제가 사비부여에 천도하여 국명을 곧 사비부여라 한 類가 그것이니, 준이 금마군에 천도하여 어찌 금마국이라 칭하지 아니하였는가? 금마군은 삼한전 중의 건마국이니금마군이라 함은 백제 중엽 이후 봉건제를 폐지한 뒤 郡名이라. 신라가 백제를 멸하고 그 군명을 仍用한 고로 신라 문사들이 古記를 述할때에 준이 금마군에 천도하였다 함이요, 준의 때부터 백제 중엽까지는 건마국 혹 금마국이라 칭했을 것이니, 준의 남천 후에 금마국의 국명을 仍稱하였던지 모르나 후인들이 古史를 追述할 때 준의 位號인 말한으로 그 국명을 삼은 것이다. 선유들이 모두 금마군을 삼한전 중의 건마국으로 認하지 않고 월지국으로 인함은 하고인가? 이는 전술한 범엽의 攻破馬韓, 馬韓人復自立爲辰王 등의 위증에 속아서 삼한전 중의 辰弁 양한은 신라와 가라로 認하면서도 마한은 백제 이전의 마한으로 인한고로 삼한전 중 백제에 관한 사실을 준의 사실로 오증하였으나, 그러나 辰王治月支國이라 한 진왕은 백제의 태왕이요, 월지는 백제의 위례성이니, 위례의 음이 월되고 성의 義가 티(支)가 됨이다. 후한서의 攻破馬韓 등 說을 범엽의 위증이라 하여 준의 천도 이전에는 남방에 마한의 명칭이 있었다 함은 그럴 듯하나, 그러나 삼국지의 準…走入海居韓地自號韓王은 하설인가? 이는 상문의 韓在帶方之南을 받아서 말한 것으로 韓地에 入居하여 此地에 왕이라 號하였다 하미요, 그 이전에 韓國이 있다 함이 아니다. 만일 엄격하게 문구와 시실의 부합만 구할 것 같으면 상문에 이미 辰韓者古之辰國也라 하였은즉 진한의 辰이 진국의 辰에서 나옴이어늘 하고로 하문에 辰韓 … 耆老 … 自言 … 避秦役來適韓國馬韓割其東界…今有名之爲秦韓이라 하여, 진시황의 秦으로 진한의 辰을 만들어 상하문의 사실을 서로 모순되게 하였는가? 이미 韓有三種一曰馬韓이라 하였으면 下面에 마땅히 마한의 득명한 시초나 원인을 말하여야 할지어늘 이제 居韓地, 號韓王, 韓遂屬帶方, 樂浪分統韓國 등의 語만 있고 마한이란 자는 없으니, 어찌 이같이 전후 文勢가 관통치 않았는가? 그러므로 더욱 당 태조이 이래로 고사 안에 妄刪 혹은 위증이 많이 가입하였음을 볼 수 있다.

二는 辰弁 양한의 건설과 마한의 革姓이다. 진한은 순전히 신한 유민의 이주자가 건설한 바이고 변진은 불한과 신한의 양국 유민의 이주자가 공동건설한 바임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여기에 일언코자 하는 바는 기씨의 마한의 멸망한 사실이다. 대개 기씨 말엽에는 남에게 토지를 할여하다가 멸망하였으니, 준이 이미 西鄙 백 리를 위만에게 할여하고는 마침내 위만에게 쫓기어 남방에 와서 마한이 되며, 마한이 된 뒤에도 신한 이주민에게 동계를 할여하고(진한전에 割其東界與之란 구절로 알수 있음), 또 불한 신한 양국 이주민에게 동남계를 할여하다가(이는 史에 보이지 않았으나 事理로 推知할 수 있음) 마침내 신라 혁거세가 진한과 변진을 연합하여 대항하매 드디어 동계와 동남계를 幷失하였으며, 그리고 최종으로 졸본천의 유수한 부호의 과부 召史奴가 그 2子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南來하매 幾斤의 황금을 받았던지 미추홀, 漢忽 등 서북 百里地를 할여하였다가(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割東北百里라 하였으나 東자는 마땅히 西자로 作할 것이니 동서양자상환고를 참조).

마침내 온조태왕의 가장한 사냥꾼에게 금마국에 우거한 서울까지 빼앗기고 箕氏왕조 천여 년의 운명도 이로써 마치었다. 이와 같이 마한은 망하여 扶餘氏의 백제가 되고, 진한은 기씨 망하기 전 66년에 혁거세가 이미 6부의 盟主가 되었고, 변진은 기씨 망한 후 35년에 首露大王이 6加羅의 맹주가 되니, 이곳 백제 신라 가라로 후삼한이라 칭한 바요, 후삼한이 흥하매 중삼한의 역사는 이에 일단락을 고하게 되었다.

3.3. 후삼한 羅 加濟의 역사[편집]

羅 加 濟의 역사는 首尾 6~7백년의 역사니, 그 연대의 長은 전삼한의 삼분의 일밖에 안되나 사적재료로 유전하여 오는 것은 서적으로만 말하여도 不精하나마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이 있어, 도저히 이 따위 단편으로 다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말하고자 하는 후삼한은 순전히 진수 삼국지 삼한전에 보인 羅加 濟의 별명인 삼한에 대하여 말함에 그칠 뿐이다.

먼저 후삼한의 강역을 의론하면 삼국지에 기록한 삼한 70여국은 곧 삼국사기 지리지에 보인 羅 加 濟 삼국의 각 주군이니, 다만 전자는 봉건시대의 지리를 기한 자이므로 國이라 하고, 후자는 봉전 타파 후 기한 자이므로 州 혹은 郡이라 한 것이다. 封國을 폐하고 주군을 設하는 동안에 대소의 합병도 있었을 것이며, 명호의 변경도 있었을 것이며, 또 같은 명호로도 이두문 용자의 변경도 있었을 것이며, 신라 경덕왕 때 이두문으로 쓰던 지명을 한문으로 개정한 뒤 혹 古號가 전치 못하며, 혹 고호의 의의를 알 수가 없이 된 자가 많아 일일이 찾을 수 없으나, 오히려 그 대략을 알 수 있다.

(가) 백제의 강역은 삼한전에 이른바 마한 50여국인데 국명은 좌와 여하다.

해양국(奚襄國), 모수국(牟水國), 상외국(桑外國), 소석삭국(小石索國), 대석삭국(大石索國), 유휴모탁국(優休牟涿國), 신분활국(臣濆活國), 백제국(伯濟國),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일화국(日華國), 고탄자국(古誕者國), 고리국(古離國), 노람국(怒藍國), 월지국(月支國), 자로모로국(咨離牟盧國), 소위건국(素謂乾國), 고해국(古奚國), 막로국(莫盧國), 비리국(卑離國), 점비리국(占卑離國), 신흔국(臣釁國), 지침국(支侵國), 구로국(狗盧國), 비미국(卑彌國),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고포국(古蒲國), 치리국국(致利鞠國), 염로국(冉路國), 아림국(兒林國), 사로국(駟盧國), 내비리국(内卑離國), 감해국(感奚國), 만로국(萬盧國), 벽비리국(辟卑離國),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 일리국(一離國), 불미국(不彌國), 지반국(支半國), 구소국(狗素國), 첩로국(㨗盧國), 해로비리국(奚盧卑離國), 신소도국(臣蘇塗國), 막로국(莫盧國), 고랍국(古臘國), 임소반국(臨素半國), 신운신국(臣雲新國),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초산도비리국(椘山塗卑離國), 일난국(一難國), 구해국(狗奚國), 불운국(不雲國), 불사분야국(不斯濆邪國), 해지국(奚池國), 건마국(乾馬國), 초리국(椘離國).

우 50여국의 국명중에 疊載한 막로국을 산거하면 합이 54이니, 54의 국명을 삼국사기 백제 지리지의 주군명에 만춘 뒤 다시 백제 주군의 연혁을 고려사 지리지와 이조 8도 지명에 맞추어 본즉 그 가운데 卑離 등제국들은 곧 백제 지리지에 夫里 등 주군인데, 監奚卑離는 古莫夫里, 즉 固麻城이니 금 공주요, 辟卑離는 波夫里니 금 同福이요, 毛卑離는 毛良夫里(牙, 邪, 良, 壤, 襄, 奴, 那 등 자가 다같이 라의 음임은 이두문 해석법 참조)니 금 高敞이요, 如來卑離는 爾陵夫里니 금 綾州요, 그 중에 형용적 頭辭가 없지만 卑離國이라 한 卑離는 그위에 卑의 一자가 脫한 듯하니 卑卑離는 夫夫里로 臨陂와 沃溝 사이 澮尾廢郡이요, 이밖에 삼한전에 內卑離, 占卑離, 楚山塗卑離 등 卑離가 있고, 백제 지리지에 半奈夫里, 未冬夫里, 古沙夫里, 古良夫里가 있어 數도 一이 差하여 음도 서로 맞지 아니하니 아직 後考로 미루고, 大石索은 大尸山이니 금 泰仁이요, 優休牟涿은 于召渚니 금 高山 서부의 폐군이요, 월지는 위례성이니 금 한성이요, 支侵은 백제 지리지에 그 본위치를 말하지 않았으나 당 도독부의 設郡에 支潯이란 군명이 있으니 支潯은 州治가 貝彡인 고로 득명한 자요, 패삼은 신라가 餘邑이라 개명한 바 餘의 義가 끼침이니 금 海美요, 狗盧는 皆利伊니 그 연혁이 없고, 駟盧는 沙好薩이니 好는 奴의 誤인 듯한데 금 洪州요, 感奚는 今忽이니 금 德山이요, 莫盧는 邁羅니 동성대왕 때에 위병(魏兵: 拓跋氏) 누십만을 깨친 명장 沙法名의 봉국이니, 삼국사기에 그 연혁이 없으나 백제 망후 당 도독부의 관할인즉 대개 공주 부근일 것이요, 臼斯烏旦은 구사진방(仇斯珍芳: 일명 貴旦)이니 금 長城 동부요, 楚離는 所力只지 금 沃溝요, 건마가 곧 금마군임은 이미 전술한 바이다. 나머지는 아직 발견치 못하였으니 후일을 기다리려니와, 이만하여도 마한 54국의 지도를 그릴 수 있지 않은가.

(나) 다음으로 진한과 변진은 합하여 24국인데 국명은 좌와 여하다.

이지국(已祗國), 불사국(不斯國),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 늑기국(勤耆國),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 염해국(冉奚國), 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 변악노국(弁樂奴國), 군미국(軍彌國), 변군미국(弁軍彌國),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 여잠국(如湛國), 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 호로국(戶路國), 주선국(州鮮國), 마연국(馬延國),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 마연국(馬延國),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 사로국(斯盧國), 우중국(優中國).

이 가운데 군미국과 마연국이 첩재하였으니 선유들의 말을 좇아 이 양국은 산거하면 24의 수에 恰當하다[35]. 사로가 신라임은 그 연혁도 명백하고, 선유들이 斯는 새요 盧는 라(금어의 나라)이니 곧 新國의 義라 함도 틀림 없으며, 구야(狗邪)는 加羅니 금 金海며, 彌烏邪馬는 任那니 금 高靈이요, 古資彌凍은 금 固城이라 함도 선유의 정설이 있거니와, 이제 졸견으로 그 音義을 해석하여 이외 제국의 연혁을 찾을 만한 자를 더 찾으려 한다. 辰弁 양한 23국 중에 彌凍으로 명한 나라가 3이니, 비록 마한의 卑離처럼 많지 못하나 삼국사기 지리지에 彌知로 명한 郡은 모두 水灣이 曲한 곳에 임한 자니 백제의 古馬彌知는 금 康津 海南 간의 海灣의 읍이요, 松彌知는 靈光부근 해만의 읍이요, 신라의 武冬彌知는 庇安 북부 丹密 廢邑이니 또한 丹江 江灣에 임한 자이다. 彌凍은 이두문에 대개 彌知-미지로 讀하는 것으로 동일한 水灣의 義일 것이니, 古資彌凍이 금 固城임은 이미 상술하였거니와 古資는 구지, 즉 반도의 義니 고성이 반도인 동시에 또한 大海灣에 임한고로 古資彌凍 즉 구지미지라 이름함이며, 弁辰彌離彌凍은 혹 迎日灣이 될 것이다.

문헌비고에 大伽倻今 高靈, 小伽倻 今 固城, 古寧伽倻 今 咸昌, 阿羅伽倻 今 咸安, 星山伽倻(一云碧珍伽倻) 今 星州라 하니 弁辰古淳是는 곧 古寧伽倻(고링가라)니 함창 공갈못의 공갈은 고링가라의 訛傳인 듯 하며, 弁辰安邪는 곧 阿羅伽倻(아라가야)니 아라는 咸安 北江의 고호인 듯 하며, 삼국사기 지리지의 互用字에 거하여 珍ㆍ彌ㆍ買의 3자가 다 ‘매’로 독함을 알지니, 星山의 별메의 의요 碧珍은 별메의 음인데, 半路는 곧 ‘별’이니 弁辰半路는 곧 星山伽倻며, 이상에 이미 술한 彌烏邪馬 — 任那 今 高靈과 狗邪—加羅 금 金海와 古資彌凍—구지미지를 합하여 6가야라 칭한 것인데, 다만 彌烏邪馬의 邪馬 양자의 倒載일 것이다. 瀆盧는 茶山이 巨濟古號 裳郡의 裳은 속어에 두룽이니, 瀆盧는 두룽이의 음이니 금 巨濟라 하니 대개 비슷하며 不斯는 부스니 곧 고어에 松의 義나 그 위치를 알 수 없으며, 勒耆는 長鬐의 고호가 耆立이니 늑기가 기립일 것이나 양자 중 어느 하나가 倒字일 것이다. 그 나머지는 아직 음의 위치와 연혁을 발견치 못하였다.

3.4. 후삼한의 互相 관계[편집]

삼한전에 진한과 변한의 政體를 기록하여 其十二國屬辰王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辰王不得自立爲王이라 하였으니, 이는 實과 訛가 參半한 것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서에 쓰인 王, 太王, 大王 등은 모두 삼한전의 辰王임과, 전삼한 시대에는 신한이 首位이고 말한과 불한이 보좌임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후삼한에 이르러서는 말한은 비록 쇠패한 끝이나 오히려 한강 이남은 전부를 차지하여 고대의 一대국의 위치를 가졌으므로 그 국호는 말한(馬韓)이라 하였지만 그 位號는 辰韓이라하여 70여국의 共主가 되었으며, 신한(辰韓)과 불한(弁韓)은 다만 그 유민임에 의하여 이로써 그 所居의 지명을 삼아 슨 것이요, 그 위호인 신한은 도리어 마한에 讓한 고로 신라본기에 거하면 혁거세부터 지증까지 거서간, 니사금, 마립간 등으로 칭하고 왕이라 칭하지 못하였는데, 마립간은 삼국사기 눌지마립간 주에 김대문이 이르기를 “麻立橛也”라 하니 橛의 義는 “말”이라. 그러면 마립간은 말한으로 독한 것이니 말한도 오히려 존칭이므로 초대에는 쓰지 못하고 눌지에 이르러서 4대를 쓰고 법흥때에 와서 비로소 신한 곧 대왕이라 칭한 것이다.

백제는 마한의 故地를 據하므로 그 국호를 마한이라 하나 그 왕호는 辰韓이며, 신라는 진한의 유민이므로 그 국호는 진한이라 하나 그 왕호는 마한이 되어 진한 마한의 명의가 이같이 뒤죽박죽 되었는데, 삼한전이 곧 관구검이 얻어간 기록과 전설을 쓴 것인즉 신라 초대의 일이니 其十二國—辰韓弁韓 양 방면의 十二國 합 二十四국을 竝擧한 者—屬辰王의 一절은 實錄이며, 신라는 그 건국 이후 항상 朴, 昔, 金三姓이 서로 遞傳하고, 어느 때 백제인이 신라왕이 된 적이 없으니 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의 一절은 訛錄이다. 그러나 신라본기로 보면 그 초대부터 백제와 대치하였던듯하나 이는 신라 史官이 先代의 恥를 諱하여 산거한 것이니, 隋書에도 “新羅…其先附庸於百濟”라고 적히어 있다. 고구려가 선비와 혈전하는 동안 백제가 강하여짐과 같이 백제가 고구려와 혈전하는 동안에 신라가 강하여짐은 實在의 사실인즉 눌지와 내물 이전에는 12국이 마한 진왕의 절제를 받았을 것이니 이는 삼한전의 것으로 신라본기의 缺을 보충함이 가하다.

3.5. 후삼한과 병립한 열국[편집]

삼국지에 적힌 후삼한 당시의 왕국이 5이니

一, 扶餘눈 불의 譯이니, 卑離, 夫里, 弗, 發, 火, 伐 등의 역과 같은 자나, 불은 국명이 아닌고로 조선고사에 반드시 그 위에 頭辭를 冠하여 北扶餘, 東扶餘, 泗沘扶餘, 卒本扶餘, 爾陵夫里, 古莫夫里, 密弗, 推火, 音汁弗, 沙伐, 徐羅伐이라 하여 그를 구별하였다. 그러나 각 불 중에 북부여가 가장 대국이며 중국과 교통이 잦았던 고로 漢 사마천부터 북부여를 다만 부여로 칭하여 관습어가 됨이니, 삼국지 중 부여도 곧 북부여를 가리킨 것인데 그 수도의 위치는 합이빈으로 삼국사기의 황룡국이 是며, 삼국사기 중 부여는 동부여니 삼국지의 부여가 아니요.

二, 고구려는 그 中京 가우리로 득명한 자니, 삼국지 중 고구려의 수도는 금 즙안현(輯安縣)이요.

三, 옥저는 와지니, 森林의 義니 만주원류고에 보인 窩集이며, 고대조선 북부인이나 근세까지의 만주인이 그 所居 지방에 대삼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와지라 하였은즉, 삼국지에 동북남 삼옥저는 그 중 최대한 와지를 가리킨 것이요. 그밖에도 무수한 와지가 있었으니, 삼국사기에 好童이 出遊한 와지와 晉書의 依慮子第의 走保한 와지는 다 삼옥저 이외의 와지요.

四, 挹婁는 ‘오리’라. ‘오리’강반(江畔: 금 송화강)에 거하여 득명한 자니, 廣開疆土平安好太王의 비문에 쓰인 鴨盧가 그것이니 삼국지에 이를 숙신씨의 후예라 하였으나, 이는 그 소용 무기인 楛矢와 石弩가 左氏 國語의 記한 숙신씨 矢와 같은 고로 傅會한 말이니 숙신, 직신, 州愼 등은 다 고대 지나인이 조선을 譯傅한 것이며, 읍루는 조선 최북 미개한 일부 조선족으로 삼국사기와 당서에는 읍루를 말갈이라 하였으니, 말갈은 읍루의 별명인데 그 音義는 아직 고증치 못하였고,

五, 濊도 또한 “오리”강으로 득명한 자인데 다음의 오리강은 永平部의 灤河니, 예가 처음 난하 부근에 立國하였으니 逸周書에 令枝와 管子의 離枝가 다 예의 漢譯이며, 예가 차차 동천하여 두만강 내의 연안에 분포하였으니 韓人 長良이 力士를 구하던 滄海國과 漢武와 戰하던 南呂王의 창해국이 다 그것이요, 그 일부가 다시 남하하여 금 강원도 등지에 분포하였으니 삼국지의 예가 다 그것이다. 삼국사기에는 혹 읍루 즉 말갈을 예로 기한 곳도 많으니 고구려 태조본기에 率馬韓濊貊과 김인문전에 高句麗負固與濊貊同惡 등인데, 선유들이 다만 예란 字面만 좇아 그 계통을 구하므로 예의 家譜가 비상히 착란하게 되었으니 그 상세는 따로 專論이 있어야 할 것이라 여기므로 아직 중지한다.

右 五국 가운데 옥저 예 양국은 고구려에 복속한 자로 독립한 왕국이 아니니 五국의 지리강역은 선유의 고증이 대략 옳으나, 다만 북부여를 금 開原이라 함은 그 말엽에 遷居한 서울을 그 원 주둔지로 오인한 것이다. 5국이 다 후삼한과 그리 핍절한 관계가 적었고 가장 관계가 많았던 자는 낙랑 대방 양국이어늘 삼국지에는 이를 궐하였으니 次節에 약론코자 한다.

3.6. 후 삼한과 낙랑 대방의 관계[편집]

樂浪, 樂良, 平那, 平壤, 百牙 등을 모두 “펴라”로 독함이 가함은 이두문 해석법, 평양 패수고, 동서 양 낙랑고 등 편에 詳見하였거니와, 낙랑국이 당시 열국중 후삼한과 가장 핍절한 관계를 가졌음은 신라본기의 신라 초대와 백제본기의 백제 초대에 낙랑의 침구가 빈번한 사실에 거하여 명백하거늘 선유들이 중화 역대 사가의 붓에 속아 평안도를 할양하여 漢의 낙랑군을 만드는 동시에 낙랑국을 이동하여 강원도 춘천군에 특설한 것이다. 무엇에 의하여 춘천을 낙랑이라 하느냐 하면, 백제본기 온조 十三년의 東有樂浪이란 일구가 그 유일한 증거라 하나, 그러나 동서 양자 상환고에 보임과 같이 삼국사기에는 동서 양자가 많이 상환되어 있다. 낙랑국의 왕의성은 최씨니 그 기원을 확증할 수 없으나 대개 箕準, 衛滿의 際에 평안도를 할거하여 일시 雄强하여 그 뒤에 자주 남방의 신라 백제를 侵逼하더니 그 末王崔理가 고구려 왕자 호동을 狼林山의 森林(沃沮) 같은 곳에서 만나 그 용모의 미수함에 혼탁하여 맞아서 사위를 삼았다가 고구려에게 망하였으나 그 소속한 수십 소국이 그 宗國 최씨의 멸망을 한하여 고구려에게 不服하고 西方으로 漢을 통하여 이에 한의 세력이 낙랑에 침입됨이다.

그러나 한의 낙랑국에 대한 관계가 明의 海蔘威, 松篁營 등지 諸南衛와 같이 漢 관리의 족적이 이곳에 오지 아니하며 漢帝의 詔令이 이곳에 미침도 아니요, 낙랑군은 낙랑국에서도 천여 리를 더 가나 요동에 있는 군명이니, 한 무제가 위만을 멸하고 이상적 군현으로 진번 현도 임둔 낙랑 사 군을 만들려 하였으나 조선의 저항이 강경하여 동북에서 卒本扶餘(後來의 고구려)가 起하매 진번 현도 二 군이 공상이 되고 말고, 압록강 동에서 낙랑국 최씨가 기하매 낙랑 임둔 二 군도 공상이 되고 말았거늘, 遼東 界內에 낙랑 현도 등 四 군을 허설하여 사책을 장식할새 최씨 망후(고구려 대무신왕과 한 무제의 際) 낙랑 열국의 교통을 인하여 그 열국의 名을 가져다가 그 虛說한 낙랑군 가운데 허설한 낙랑 諸縣의 名을 만들고, 고구려와 고구려 속국인 蓋馬, 殷臺 등의 명을 가져다가 허설한 현도 三 현의 명을 만들었으며, 그뿐 아니라 최씨 망후 수십년만에 대방국이 長湍 등지에서 起하여 六, 七 소국의 맹주가 되어 비록 그 주권자의 성명과 國祚 長短은 사책에 보이지 않았으나, 백제본기 책계왕 원년에 백제왕의 처 寶菓의 父 대방왕이 現하였으며, 기림니사금 三년에 낙랑 대방 양국의 服한 사실을 記하였으니, 그 일시의 소왕국 됨이 명백한데, 漢家帝王들은 이를 따라 또 요동에 대방군을 虛設하였거늘 歷來 우리의 조선 사가들이 매양 조선 古記와 중국사의 충돌되는 사실을 억지로 조화하느라고 고기를 刪改塗抹함이 적지 아니한 중 낙랑의 사실은 피차 모순이 더욱 심하므로, 조화에 더욱 고심하여 삼국사기에 백제 온조왕과 교섭한 낙랑왕을 낙랑태수로 杜撰하였으며, 삼국유사에는 漢의 없는 州名의 平州와 없는 관명 都督을 내어 四郡二府說을 날조하여 此等의 망필이 많으므로 그 일반의 訛誤를 발견키에 더 곤란케 되었다. 여하간 중국사 중 조선 일을 가장 자세히 적은 삼국지에 낙랑 대방이 빠지므로 전후의 맥락이 끊기어 큰 결점이 되었다.

3.7. 후삼한과 북방 제국의 언어[편집]

당시에 가장 可驚할 사실은 현 조선 각 지방과 東三省 각지의 언어통일이다. 이제 삼국지에 거하면 고구려전에 言語諸事多與夫餘同이라 하며, 沃沮傳에 言語與句麗大同이라 하니 부여 옥저 구려 삼국의 지방은 곧 흑룡, 길림, 평안, 함경 등이니, 우 각지의 언어가 동일한 實證이요, 濊傳에 自謂與句麗同種其人性原慤少嗜欲有亷恥不請句麗言語法俗大扺與句麗同이라 한바 不請 二 자가 文理 不屬하므로 건륭제 흠정 삼국지의 고증에 請자를 諳의 誤라 하여 不暗句麗言語로 一구를 作하였으나 이는 臆斷이니, 후한서 조선열전이 삼국지의 것을 초록함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후한서 예전에는 與句麗同種言語法俗大抵相類其人性愚慤少嗜欲不請匄라 하였은즉, 삼국지의 不請句麗의 句는 匄의 誤며 麗는 疊載衍字니 그 본문이 不請匄言語法俗與句麗同일 것인데 不請匄가 一구요, 言語法俗句麗同이 一구며, 또 그러하여야 上文의 與句麗同種과 의사가 접속될 것이니, 예와 구려의 同言語임이 명백하고, 진한전에 비록 言語不與馬韓同이라 하였으나 이는 진한의 辰은 진인의 秦으로 위증하는 동시에 名國爲邦弓爲弧……有似秦人의 誣錄을 臆辨키 위하여 쓴 것이요 實錄이 아니며, 진한이나 마한에 臣智, 邑借 등 동일한 관명이 있고 다른 異言語의 證跡이 없으니 또한 동일한 언어이었던 것이다. 다만 낙랑 대방 兩傳이 궐하므로 삼한과 고구려 등의 중간연락이 끊어지며 따라서 낙랑 대방이 부여 고구려와의 언어관계가 어떠하였던지, 삼한이 낙랑 대방과 언어관계가 어떠하였던지 삼국지에는 기재가 없으나 신라의 樂曲般涉調를 백제인이 노래하며, 고구려의 來遠城과 백제의 無等山을 신라인이 노래하며, 호동이 고구려 궁중 미성년 동자로서 낙랑에 入하여 최왕의 여와 연애를 성취하며, 서동이 백제 궁중 一六세의 묘령 태자로 신라에 逃入하여 群童을 꾀어 노래를 짓고 선화공주를 유인한 사실 같은 것이 모두 삼한 낙랑 고구려 등의 언어가 서로 通曉되었음을 설명한다.

그러면 경상도의 신라, 경기 충청도 등의 백제, 강원도의 예, 평안도의 낙랑, 함경도의 옥저, 길림 봉천 흑룡 등의 부여와 고구려가 다 언어가 동일하던 실증이 있었다. 오직 읍루 일부가 언어가 좀 다르므로 후한서에 挹婁在東夷中言語獨異라 함이나, 그러나 읍루는 滿淸族의 先代니 만청과 조선의 고어가 상통되는 것이 많은즉 이것도 아주 懸殊한 언어는 아니었던 것이다. 설령 소부분인 읍루를 제외할지라도 고조선 全幅, 즉 금 조선 一三도와 금 關東 三省이 고대의 언어가 통일된 민족으로, 또 사책에 의하여 보면 그 관제와 풍속은 더욱 차이가 적었던 것이다. 영국사를 보면 一六세기까지도 런던과 웨일즈의 相近한 지방으로도 언어가 불통하여 웨일즈의 어느 항구에 정박한 상인이 계란을 사서 먹으려 하나 에그란 말을 알아 듣는 자가 없어 손으로 卵의 모양을 형용한 결과 감이 나오며 배가 나왔다는 笑話가 있으며, 그밖의 서양 열국이 모두 근세교육이 발달되기 전에는 一국내에 각종의 언어가 있어 지금까지도 그 惰習이 遺存한 나라가 많으며 중화는 문물과 정치가 통일된 지 수천년이나 지금에 동일한 省內에서도 언어 불통되는 곳이 많거든, 하물며 百里不同風, 千里不同俗이 하던 고대이랴. 조선은 고대에 적지 아니한 강토에 언어 풍속이 남보다 먼저 통일된 민족으로서, 망망한 고대에 수두 神木하에 神權政治的통일이 있은 이후에는 다시 정치통일이 행해지지 못하고 압록강 以西를 割棄하며, 게다가 또 매양 북방 대국의 문화와 위력을 자뢰(藉賴)한 연후에야 구구한 소통일(小統一)의 국가로 존재케 되었으니 이것이 무슨 원인인가.셔서 하도 답답한 마음에 이 글을 올리려고 합니다. 
출처 https://ko.wikisource.org/wiki/%EC%A1%B0%EC%84%A0%EC%82%AC_%EC%97%B0%EA%B5%AC_%EC%B4%88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