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 이 남자 같기를…보통사람들의 영웅 박지성
《평발인 줄도 모르고 열심히만 뛰면 되는 줄 알았던 미련퉁이 축구선수가 있다. 20세가 되던 해인 2001년 어느 날 그는 경기를 뛰고 나니 발이 퉁퉁 붓고 너무 아파 병원을 찾았고 의사는 “평발이니 되도록 뛰지 마라”고 말했다.
자신이 평발이라는 사실을 축구선수가 된 지 10년이 지나서야 안 것이다. 더벅머리에 아직도 여드름 자국이 남아 있는 얼굴. 순박한 시골 청년 같은 그가 바로 ‘한국축구의 심장’ 박지성(25·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다.》
박지성은 질그릇처럼 투박하고 우직하다.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난 박지성은 경기 수원시 산남초등학교 3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다.
아버지 박성종(48) 씨는 외아들이 공무원이 되기를 바랐지만 축구선수로 재능을 보이자 경기장을 줄곧 따라다니며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한 열성 아버지였다.
박지성은 아버지, 지도자, 선배의 말이라면 곧이곧대로 믿고 따르는 순둥이다. 입이 짧은 박지성이었지만 당시 정육점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체격을 키워야 한다며 매일 돼지고기와 쇠고기를 장만해 주어도 싫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수원공고 시절 “여자친구 만들면 선수 생명 끝난다”는 선배 말을 듣고 미팅 한번 하지 않고 운동에만 열중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박지성은 여자친구가 없다.
‘바른생활 청년’ 박지성. 순수하고 성실한 덕분에 잉글랜드 프로축구리그의 ‘호랑이 감독’ 알렉스 퍼거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도 박지성에게만은 다정다감하다. “건방지다”는 불호령과 함께 축구스타 데이비드 베컴에게 축구화를 던진 다혈질의 감독이지만 말 잘 듣고 성실한 박지성만 보면 미소를 감추지 못한다.
이적료 74억 원, 연봉 35억 원에 한국인 최초의 프리미어리거가 된 박지성이지만 긴 무명 선수 생활을 겪었다. 수원공고 시절 가냘픈 몸매에 평범한 그를 데려가려는 대학이나 프로 팀이 없었다. 당시 이두철 수원공고 코치가 은사였던 김희태 전 명지대 감독에게 박지성을 추천했다. 대학에 입학한 뒤에야 웨이트트레이닝으로 힘을 기른 그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고 허정무 현 전남 드래곤즈 감독이 이끌던 올림픽대표팀에 합류하며 재능을 활짝 피웠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는 거스 히딩크 감독을 만나면서 국제적인 스타로 발돋움할 기회를 잡았다.
19일 열린 2006 독일 월드컵 프랑스전에 공격수로 나선 박지성. 이 경기에서 그는 ‘투혼의 질주’를 펼쳤다.
“컨디션이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기회가 별로 많이 오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고요….” 프랑스전에서 동점골을 넣으며 한국을 위기에서 구해 낸 박지성은 악조건 속에서 뛰었다고 말했다.
양 팀 모두 체력이 바닥나 가던 후반 36분. 특유의 달음박질로 프랑스 문전 앞에 다다른 그는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재진의 헤딩 패스를 받아 프랑스의 골문을 흔들었다.
“지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골을 넣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재진이가 공을 받을 때 공을 줄 곳이 한 곳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세계 대부분의 언론은 경기 전부터 한국의 패배를 점쳤다.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던 프랑스의 위용은 거대했다. 슈퍼스타 지네딘 지단과 티에리 앙리는 한국팀에는 ‘골리앗’이었다. 한국은 전반 9분 만에 골을 빼앗기고 끌려 다녔지만 결국 박지성의 골로 위기에서 탈출했다.
13일 토고전에서도 선제골을 잃고 끌려 다닐 때 대역전극의 발판을 마련한 것도 바로 박지성이었다.
한국은 그의 질주에 환호했다. 그리고 보통사람들의 영웅인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되고 있다. 붉은악마 독일 원정 카페를 비롯한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는 ‘대한민국 축구의 기둥’ 등 박지성을 칭찬, 격려하는 수백 개의 글이 게시됐으며 ‘박지성 어록’과 ‘지성이의 일기’를 찾아보는 사람이 급속히 늘고 있다. 박지성의 사진과 함께 인터넷에 돌고 있는 ‘박지성 어록’에는 ‘불가능이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어야 한다’, ‘쓰러질지언정 무릎은 꿇지 않는다’, ‘도전이 없으면 큰 성공도 없다’는 등의 글이 실려 있어 그의 강인한 정신과 성실함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런 박지성이 있어 너무 행복한 6월이다.
라이프치히=이원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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