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과 나치즘의 영향
-마티아스 퀸첼(Matthias Kuentzel)
맨해튼의 고층빌딩을 자폭특공대를 이용하여 파괴시킨다는 발상은 1940년 베를린에서 태동했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전쟁 막바지에 히틀러는 마치 미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우리에게 뉴욕의 빌딩들이 불에 탈것이라며 자신있게 말했다. 그는 뉴욕의 거대한 고층빌딩이 마치 거대한 횃불처럼 변하고 무너지는 광경을 묘사했고, 화염이 칠흙같은 어둠을 비출 것이라고 했다."
히틀러의 망상은 망상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9.11을 예고하는 실제 액션플랜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폭탄을 가득 실은, 게다가 착륙장치도 없는 비행기를 이용해서 맨해튼을 타격하고자 했다. 1944년 초 그는 다임러-벤츠 아메리카봄버(Daimler-Benz Amerikabomber)라고 불린 거대한 비행기를 그렸고, 이 거대한 비행기에는 보다 폭탄을 실은 자살특공대 비행기가 딸려있었다. 모체 비행기가 미국 동부해안에 다다를 때 작은 비행기들은 모체로부터 분리되어 맨해튼을 타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히틀러가 맨해튼을 불바다로 만드려고 했던 것은 단지 군사적 상대를 무력화시키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유대인을, 세계 어디에 있던지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사실상 국제 유대인들을 상대로 하는 성전이라는 망상에 빠진 그는 "미국을 유대국가"로 규정했고, 뉴욕을 "국제유대인의 중심지"로 여겼다. 1919년 뮌헨에서 발간된 한 인기있는 서적은 "월스트리트"를 "유대인들의 군사본부(military headquarter of Judas)이며 이곳에서부터 국제유대인의 마수가 전세계로 뻗어나간다"라고 묘사했다. 1941년부터 히틀러는 뉴욕폭격에 집착했고, 이를 통해 "유대인들에게 섬뜩한 교훈을 주고자"했다.
공교롭게도 60년 후, 9.11 테러가 독일에서 계획되었다. 북쪽 타워로 비행기를 조종한 이집트인 무함마드 아타, 남쪽타워를 타격한 UAE국적자 마르완 알셰히, UA93편을 조종한 레바논인 지아드 자라, 그리고 모로코 학생이었던 알-모타세데크 등은 독일 함부르크에 알카에다 지부를 세웠다.
아타와 그의 동료들이 이런 생각을 품게 된 배경이 무엇이었을까? 2002-2003년 동안 함부르크에서 진행된 알-모타세데크의 재판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함부르크 지부의 꾸란연구회에 참석한 샤히드 니켈스는 아타의 세계관이 "나치사상"에 기반한다고 증언했다. 아타는 유대인들이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며, 그들의 중심지는 뉴욕이라고 말했다. 모타세데크와 같은 방을 사용했던 기숙사 동료들은 모타세데크 또한 그러한 시각을 공유했고, "거대한 일"이 벌어질 것에 대해 흥분해있었다고 말했다. 다른 학생은 모타세데크가 "유대인들이 불에 타고 그들의 무덤에서 우리는 춤을 출 것이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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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마 빈라덴 또한 이러한 反유대사상을 공유했다. "그는 우리와 유대인 사이의 적대는 뿌리가 깊다"고 말했다. "우리와 유대인 사이의 전쟁은 불가피하다...부활의 날은 우리가 유대인과 싸우기 전에 오지 않는다."
심지어 2002년 그는 "미국 인민에게 전하는 편지"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대인들은 당신들의 언론을 장악했고, 당신들 삶 모든 부분을 지배한다. 당신들은 그들의 노예가 되었다."당신들의 법은 부자들만을 위한 법이며, 그 뒤에 유대인들이 있다. 그들이 당신들의 정책, 언론, 그리고 경제를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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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주의는 1960년대에 태동한 것이 아니라 1930년대에 발흥한 것이다. 이슬람주의의 흥기는 나세리즘의 실패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나치즘의 궐기로 나왔다. 사실 1951년 이전, 이슬람운동의 표적은 식민주의자들보다 유대인들을 향했다.
이슬람주의를 하나의 거대한 운동으로 만든 것은 1928년에 조직된 "무슬림형제단"이다. 이슬람주의에 있어서 무슬림형제단의 역할은 공산주의에 있어 볼셰비키의 역할에 비견될만하다. 영국의 식민정책이 이슬람주의를 부추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슬림형제단의 지하드는 영국을 상대하기보다, 유대인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1936-38년 사이 2년 동안 무슬림형제단의 주된 운동은 反유대운동이었다. 유대인들의 이민을 반대하는 운동이었고, 이를 주도한 것은 예루살렘의 이맘 아민 알-후세이니였다. 형제단은 이집트의 여러 도시에서 반유대 슬로건을 내세웠고, 유대인 상인들을 보이콧했다.
형제단의 反유대 캠페인은 나치와 유사한 전술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나치로부터 자금까지 지원받았다. 카이로 주재 독일 언론인 빌헬름 슈텔보겐의 자택에서 입수된 문서에 따르면 무슬림형제단은 1939년 10월 전까지 계속 독일로부터 지원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형제단에게 지원된 자금은 다른 反英단체들이 받은 지원금보다 월등히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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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민 알 후세이니, 그는 누구인가?
아랍세계에서는 위인,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의 대부로 여겨진다.
하지만 극단적인 지하디스트이며, 반유대주의자이다. 하인리히 히믈러와는 나치 정권이 수립되기 전인 1933년부터 서신을 교환하던 사이였고, 나치의 반유대사상에 깊이 심취해있었다. 그가 준동한 1936년의 시위는 유대인과 공존을 주장했던 당시 예루살렘의 시장을 포함한 같은 아랍인 136명을 살해했다. 또한 그는 공개적으로 독일인들처럼 "유대인에 대한 최종 솔루션"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943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슬림 세계에서 유대인들을 모조리 추방하는 것이야 말로 무슬림과 아랍인들의 의무이다. 독일 또한 이 공적과 싸우고 있다. 유대인들이 어떤 족속인지는 너무 자명하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종정책을 찾아야 한다. 유대인들은 세계를 위험에 빠뜨린다."
또한 그는 홀로코스트가 진행중인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이주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았다. 그는 헝가리 관료에게 헝가리의 유대인들을 폴란드의 수용소로 보내는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이 팔레스타인에 오는 것만큼은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전쟁 말기 독일에 주재하면서 독일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특히 무슬림의 참전을 독려하였으며, 독일군에 입대하는 것을 선동했다.
전후 그는 전범 혐의로 기소되어 그는 스위스에 망명을 신청했는데 스위스는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프랑스에 가서 자택연금을 당했다가 곧이어 모종의 정치적 이유로 석방되고, 이집트는 그의 망명을 받아주었다. 그 후 후세이니는 계속 열정적으로 신생 이스라엘 국가를 반대하였으며, 전쟁을 선동하였고 나중에는 팔레스타인 독립 운동의 국부로 추앙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