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경당이 자기 쿠데타 도와주면 동북의 연운 16주를 거란에게 바치겠노라고 약속했었죠. 이렇게 빌빌거리다 보니 자기보다 열살어린 야율덕광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는 웃지못할 사태까지 탄생. 그런데 후진이 망한 다음 세워진 후주에서는 세종 시영柴榮때에 거란에 강경하게 대응합니다.
959년 4월, 전전도지휘사 조광윤은 와교관瓦橋關에 당도하여 거란 장수 요내빈姚內斌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거란은 고비사막 이북에서 유목을 하며 여유를 즐겨왔소. 석경당이 도道를 잃어 연운 16주를 거란에 넘겼고, 그 후 거란은 밭농사를 하면서 국경을 지키느라 백성들이 시달리고 있소. 오늘 진노한 중국은 연운을 잃은 수치를 씻기 위해 백만대군을 출동시켜 잃은 땅을 되찾으러 왔소. 거란이 저항한다면 피가 강을 이루고 백만 시체가 떠내려갈 것이오. 항복하고 잃은 땅을 돌려준다면 피를 흘리지 않게 될 것이니 큰 덕을 쌓는게 아니겠소?"
이에 마음으로 굴복한 요내빈은 투항하였고, 어구관瘀口關에서도 이 소식을 듣고 투항하였습니다. 거란의 막주자사 유초신, 계주 출신 영주자사 고언주 또한 성을 버리고 연달아 투항하게 되는 행운이 후주에 돌아옵니다.
그렇게 다시 회복한 영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