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진짜로 의대 가고 싶다면 이 글을 볼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화성인에 나온 어떤 의대생보다 잘나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 의대보다 좋은 데 가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요즘은 의전 없어지면서 정원이 늘어나서 제가 입시를 치를 때보다는 쉬울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현재 의대 재학 중인 학생입니다. 올해부터 실습 시작해서 삶에 여유가 넘치는 본과 통틀어 가장 잉여잉여한 기간을 보내고 있죠.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서 글도 쓰고 주제 넘지만 충고 하나 해 주고 싶어서 글 남기게 되었습니다.
오늘 베오베에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좋아하는 재수생 한 분이 오덕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바로잡기 위해서 의대를 지망한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물론 저 이유 하나만으로 진학한 것은 아니라고 믿지만, 좀 더 명확한 동기가 필요한 것 같아서 한 말씀 드립니다. 음... 우선 제가 입학한 동기부터 얘기를 해야겠네요. 저는 그냥 의사 면허가 필요해서 진학하였습니다.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이용해서 좀 더 특별한 일이 해 보고 싶었죠. 이건 아직 구상 단계라서 길게 얘기할 게 없네요. ㅎㅎ....
사회 공헌 같은 대단한 게 아니라 그냥 뭔가 특별한 일이 해보고 싶다는 나름 이기적인 이유로 진학했습니다만 들어와서 참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예과 시절이야 대충 공부해도 상관 없습니다만, 본과 공부는.... 휴... 한 번 시험 보려고 제가 정리한 노트가 100페이지 가까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시험을 한학기에 20개 정도 보고요. 다른 대학에서도 공부 많이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의대에서는 저 시험 중 하나라도 F가 나오면 1년짜리 커리큘럼을 다시 들어야 합니다. 다른 대학에 없는 저 유급이라는 게 사람을 많이 피폐하게 만듭니다. 학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많은 의과대학에서 과목 하나만 F 나와도 1년을 쌩으로 다시 다니게 될 수 있습니다. 의대 생활 중에서 성적이 잘 나오고 싶다는 욕구도 있지만, 공부하기 정말 싫은 과목 억지로 공부하면서 유급 당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저를 가장 힘들게 하였습니다.
글쓴 분이 저보다 똑똑하고 노력도 많이 해서 저런 두려움을 경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의대 생활은 누구에게나 힘듭니다. 고작 남들의 시선 하나 바꿔보겠다고 입학하는 건 좀 나이브한 생각인 것 같네요. 무엇보다 남들보다 좀 더 마이너한 취미를 갖고 있는 사람이 공부를 잘 한다고 해서 인식이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저는 학교 독서실에서 가끔 만화책도 보고 그렇습니다만 주변의 시선은 '오타쿠라고 다 나쁜 건 아니구나'보다는 '의과대학에 독특한 놈이 들어왔네' 이 쪽에 가깝습니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순 없지만, 누가 무슨 취미를 가지고 있는 건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만화를 좋아하나보다 뭐 이러는 거죠.
남의 시선 의식해서 의대 진학하는 것보다는 안정적으로 중산층 생활 하고 싶어서 의대 간다는 쪽이 저에게는 더 긍정적으로 보이네요. 취미 생활로 남을 함부로 판단하는 건 분명히 옳지 못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뭔가 보여주기 위해서 의대를 진학한다? 그럼 말 그대로 학벌 하나로 그런 사람들 찍어 누르는 건 그럼 올바른 일인가요? 남들에게 보여줄 걸 찾지 말고 자신이 원하는 걸 찾으세요.
공부하느라 힘들텐데 괜히 고민을 더 만드는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 의사가 된다는 것 하나만으로 선민의식 가지는 주변 사람들이 많아서 글 쓴 분도 그렇게 될까 하는 노파심에 이런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6월 모의고사도 만족스럽게 치르셨다고 하셨는데 긴장 늦추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세요. 그리고 꼭 원하는 대학 진학하시길 바랍니다.
P.S. 혹시라도 나중에 입학하게 된다면 유급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유급 안 당하고 잘 다닌 걸보면 영혼을 다해서 놀아야 유급 당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