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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화상경과 日十 대왕
게시물ID : history_2520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요들의유머
추천 : 1
조회수 : 94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1/29 18:38:53
7-2 인물 화상경

스다하치만 신사 인물화상경(일본어: 隅田八幡神社人物像鏡)은 와카야마 현 하시모토 시에 소재하는 스다하치만 신사에 있는 5~6세기경 제작된 청동 거울이다. 거울에 48글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일본 고대사, 고고학, 일본어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위키 피디아

 

시골 농부가 밭을 갈다가 발견했다는 이 인물 화상경에 세겨진 48자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명문은 보통 이런 식으로 많이 해석을 하고 있다.

 

癸未年八月日十 大王年 男弟王在意柴沙加宮時

斯麻念長寿

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

取白上同二百旱作此竟

계미년(503년) 8월 10일 대왕의 연간에 남동생인 왕을 위하여 오시사카궁(忍坂宮)에 있을 때 사마(무령왕)께서 아우인 왕 혹은 오오토왕의 장수를 염원하여 보내주는 것이다.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두 사람을 보내어 최고급 구리쇠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도다.

 

일단 거울에는 2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백제 무녕왕의 이름인 사마 그리고 일본서기 계체 천황의 이칭인 오오토왕이다. 거울에 계미년이라고 하였으므로 442년 502년 562년등 간지에 따라 여러 가지로 추정이 가능하나, 사마왕과 남대적 천황, 즉 일본서기의 계체 천황이 생존했던 해는 502년이 유일하다.

 

이 502년은 열도와 백제에서 참으로 중요한 해인데 일단 무녕왕 즉위년이 501년이고 송서 왜 5왕이 마지막으로 중국 정사에 기록된 해가 또 502년이다.

찬진제흥무로 기록된 중국 정사인 송서에 등장하는 이 5명의 왕은 혈연 관계가 기록되어 있고 성씨를 왜 倭로 하여 조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왜 왕조는 수서에 등장하는 아메다리사비고가 등장하기까지 아무런 기록이 없는데, 이 502년을 기점으로 해서 왜씨 왕조 대신에 성을 아메로 하고 이름을 다리사라고 하는 일본서기 신대기의 아마테라스 오오가미를 연상시키는 왜왕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시기가 아마도 열도에서도 왕조의 교체가 이루어지는 시기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백제 무녕왕이 등극하고 열도에서 왜씨 왕조인 송서 왜 5왕이 사라지고 이런 중요한 사건들이 인물 화상경에서 대왕의 원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501년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이 거울에 세겨진 첫 문장 계미년 8월 십알 대왕 (원)년이라고 하는 부분은 참으로 중요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癸未年 八月 日十 大王年

통상적으로는 이 부분을 계미년 8월 일십 대왕의 해 라고 해석을 한다. 이런 해석이 참으로 곤란한 부분이 고대의 금석문에 제작 시기를 적는 것은 물론 후손들에게 이 유물이 언제 만들어졌다. 라는 기록을 남기기 위함인데 거기에 대고 대왕의 이름을 적지 않은 대왕년이라고 하는 기록을 남길 까닭은 없다. 앞의 일십이 날짜를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냥 십일로 적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에

저 문장은 계미년 8월 일십 대왕의 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학계와 일본학계 모두 대왕년이라는 해석이 이런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대왕년이라고 해석하는 배경에는 일십대왕이라고 하는 존재가 한반도 사서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그리고 기기에도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일본서기라고 하는 책이 역사를 전달할 목적이 아니라 실제 역사를 뒤집어서 가공의 역사를 만들어 내는 것이 목적인 책이라고 한다면 저 일십 대왕의 이름을 추적하는 것은 기기를 곧바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여기에서 한번 열도의 백제 계열 신화에 대해서 주목해보고자 한다.

일본 미야자키현의 남향촌에서 행해지고 있는 시와쓰마쯔리의 이야기는 이렇다. 백제 정가왕과 그 아들 복지왕이 열도에서 전쟁 때문에 헤어졌지만 다시 만난다는 설화를 모티브로 행해지고 있는 이 축제는 현재도 행해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20세기 초까지도 이 축제는 9박 10일에 걸쳐서 행해졌다고 하는 것인데 지금은 간소화해서 9박 10일에 걸쳐서 행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DpNe_Z-1nFc

동영상 참조

이 설화의 시대적 배경은 백촌강 전투 이후지만 열도에서 이 시기에 백제인들이 전쟁을 했다는 설화 내용과 당시의 시대는 맞지 않는다. 필자는 9박 10일이라고 하는 고대 열도의 백제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신화소가 일본서기에 반영이 되었다고 본다. 그것은 백제 근구수 태자를 모티브로 해서 창작된 일본서기 경행기의 일본무존 편에 9박 십일에 대한 비유가 나온다.

이날 밤에 일본 무존이 노래로 시중드는 이에게 물었다.

“ 신치( 新治) 축파 (築 波) 를 지나서 몇일이나 잤는가?” 여러 시자들이 대답할 수 없었다. 촛불을 든 자가 왕의 노래 끝에 붙여서 노래로 답하였다

“ 일수日 數를 헤아려 보니 밤으로는 九 夜 , 낮으로는 十 日 입니다 “

백제왕 부자의 전설의 중요한 신화소였던 9박 십일이 일본서기에서는 일본무존의 입을 통해서 수수께끼의 노래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기기와 반도계열 사서인 삼국사기 등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백제인과 백제 근구수왕을 모티브로 해서 창작된 일본무존의 설화에서 그리고 인물 화상경을 통해서 유추해볼 수 있는 실제 역사는 아래와 같다. 신치와 축파라고 하는 것은 지명일 수 있겠지만 역시 신라 통치의 시기와 축파 열도 가야의 파도를 지나야만이 밤을 지나고 낮이 된다는 비유는 열도 백제의 역사를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신화가 아닐 수 없다. 열도 백제의 시작은 백제 근구수왕으로부터 시작하였지만 열도에서 백제가 다시 주도권을 잡는 시기는 백제 근구수왕으로부터 9명의 왕을 거친고 나서 무녕왕이 되어서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9명의 왕의 시기는 열도에서 신라인 그리고 가야인들이 백제인들보다 우위에 있던 시기이다. 백제가 다시 근구수왕 시절로 돌아가서 열도와 반도를 총괄하는 대왕의 시기로 회귀하는 것은 근구수왕 이후 9명의 왕을 거쳐 백제 무녕왕이 등극하는 502년이 되어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무녕왕 다른 이름으로 일십대왕이라고 자신을 칭했던 백제왕은 자신의 등극시기인 502년에 일십대왕 원년이라고 적힌 유물을 열도의 백제계열 통치자인 남대적왕에게 보냈을 것이다.

 

근구수왕  > 침류왕 > 아화왕 > 전지왕 > 구이신왕 > 비유왕 > 개로왕 > 문주왕 > 삼근왕 > 동성왕 > 무녕왕  ( 진사왕은 열도와 상관없음 )

 

 

앞의 성예초에서 보았듯이 백제 근구수태자 시절의 부활을 꿈꾸는 것이 열도 백제인들에게 태자 신앙으로 구현되었듯이 백제 근구수왕이 9개의 밤을 지나 10번째 무녕왕이 되어서 다시 자신들의 왕이 대왕이 된 이야기는 노래와 축제를 통해서 백제인들 사이에서 전해졌을 것이다. 인물화상경의 일십 대왕은 그렇게 적혀

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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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9 18:3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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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 안드로메다 성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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