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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한제국 군사제도 개혁 글 보충- 기기창 운영을 중심으로
게시물ID : history_2515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궁장전
추천 : 10
조회수 : 1443회
댓글수 : 39개
등록시간 : 2016/01/26 16:27:52

기기창은 1881년 영선사를 파견한 이후, 텐진에서 공장을 고용하여 운영되기 시작한 첫 근대무기 제조기관입니다.

다만, 그 역사적 의의와 별도로 실제로 기기창을 운영함에 있어 상당한 난관과 한계에 부딫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는 1881년부터 기기창이 사실상 문을 닫았다고 서술되는 1894년 청일전쟁까지 기기창에서 대규모 군수물자를
생산하지 않았고 이후 유명무실하다고 서술되어 있으나 프랑스 등에서 기술자를 초빙하여 운영하였던
대한제국시기에도 물자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아 추측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해 여러가지 이유가 제시 가능합니다.

우선, 전 글에서 제가 장황하게 언급하였듯이, 고종은 징병제를 통한 대규모 국민군, 총부리를 자신에게 돌릴 수있으며 돈을 어마어마하게 빨아 먹을, 보다 소규모의 '정예화'된 용병군을 원했기 때문에 대규모의 군수물자 생산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용병제하에서 비교적 적은 수의 군대를 보유했던 조선-대한제국에서는 , 최소한 근대무기를 다루는 훈련을 받은,  그때 그때 필요한 물자를 서구나 일본에서 사들이는 것으로도 충분했을 것으로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징병제를 통해 육성할 수 있는 예비군을 위한 군수물자의 비축이 필요 없었기 때문에 군수물자 생산을 위한 투자에 인색했을 것입니다.이는 총기와 같은 무기류 뿐만 아니라 군인들에게 지급하는 피복류, 군화, 장구류 등의 구비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인데 적은 수의 군대를 위해 그것을 보급할 산업기반을 육성하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면서직관적인 방법인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을 통해 해결했습니다.이런 방식은 기기창의 유명무실화와 기반산업- 근대 중화학공업을 발달시킬 인적자원, 자본, 기술적 기반이 당시 대한제국에 없었지만-
발달 저해 뿐 아니라, 군대 그 자체에게도 상당한 약점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군대 내에서 상이한 무기들을 무장함으로써 탄약과 같은 소모품보급이 상당히 어려웠다고 합니다.

이런 문제는 현재 시각으로 보았을 때도 당시 기준에서도 상당히 획기적인 방법으로 해결합니다.
바로 평시에 근대무기를 사용 안하는 것입니다. No 소모, No 보충 Yes 절약
고종은 근대무기의 비싼 가격과 군수물자 도입의 난점과 여기에 군대의 근대적 장비 운용능력에 대한 의문
때문에 평상시에 근대장비를 사용하지 말고 모아 놓고 관리하라고 명령합니다.
더욱이 군부예산의 어려움 때문에 대한제국군 예산은 군대의 유지와 봉급지불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습비(0.1%)에 투자된 비중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근대장비를 이용한 대규모 훈련, 사용이
필요없었기 때문에 군의 최고 지휘관인 고종의 결정이 이뤄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를 통해 프랑스 기사가 초빙되면서 기기창의 역할에 변화가 생겼을 것이라고
추정될 수 있으나 청일전쟁 이후 이 기관이 유명무실해졌다고 나와있듯이 이전의 역할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기기창 운영의 어려움은 기기창은  양무운동의 영향을 받았다는
그 자신의 태생적 한계와 더불어
군사제도 개혁의 퇴보 및 좌절과 궤를 같이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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