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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관을 뒤엎은 석장리 | ||||
<기고> 최창석 2014세계구석기축제위원장 .......................... 우리나라 구석기 연구의 최고 권위자 손보기 박사를 비롯한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팀이 바로 7개월 전에 미국인 알버트 모어(Albert Mohr)가 뗀석기를 발견한 그 장소에서 정식 발굴 허가를 얻어 수만 년 전의 역사를 뒤지기 위한 삽질이 시작된 것이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발굴로서 최초의 유물이 발견되었고 제 1지구 81구덩이에서 수만 년 전의 뗀석기인 찍개, 긁개, 찌르개, 좀 돌, 날몸 돌 등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이로부터 우리나라 한반도의 역사는 바뀌어 가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까지만 하더라도 한반도에는 구석기 시대가 없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역사교과서가 그렇게 기술됐다. 1935년 두만강 변 함경북도 온성에서 동물뼈 화석과 석기 두 점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폄훼하는 일본의 식민사관에 의해 한반도의 구석기는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1964년 11월에 이 식민사관을 뒤 업는 쾌거가 우리 공주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공주에서 확정적인 전기, 중기, 후기 구석기의 유물이 발굴됨에 따라 1974년 우리 역사 교과서에 한국의 구석기가 처음 언급되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우리나라의 역 사는 반 만 년의 역사에서 30만 년 전의 역사로 무려 이십구만 오천년의 역사를 끌 어올리게 된 것이다. ................ http://media.daum.net/culture/others/newsview?newsid=20141111063205136 "공주 석장리 발굴 50년, 식민잔재 청산 역할" 연세대박물관·한국구석기학회 잇단 학술대회연합뉴스 입력 2014.11.11. 06:32 수정 2014.11.11. 17:54 1963년 고고학 조사차 한국에 머물던 미국인 앨버트 모어(Albert Mohr)와 샘플(L.L. Sample) 부부는 홍수로 무너져 내린 공주 석장리 강변에서 뗀석기를 채집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연세대 사학과 교수 손보기는 이듬해 5월 하순, 이들 부부와 함께 석기가 채집된 현장을 답사하고는 새로운 석기를 찾아낸다. 이에 연세대는 문화재관리국 허가를 받아 같은 해 11월 석장리에서 첫 번째 발굴을 실시한다. 한반도에서도 그토록 찾던 구석기시대 인류의 흔적이 마침내 발견되던 순간이었다. 한창균 관장은 "1960년대 전반은 한국의 구석기시대 연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이룩된 시기"라면서 "1962년 장덕리 유적(함경북도 화대군) 토탄층에서 털코끼리 화석이 발견되고, 이듬해 굴포리 유적(나선시)에 이어 1964년 석장리유적의 갱신세(Pleistocene) 고토양층에서 구석기시대 석기가 출토됨으로써 한반도 선사문화는 출발점이 그만큼 올라갔으며 한국 고고학사도 체계를 확립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북한의 굴포리 유적과 남한의 석장리 유적 발견은 한국 선사문화 연구에 끼친 일제강점기의 식민지적 잔재를 청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한반도에는 구석기문화가 없었다는 주장을 이들 유적 발견으로 뒤집어엎었다는 뜻이다. .................. http://www.gg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46466
............... 그러나 일제 강점기 시대에는 한반도에서 석기시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조차 식민 사관에 어긋난다고 하여 구석기 시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해방이후 국내학자들의 끈질긴 연구 결과 한반도에서도 구석기 문화가 폭넓게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1963년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에서 구석기 유적이 처음 발견되었으나, 1964년 5월 금강이 범람하면서 무너진 강기슭에서 발견된 석장리 유적은 우리나라 고고학 역사를 새로 쓰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 |
출처 | http://www.expres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1014 http://media.daum.net/culture/others/newsview?newsid=201411110632051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