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이야기 했듯 한국 강단사학자들이 한일 역사 공동 위원회에서 일본의 임나 일본부설을 격파했다고 자화자찬했을 뿐 일본인 학자들은 오히려 기존의 임나 일본부설 대신에 조금 더 세련된 방식으로 고대 일본이 고대 한반도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라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아마 그 중심이 전방후원분에 대한 이야기가 될 듯 하다. 전방 후원분 前方後圓墳 말 그대로 사각형 형태의 고분과 원형 고분이 결합된 이 특이한 모양의 고분 형태는 4-6 세기 열도에서 주로 보이는 것으로 일부는 한반도 전남 쪽에서 나타난다. 이것이 일본학자들에게 있어서 조금 세련된 형태로 고대 일본의 한반도 경영에 대한 근거로 사용되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그리고 이것은 고고학, 다시 말해서 인간의 주관이 개입된 문헌보다 더 신뢰성 높은 사료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전방 후원분에서 나타나는 더 중요한 특징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이들 고분에서 나타나는 백제 신라 계열 유물의 형태라든가 아니면 횡혈식 석실분 형태, 즉 안이 석실로 되어 있고 외부에 통로가 있어 피장자의 사후에도 꾸준히 제사가 이루어졌다는 것 등에서 이들 고분의 형태가 방분만 별도로 놓고 보면 결국 부여까지 연결이 되고 원분의 형태는 기존의 김해 대성동 고분과 같이 가야에서 그 기원이 찾아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안은 역시 신라 가야의 유물로 되어 있고 겉도 방분과 원분을 따로 놓고 보면 반도에서 기존에 있었던 묘제이다. 단지 열도 독창적인 것을 찾아본다면 이 방분과 원분이 합쳐졌다는 것 단지 그것 하나뿐이다.
대표적인 것이 에다 후나야마 고분일 것이다. 백제인의 열도 진출을 명확히 보여주는 이 금동관은 한국과 일본의 강단학계에서 교류의 산물이라는 식의 해석을 하지만 고대인들에게 위세품이 어떤 의미인지 학자들이 모를 리는 없고 역시 이 시기 열도의 지배층이 백제인이라는 부담된 결론을 피해 편향된 해석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한다. 물론 왜의 통치자가 백제 금동관이 멋있어 보여서 같은 것을 사용하다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는 설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역시 매우 비현실적이다. 어떻게 보아도 백제인의 고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의문점들이 남는다. 하나는 이 고분에서 단지 백제계 유물만 출토되는 것이 아니라 가야계열로 볼 수 있는 유물도 출토된다는 점 그리고 또 하나는 어째서 기존의 백제 부여계열 고분인 방분이 어째서 이 시기에 전방 후원분이라고 하는 특이한 형태로 바뀌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은 단지 고고학만 보아서는 알 수 없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고고학 사료들은 매우 신빙성 있는 사료이긴 하지만 고고학 사료 하나만 가지고 볼 때는 여러가지 가능성만 제시할 뿐 결국 고고학 사료가 제시하는 여러 가능성중의 하나가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역시 문헌 사료와의 교차 검증이 되는가 하는 부분일 것이다. 사실 전방후원분이 어떤 고분인지 하는 것은 이미 기존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좀 어처구니 없지만 단지 해석을 못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다시한번 앞에서 살펴 보았던 북사의 기록을 보도록 하자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敬仰之, 恒通使往來
1.신라 백제인들이 왜를 가지고 큰 나라를 만들었다
2.( 왜를 큰 나라로 만든 신라 백제인들은 ) 진기한 보물이 많았다
3.신라 백제인이 “ 함께 ” 그 보물을 경앙하였다
4.항상 사신이 왕래했다
물론 열도를 대국으로 만든 신라 백제인들이 경앙한 것은 보물이 아니었다. 보물로 표현된 신체를 경앙한 것이고 이는 물론 백제 신라 가야인들의 조상 숭배 사상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반도 계열의 칼 거울 방울 등의 유물이 전방 후원분에서 출토되는 것은 아마도 고조선의 삼종의 신기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북사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신라인과 백제인이 함께 보물을 경배했다는 문장인데,이것이 반도라고 한다면 수백년 내내 전쟁을 하던 신라 백제가 함께 조상에 제사를 함께 지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아마도 반도와는 다른 정치적 이해관계가 열도 신라 백제인들에게 있었을 것이다. 마치 본국의 지긋지긋한 종교 분쟁을 피해서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탔듯이 열도의 신라 백제인들도 본국의 분쟁과는 별도로 그들의 신을 함께 모시는 것이 상징하듯이 분쟁을 피해서 열도 안에서의 평화적인 공존을 꾀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백제 고분과 신라 가야계열 고분이 합쳐진 전방후원분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런 추론을 뒷받침 하는 문장이 앞에서 보았던 북사 신라의 기록이다.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初附庸于<百濟>,
<百濟>征<高麗>, 不堪戎役, 後相率歸之, 遂致强盛. 因襲<百濟>, 附庸於<迦羅國>焉
그 왕은(신라 왕은) 본래 '백제'사람으로 바다로 도망하여 '신라'로 들어가 그 나라에서 왕을 하였다.
처음 백제의 속국이었는데, '백제'가 '고려'를 정벌할 때,
혹독한 사역을 견디지 못하여, 후에 돌아와 강성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백제'를 공격하고,(백제의 풍습을 따르고) 가야국의 속국이 되었다.
-북사 열전 신라 중에서 -
흔히 통상적으로 알려져 있는 신라와 전혀 다른 이야기라서 보통 무시되지만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연수는 본격적으로 일본이 탄생하기 이전의 사관이다. 그가 현대 일본인들의 조상을 열도 신라인이라는 시각으로 역사를 서술한 것을 비난할 이유는 없다. 정작 비난 받아야 할 것은 기존 학계의 고정 관념과 다르다고 해서 중요한 사료들을 무시하는 경우가 아닌가 한다.
문장을 찬찬히 훑어 보면 물론 신라왕을 백제인이 했다는 기록은 반도 사서인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보면 터무니 없는 이야기지만 백제인이 바다를 통해서 들어갔다는 기록이 시사하듯 저것이 열도라고 본다면 저 신라왕을 한 백제인은 칠지도에 기록된 백제 근구수태자의 아들이라서 왜왕을 한 그 백제인이 될 것이고 그 연대는 369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전방후원분이 등장하는 시기는 4세기말 5세기 초엽이 된다. 이 열도 신라의 기록이 계속 서술이 되는데 이들은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에 대해서 노역을 담당하는 것을 거부하고 열도의 백제 신라인들이 서로 따르고 귀의하는 대등한 병합을 통해서 강성해졌다고 한다. 전쟁의 노역을 담당했다. 라고 하는 부분 역시 고고학에서 이야기 하는 4세기말 열도의 고분이 피장품에서 무기류의 증가가 눈에 띄었다는 점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역시 신라인과 백제인이 대등하게 합쳐져 있다는 문장일텐데
이것이 제사라고 하는 종교행위로 표현된 것이 열도의 신라인과 백제인이 함께 보물을 숭배했다는 기록일 것이다
이들은 마지막 문장에서 보듯이 처음에는 백제의 속국에서 독립하여서 이 독립 전쟁의 일환으로 백제를 공격하였다. 이것이 바로 신묘년 왜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결국엔 가야의 속국이 되었다한다. 반도 기준으로 보면 가야는 신라와 백제에 의해 점진적으로 분할점령되었지만 열도의 기준으로는 다르다. 열도에서 고구려의 괴뢰 정권이었던 가야 세력을 중심으로 이들 열도 백제 신라 세력들이 흡수되고 이것이 바로 송서 왜 5왕 시대로 연결이 되어진다.
전방 후원분을 고대 한국인 고대 일본인의 시각으로 보면 정말 수수께끼 같은 유적이 아닐 수 없지만 반도 신라 백제인과 열도 신라 백제인의 시각으로 보면 고대 중국 정사의 문헌이 고스란히 확인되는 알기 쉬운 유적이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