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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불바다론에 대해서 (서울 불바다 라고 검색해서 주워옴)
게시물ID : sisa_2511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피식...
추천 : 5/5
조회수 : 411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06/11/01 20:39:42
 94년 '서울 불바다' 발언과 2006년 '선군'발언 
참여정부는 결국 YS정부의 전철 밟나 
 
 최한욱 (실천연대 정책위원장)     
 
 
 
 
    
  

 미사일 문제로 한반도의 긴장이 크게 고조된 가운데 진행된 남북장관급회담이 소모적인 설전 끝에 아무런 성과도 없이 막을 내리고 말았다. 
   
  북측 대표단은 일정을 하루 앞당겨 지난 13일 회담의 결렬을 선언하고 철수해 버렸다. 
  북측은 철수 성명에서 ‘대화 일방의 성의와 선의를 받아들일 줄 모르는 대방을 타이르는데도 정도가 있고 인내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라며 남측 당국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본질적으로는 더 복잡한 문제가 있지만 결렬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북측 권호웅 수석대표의 소위 선군발언이다. 
   
  남측 회담 대변인 이관세는 1차 전체회의에 대한 브리핑에서 권호웅 대표가 기조발언에서 ‘선군이 남측의 안전도 도모해 주고 남측의 광범한 대중이 선군의 덕을 보고 있다’고 말했고 이에 대해 이종석 대표가 ‘누가 남쪽에서 귀측에게 우리 안전을 지켜달라고 한 적’ 다고 강력히 반박했다고 장황하게 설명하였다. 
   
  이 발언 공개되자 조중동은 장맛비 만난 청개구리들처럼 요란하게 목청을 울리고 있다. 
   
  열린우리당에서 소위 재야파로 알려진 김근태 의장조차 권호웅 대표가 ‘상식이하의 발언을 했다’다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황당하고, 우리정부와 국민을 모욕하는 발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신랄하게 성토했다. 김한길 원내대표도 북한의 ‘궤변과 오만이 도를 넘어섰다는 느낌’이라며 강도 높은 어조로 북한을 비난했다. 
   
  결국 감정적인 대화만 오가다 회담은 결렬 되었고 이로써 지난 해 6월17일 특사 회담이후 좋게 발전하던 남북관계에 또다시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지게 되었다. 
   
  이 같은 때 아닌 남북대결소동은 마치 전쟁전야로 치닫던 94년 봄을 방불케 한다. 
   
  불바다와 선군 
   
  1994년 3월15일,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북한 핵물질이 핵무기로 전용되지 않았음을 검증할 수 없다고 발표하고 사찰단을 철수시켰다. 
   
  IAEA 사찰단의 철수로 한반도 전쟁위기가 한껏 고조된 가운데, 3월19일 판문점에서 남북특사교환을 위한 실무접촉이 진행되었다. 이 회담에서 북한의 박영수 대표는 ‘서울이 여기서 멀지 않소. 전쟁이 발발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라고 발언 하였다. 
   
  한국 정부는 전후 맥락은 완전히 누락된 북측 대표의 발언이 담긴 동영상을 의도적으로 언론에 공개하였고, 남북대결 분위기는 극단적으로 고조되었다. 조중동은 일제히 ‘서울 불바다’라는 선정적인 머릿문구로 1면을 장식하였고 광적인 반북캠페인이 전국을 휩쓸었다. 국민들은 당장 전쟁이라도 나는 줄 알고 라면사재기에 열중하였다. 
   
  ‘서울 불바다’라는 발언만 놓고 보면 마치 북한이 한국에 선전포고라도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그 정반대였다. 
   
  94년 2월 국방부는 주한미군과 국군이 전시 작전계획인 ‘OPLAN 5027'을 발표하였다. 5단계로 이루어진 이 계획의 후반부는 주요 전력 격멸, 대규모 상륙작전, 평양 고립화, 점령지역의 군사통치 등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OPLAN 5027'의 공개는 팀스피리트 훈련과 주한미군의 전력 증강으로 민감해 있던 북한을 크게 자극하였다. 
   
  게다가 실무접촉을 앞둔 1994년 3월17일 김영삼 전 대통령은 NHK와의 회견에서 ‘북한에 대한 국제적 제재’의 불가피성을 언급함으로써 불길한 상황을 연출해 나갔다. 
   
  3월19일 판문점 실무접촉에서도 남한 대표단은 북한 제재 문제를 먼저 언급하며 북측을 압박하였다. 이를 둘러싸고 양측 간에 고성의 설전이 오고가다가 끝내 ‘서울 불바다' 발언이 나오게 된 것이다. 발언 내용도 전쟁이 터지면 평양 뿐 만 아니라 서울도 불바다가 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교묘한 영상 편집술로 전쟁은 결코 안 된다는 뜻의 발언이 마치 선전포고 발언처럼 조작된 것이다. 
   
  현상적으로는 불바다 발언이 남북관계를 극도로 긴장 속에 몰아넣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이전부터 있었다. 김영삼 정부는 핵위기가 최고조로 치닫던 1993-94년 미국의 클린턴 정부가 북한에게 끌려 다니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사방팔방 강경대응을 떠벌리고 다녔다. 
   
  김영삼 정부는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이 철수하자 이것을 대결의 기회로 보고 비공개가 원칙인 회담 장면을 몰래 촬영하여 그것도 의도적으로 편집된 일부만을 공개한 것이다. 그 결과 이성을 잃은 반북 캠페인이 한국을 휩쓸고 당장 전쟁이라도 터질 듯한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그 뒤에 일이 어떻게 됐을까? 
  94년 6월 북미관계는 전쟁 전야로 치달았다. 클린턴 정부는 6월18일을 개전일로 확정하고 17일 주한미국인들에 대한 소개작전을 시작하는 등 제2의 한국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개전을 결심하자 클린턴은 문민정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김영삼이 대결적인 ‘불바다’소동으로 남북대화의 통로를 스스로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백악관과 팬타곤에서 사실상 전쟁 결정한 뒤에 김영삼은 클린턴에게 전화를 걸어 20여 분간 전쟁은 안 된다고 애걸복걸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부도덕하고 무책임한 김영삼 정부는 스스로 김일성 주석과 카터 전 미 대통령의 회담에 전 국민들의 운명을 맡겨 버린 셈이다. 
   
  불바다 소동은 우리의 운명 결정권을 스스로 포기한 어리석은 행동이다. 
   
  과욕이 화를 불렀다 
   
  이번 선군발언의 공개 역시 불바다 사건과 흡사하다. 
  이번 장관급회담은 북한의 7.5 미사일 발사로 어느 때 보다도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북측이 회담장에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뉴스거리가 될 정도로 긴박한 정세였다. 
   
  미국과 일본이 유엔제재를 추진하고 북한이 ‘더 강경한 물리적 행동조치’로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장관급회담은 남과 북이 협력하여 평화적인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종석 장관은 너무 앞서갔다.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이 과욕을 불렀고 과욕은 화를 자초했다. 누가 보아도 이번 회담에서 미사일 문제나 6자 회담 복귀를 위한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는 어려웠다. 미사일 문제는 남북 간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북미, 북일 간의 문제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처럼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미국과 일본을 겨냥한 ‘정치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사일 문제를 가지고 필요 이상으로 흥분할 이유가 없으며, 또한 이 문제는 남북회담에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더욱이 미사일 발사 이후에도 미국의 태도 변화가 없는 조건에서 북한이 한국의 요청에 의해 6자 회담에 복귀할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였다. 크리스토퍼 힐이 이종석 장관에게 무엇을 요구했는지 모르지만 이종석 장관이 아무리 수완이 좋아도 이번 회담에서 북한이 미사일 문제에 대해 물러서거나 6자 회담 복귀 의사를 밝힐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성과를 내기 어려운 조건에서 이종석 장관은 6자 회담 문제와 관련해서는 남측 정부의 입장을 전달하는 선에서 정리하고 남북관계에서 진전된 성과를 내는데 주력하여 대화를 지속할 수 있는 분위기를 유지하는데 주력했어야 한다. 남북대화는 현재 한반도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시험을 볼 때 안 풀리는 문제는 일단 접어놓고 쉬운 문제부터 풀어가는 것은 상식이다. 풀 수 없는 문제를 끌어 않고 머리를 싸매다보면 한 문제 때문에 시험 전체를 망치게 된다. 이종석 장관은 미사일이라는 쉽게 풀 수 없는 문제에 집착하다가 결국 시험 전체를 망쳐 버리고 말았다. 어려운 문제를 풀어 보겠다는 용기는 가상하지만 용기만으로 문제가 풀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종석 장관은 애초부터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집착해 회담을 좌초시켰다. 
  미사일과 6자 회담 복귀 문제는 이번 장관급회담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의 문제였다. 국내에서 북한 문제에 가장 정통한 학자 중에 한 명이라는 이종석 장관이 이러한 초보적인 인식조차 없이 이 중요한 시기에 남북대화에 나섰다는 것은 국민들에게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협상의 방식 또한 매우 좋지 않았다. 
  이종석 장관은 쌀과 비료지원 중단을 지렛대로 북한을 압박하려 하였다. 과연 지원 중단이 북한을 압박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일까? 북한은 지금보다 사정이 더 어려웠을 때도 자주권과 관련된 원칙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결코 양보한 적이 없다. ‘고난의 행군’을 두 번하는 한이 있어도 자주권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북한의 원칙적 입장이다. 
   
  북한은 쌀과 비료 때문에 남북대화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미국의 지원이나 받자고 6자 회담을 하는 것도 아니다. 북한이 마치 쌀이나 구걸하려고 남북대화에 나오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오만’한 발상이며 자존심 강한 북한 ‘정부와 국민을 모욕’하는 것이다. 
   
  대북지원 문제와 미사일 문제는 연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먹는 문제는 가지고 치사하게 구는 것은 전쟁을 하겠다고 협박하는 것보다 감정적으로 더 안 좋은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특히 자존심 강한 우리 민족에게는 이런 식의 행동방식은 매우 불쾌한 느낌을 줄 수 있다. 
   
  통일부의 브리핑에서 선군발언과 관련해 장황한 소리를 늘어놓은 것 또한 부적절한 처신이었다. 
   
  물론 이종석 장관은 이번 기회에 자신의 이념 문제를 트집 잡는 보수진영에 확고한 안보관, 국가관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북회담은 통일부장관의 안보관, 국가관을 검증하는 청문회가 아니다. 
   
  선군 발언은 북측 대표로써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며, 북측의 의견일 뿐이다. 
  권호웅 대표가 이종석 장관에게 선군정치를 떠받들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이 장관은 필요이상으로 흥분하였고 마치 자랑이라고 하고 싶은 사람처럼 불필요한 내용들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선군정치로 남한을 치겠다는 말이 아니라 지켜 주겠다는 말인데 도대체 흥분할 이유가 무엇인가? 즉 권호웅 대표의 발언은 뒤집으면 남쪽을 공격할 의사 없다는 뜻이니 당국 대표로써 자존심은 조금 상했을런지 모르지만 화낼만한 일은 아니었다. 
   
  불바다 발언과 비교하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것도 없는 발언을 두고 회담 분위기를 거칠게 몰아 간 것은 결코 현명한 행동은 아니었다. 
   
  이종석 장관은 지난 14일 국정브리핑 기고에서 "아무리 어려워도 또 회담 중단이 아무리 편한 길이라고 해도 회담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결론"이라며 "무엇보다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이 정부의 일관된 정책기조‘이고 ’스스로 대화의 장을 닫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장관은 현명치 못한 판단과 감정적인 대응으로 ‘스스로 대화의 장을 닫’아 버리고 말았다. 
   
  문민정부와 참여정부 
   
  최근 필자는 노무현 정부가 김영삼 정부의 전철을 밟는 것은 아닐까 두려울 지경이다. 
   
  김영삼 정부는 문민정부를 자처하며 화려하게 출범하였다. 
  김영삼은 취임연설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며 김일성 주석과 남북의 진정한 화해와 통일을 ‘논의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 어디서라도 만날 수 있’다고 말해 남북통일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집권 초 금융실명제를 추진하는 등 개혁정책으로 한때 지지율이 80%대에 육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핵위기가 발생하면서 남북화해정책은 대결정책으로 바뀌고 심지어 분단이후 처음으로 정상회담을 합의했지만 김일성 주석 사망이후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이 되고 말았다. 설익은 세계화-신자유주의-을 추진하면서 집권 마지막 해 국가부도라는 사상초유 사태의 주인공이 되었다. 
   
  결국 김영삼 정부는 마지막 해에 지지율 5%대의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으며 그 해 대선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여야 간 정권교체가 이루어 졌다. 
   
  노무현 정부도 국민들의 큰 기대와 관심 속에 출범하였다. 
  국민들은 변화를 요구하였고 노무현 정부가 남북화해협력과 자주적인 외교, 강력한 개혁을 추진해 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집권 초 어처구니없는 대북송금특검으로 남북관계에 찬물을 끼얹더니 야심차게 시작된 4대 개혁입법은 누더기가 되거나 중도반단 되었다. 이해관계도 없는 이라크에 파병을 추진하고 전쟁의 화근이 될 전략적 유연성을 합의하는 등 국민의 의사는 안중없고 미국의 꽁무니만 쫓기에 바빴다. 국민들은 마지막 기대를 가지고 총선에서 여당에 과반수의 의석을 안겨 주었지만 그 뒤에도 여전히 개혁은 말 뿐이었다. 
   
  그나마 좋게 발전하던 남북대화마저 남북대결로 바뀌고 통일부장관은 대결부장관 노릇이나 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일희일비하지 말고 신중하게 대처하자고 하지만 대통령의 주문을 신중하게 받아드리는 관료들은 많아 보이지 않는다. 조건 없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겠다고 했지만 미국의 눈치 때문에 공수표에 그치고 있다. 마치 문민정부가 집권 후반기 세계화에 매달리며 국가부도의 길로 달려간 것처럼 집권 말기 참여정부는 제2의 국제통화기금(IMF)사태를 몰고 올지도 모를 한미자유무역협정(FTA)에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고 있다. 국민들은 지난 5월 지방선거에서 여당에 참패를 안겨주었지만 아직도 반성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임기를 일 년 반 남긴 지금 노무현 정부는 김영삼 정부와 너무도 닮아 있다. 
  ‘오만과 독선, 무능’으로 일관했던 김영삼 정부의 궤적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몸서리가 처진다. 
   
  지금은 정권의 운명 뿐 만 아니라 민족의 운명이 달려 있는 중대한 시기이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우리 민족의 미래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이제 참여정부의 임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 참여정부가 영원히 국민의 저주를 받는 실패한 정권으로 기록될 것인가 아니면 민족사의 전환기를 현명하게 이끌어간 성공한 정부로 기록될지는 전적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집권여당의 선택에 달렸다. 참여정부는 어려울 때 일수록 냉정을 찾고 정도를 걸어야 할 것이다.
 

2006년07월17일 ⓒ민중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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