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서거한 최규하 전 대통령은 우리 헌정사의 굴곡과 함께 하면서 가장 짧은 기간 국가원수로 재임했던 '비운의 대통령'이었다.
1979년 10ㆍ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살되면서 갑작스레 대통령직에 올랐지만 이듬해 5ㆍ17 계엄 확대 이후 사실상 집권한 신군부에 밀려 대통령직에서 8개월 만에 하야, 한국 정치사의 중앙무대 뒤로 쓸쓸하게 퇴장해야 했다.
그는 재임 기간 군부의 쿠데타와 5ㆍ18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의 유혈 사태 등을 막지 못했다는 따가운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는 헌정 사상 정당에 관여하지 않은 직업 공무원으로서 대통령이 된 첫 인물이었으며, 한국 외교에 족적을 남긴 큰 어른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호가 '현석(玄石)'인 최 전 대통령은 1919년 7월16일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학창 시절 그는 온순한 성격의 공부벌레였다고 한다.
32년 경성 제1고보(지금의 경기고)에 입학했고, 4학년 때인 35년 홍병순(洪炳純)의 셋째 딸 홍기(洪基ㆍ2004년 사망) 여사와 결혼했다. 41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를 마친 뒤에는 만주 국립대동학원에 입학, 43년 졸업했다.
그는 해방되던 45년 서울대 사범대 조교수로 교편을 잡았으나 이듬해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관직 생활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농림부 양정과장이 됐으며, 그 해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 아시아지역 미곡위원회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그는 외국어 실력으로 능력을 인정 받았으며 건국 초기 한국 외교 기반 구축에 많은 공을 세웠다. 51년 농림부 농지관리국장 서리를 거친 그는 당시 변영태 외무부장관에 의해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발탁되면서 정통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는 52년 주일대표부 총영사를 거쳐 59년 주일대표부 공사를 지내고 그 해 9월 외무부차관이 됐으나 4ㆍ19 혁명 직후인 60년 5월 사임했다. 그러나 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외교담당고문, 64년 말레이시아 대사를 거쳐 67년 외무부 장관에 기용되는 등 승승장구 했다.
4년 간의 외무장관 재임시 그는 '조용한 외교'를 전개하면서 통상외교와 외무 행정 강화에 중점을 뒀다. 71~75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을 지내며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으로 72년 11월과 73년 3월 두 차례 평양을 다녀오기도 했다.
유신체제의 서슬이 시퍼렇던 75년 12월 국무총리 서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3월 국회 동의를 받아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79년까지 4년간 국무총리로 재임하면서 그는 외교관 출신의 총리로서 안보와 경제에 중심을 둔 외교 활동에 진력했고, 근검 절약을 몸소 실천하는 깨끗한 공직 생활을 보여줬다.
그의 운명은 79년 10ㆍ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살되면서 격랑 속에 빨려 들어갔다. 곧바로 대통령권한대행이 된 뒤 그 해 12월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체육관 대통령선거'에서 대통령으로 피선됐다.
이어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 주도한 신군부의 12ㆍ12 사태 직후 12월21일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그는 권한대행 시절 '80년 헌법개정, 81년 상반기 대통령 선거 실시, 81년 6월 정권이양' 등의 정치 일정을 제시하고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한 데 이어 취임 직후인 80년 2월 김대중 전 대통령 등 시국 관련자 687명을 사면ㆍ복권하는 등 정치적 안정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80년 5ㆍ17, 5ㆍ18 등으로 혼돈의 회오리가 계속되면서 최 전 대통령은 신군부의 위세에 눌려 결국 그 해 8월16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특별성명을 발표한 뒤 대통령직을 사임해야 했다.
신군부에 밀려 대통령으로서의 정상적인 권한과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다 8개월이 채 안 되는 대통령직을 마감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