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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제와 일본의 파시즘.
게시물ID : history_2508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요들의유머
추천 : 10
조회수 : 1560회
댓글수 : 102개
등록시간 : 2016/01/21 17:35:33
일본의 파시즘
 
  昭和시대에 들어서면서 군국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는 이른바 초국가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제1차대전은 일본으로 하여금 비약적인 경제발전과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지만, 일본의 이런 번영은 전쟁경기의 종식과 함께 불어 닥친 대공황으로 인해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이후 정당정치의 부패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고, 재벌에 의한 부의 독점 등 일본을 좀먹는 위험 요소들이 생겨남으로, 초국가주의를 표방한 국가개조론자들이 나타나며 쿠데타 음모 등을 실행시켰다. 이러한 시도는 군부에 의해 진압되어 실패로 끝나게 된다. 明治 헌법상 군부는 천황 직속에 속해 있는 기구여서, 내각은 군부에 대한 통제권이 없었다. 일본 내부의 정치적 혼란으로 군부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고, 정국의 주도권은 군부가 본격적으로 갖게 되었다. 국가 개조론자들은 잇달아 혈맹단 사건, 2·26사건 등의 유혈테러와 쿠데타를 일으키며 일본의 군국주의로의 길을 더욱 더 조장했다. 기존권력인 정당과 그 배후인 재벌의 타도를 외치며 억압받는 빈곤 계층인 농민과 심지어는 좌익적 색채가 짙은 노동자세력마저 규합함으로서 그 세력을 넓혀나갔다. 이들 우익 세력은 부패한 민주세력을 척결할 것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건전한 민주세력마저 타도의 대상으로 삼으며 일본내의 민주정치는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고 파쇼적 군국주의로 그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獨·伊 파시즘과 日本의 파시즘 비교
 
 
   파시즘은 당시 중산계급이 품고 있는 불만과 불안을 교묘히 이용하기 위해, 19세기 이후 특히 현재화된 자본주의의 모순과 그 전반적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써 출현했다. 그렇다면 파시즘의 대표라 할 수 있는 獨일의 나치즘과 伊탈리아의 파시즘은 日本의 천황제 파시즘과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자.
 
 
  우선 그 첫째로, 그것을 주도하는 주체의 위치가 달랐다. 파시즘화 과정에는 ‘위로부터의 파시즘화’와 ‘밑으로부터의 파시즘화’등 두 가지가 있다. 이를 ‘의사 혁명’ 혹은 ‘권위주의적 반동’이라는 표현으로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밑으로부터의 파시즘화 또는 의사 혁명 과정에서는 제대 군인, 낙오한 지식인, 좌익으로부터의 전향자, 직업적인 정치꾼, 실업 공무원, 상점 주인, 도시 건달 등이 주도권을 잡았다. 이 계급 탈락자, 정상적인 사회생활의 틀 밖으로 밀려나가고 갖는 체제에 대한 불만 내지는 증오에 찬 사람들이 현실 부정의 급진적인 슬로건에 매혹되어 집단화되었다. 이들은 기성 지배 체제에 속하는 군부와 관료, 반동적 부르주아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가며 성장해 갔다.
  권위주의적 반동 또는 위로부터의 파시즘화는 의사 혁명과는 달리 사회 전통적 지배층의 일부에 그 계급적 기초를 두고 전개되어 나갔다. 그 정치 목표는 의사 혁명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적 정당이며 노동조합 운동을 분쇄하는 데 있었다. 다만 의사 혁명과는 달리 그것은 기성 지배층의 특권을 옹호하는 지극히 보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獨·伊에서는 그 나라의 자본주의 경제가 붕괴에 이르러, 노동자 계층이 주도하는 혁명운동이 지배권력을 위기에 빠뜨렸다. 이에 대한 반혁명으로서 파시즘이 대두하고 승리했다. 일본에서도 1927년에는 공전의 대금융공황이 있고, 1929∼1931년은 세계대공황에 휩쓸리게 되어 경제위기에 빠졌지만, 그것은 일본 자본주의가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 또 당시는 일본의 노동자·농민의 혁명적 투쟁도, 그때까지의 역사에 없는 발전을 하고 있었지만 그 역량은 아직 현실의 천황제 국가를 위기에 빠뜨리기에는 부족했다. 천황제의 위기는 일본의 중국침략의 확대, 그에 대한 중국의 저항, 민족투쟁의 발전, 또 미국과 영국, 일본의 중국에 대한 패권 쟁탈의 제국주의 대립의 심화에서 온 것이다.
 
  둘째는 獨·伊의 파시즘은 국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항하기 위해, 권력을 잡을 때까지는 반자본주의적인 것으로 꾸미고, 몰락해 가는 부르주아와 노동자 대중을 조직하여, 기존의 체제를 「아래서부터」 변혁하여 새로운 파쇼 체제를 세웠다. 일본에서는 천황제 파시즘으로 불리듯이 明治 헌법체제 아래 장시간에 걸쳐 이룩된 국민의 천황 신앙을 배경으로 군부·관료에 의한 「위에서부터」의 강권적인 국가 체제를 형성하였다. 천황제 파시즘을 추진한 장교들이 재벌을 비판하는 등의 선동도 한때는 했지만 천황제라는 기존의 체제 안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군부가 주도하여 천황제를 파쇼화해 갔다. 따라서 민간 우익은 단지 군부의 작은 보조부대에 지나지 않았다.
 
※ 군부가 정권을 잡게 된 과정
  공황의 틈을 타 군부를 비롯한 우익세력과 파시즘이 대두하기 시작하여 만주사변으로 인해 국제적 고립에 처하게 된 일본은 이후, 군국주의의 길을 택하였다. 1935년 의 천황기관설을 계기로 군부는 정치적 진출을 하게 되고 사회 풍조 역시 파쇼화가 한층 진행되게 되었다.
   헌법상 군부는 천황 직속으로 속해 있는 기구여서 내각은 군부에 대한 통제권이 없었다. 따라서 1931년 일본 정부의 뜻과는 별도로 유조구 사건 등을 일으킴으로 군부는 이미 일본 정부의 통제력에서 벗어났다. 그 뒤로도 여러 차례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지만, 이 모든 것 또한 군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일본 내부의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군부의 입지를 더욱 강화시켜 주었고 정국의 주도권은 군부가 본격적으로 가지게 되었다. 국가 개조론자들은 잇달아 혈맹단 사건(1932.5월), 2.26사건(1936.6월)등의 유혈 테러와 쿠데타를 일으키며 일본의 군국주의로의 길을 더욱 더 조장했다.
  기존 권력인 정당과 그 배후인 재벌의 타도를 외치며 억압받는 빈곤 계층인 농민과 심지어는 좌익적 색채가 짙은 노동자 세력마저 규합함으로써 그 세력을 넓혀 갔다. 이들 우익 세력은 부패한 민주세력을 척결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건전한 민주 세력마저 타도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일본내의 민주정치는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고 파쇼적 군국주의에게로 그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국가 개조론자들의 주장처럼 군부가 정권을 잡게 되었지만 그들이 주장했던 부패한 자본가의 척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군의 수뇌부는 자본가와 결탁을 하면서 어려워진 경제상황을 제국주의적 방법인 식민지 경영으로 해결하려 했다. 따라서 재벌은 단지 경제 분야에서만 지배력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에 대해서도 강력한 발언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재정 분야에서도 이들 재벌의 협력이 없으면 국체 하나도 발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쟁마저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재벌은 경제적으로 인민의 고혈을 착취하였으며, 불황 속에서도 자꾸만 살쪄 갔다. 게다가 정당·관료들과 결탁해 일본의 정치를 부패·타락시키고 있었다. ‘재벌과 정당을 한꺼번에 장사지내지 않으면 일본은 구할 길이 없다’라고 파시스트들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獨·伊와 같이 후발 산업국이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경제적 모순점을 파시즘을 통해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셋째는 발생 시기의 차이로, 獨·伊는 파시즘 권력이 세워지고 나서 그 권력에 의해 침략 전쟁이 일어났지만, 일본에서는 천황제의 침략 전쟁이 먼저 진행되고 나서 전쟁 수행을 하며 필요에 의해 천황제가 파쇼화 되었다. 즉 일본은 동아시아 대부분을 식민지·반식민지로 만들어 놓고, 천황제 파시즘의 논리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강요하였다.
 
  넷째는 독재적인 위치를 만들기 위해 獨·伊의 파시즘은 국민통합의 정신적 원리를 새롭게 만들어야 했고, 또 히틀러·무솔리니에 대한 절대적인 개인 숭배를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었다. 그러나 천황제의 파시즘은 지금까지의 “國體” 원리를 더욱 강조하여 “現人神”으로써 천황 숭배를 강화할 뿐이었다. 이것은 즉 구심점의 문제였던 것이다. 獨·伊는 ‘히틀러와 무솔리니’라는 약간의 권력을 지닌 인간에 불과한 독재자가 있긴 했지만, 일본처럼 신이라 칭해지는 ‘천황’이라는 절대적인 가치의 구심점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에게는 이런 절대적 가치의 ‘천황’이 일본 우익의 변하지 않는 흐름이며, 일본에게 있어서의 가장 큰 대의 명분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다섯째는, 獨·伊에게는 적어도 명료한 의지와 주체가 있어서 책임이 존재하는데 반해, 일본의 파시즘에는 명확한 정치적 주체가 없어서 책임의식 역시 없다. 일본의 파시즘은, 행위는 분명히 있지만 아무도 그 행위의 주체가 아닌 것처럼 모든 것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자연적인 힘’에 의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제2차대전이 끝난 후 전범 재판이 행해질 때, 獨·伊는 최고 책임자 및 전쟁 관련 인물과 현장 책임자까지 철저한 응징과 처분이 행해졌고, 지금까지도 숨어있는 사람들도 찾아내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게끔 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최고 책임자이고, 전쟁에 관련한 천황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일언반구도 없고, 전범 재판 이후로의 전범 처리 역시 없다. 단순히 현장에 제일 가깝게 있던 사람들에 한 해서만 처분이 이뤄졌고, 명령을 내리고 지휘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처분이 없었던 셈이다.
 
  여섯째는 獨·伊는 근대의 민주적인 정치 절차를 밟아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서 파시즘을 형성하였지만 일본은 민주적인 제도 자체를 스스로 파괴하면서 파시즘을 형성하였다
 
 
 
 
 
군부가 정권을 잡게 된 과정
  공황의 틈을 타 군부를 비롯한 우익세력과 파시즘이 대두하기 시작하여 만주사변으로 인해 국제적 고립에 처하게 된 일본은 이후, 군국주의의 길을 택하였다. 1935년 의 천황기관설을 계기로 군부는 정치적 진출을 하게 되고 사회 풍조 역시 파쇼화가 한층 진행되게 되었다.
   헌법상 군부는 천황 직속으로 속해 있는 기구여서 내각은 군부에 대한 통제권이 없었다. 따라서 1931년 일본 정부의 뜻과는 별도로 유조구 사건 등을 일으킴으로 군부는 이미 일본 정부의 통제력에서 벗어났다. 그 뒤로도 여러 차례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지만, 이 모든 것 또한 군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일본 내부의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군부의 입지를 더욱 강화시켜 주었고 정국의 주도권은 군부가 본격적으로 가지게 되었다. 국가 개조론자들은 잇달아 혈맹단 사건(1932.5월), 2.26사건(1936.6월)등의 유혈 테러와 쿠데타를 일으키며 일본의 군국주의로의 길을 더욱 더 조장했다.
  기존 권력인 정당과 그 배후인 재벌의 타도를 외치며 억압받는 빈곤 계층인 농민과 심지어는 좌익적 색채가 짙은 노동자 세력마저 규합함으로써 그 세력을 넓혀 갔다. 이들 우익 세력은 부패한 민주세력을 척결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건전한 민주 세력마저 타도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일본내의 민주정치는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고 파쇼적 군국주의에게로 그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국가 개조론자들의 주장처럼 군부가 정권을 잡게 되었지만 그들이 주장했던 부패한 자본가의 척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군의 수뇌부는 자본가와 결탁을 하면서 어려워진 경제상황을 제국주의적 방법인 식민지 경영으로 해결하려 했다. 따라서 재벌은 단지 경제 분야에서만 지배력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에 대해서도 강력한 발언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재정 분야에서도 이들 재벌의 협력이 없으면 국체 하나도 발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쟁마저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재벌은 경제적으로 인민의 고혈을 착취하였으며, 불황 속에서도 자꾸만 살쪄 갔다. 게다가 정당·관료들과 결탁해 일본의 정치를 부패·타락시키고 있었다. ‘재벌과 정당을 한꺼번에 장사지내지 않으면 일본은 구할 길이 없다’라고 파시스트들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獨·伊와 같이 후발 산업국이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경제적 모순점을 파시즘을 통해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셋째는 발생 시기의 차이로, 獨·伊는 파시즘 권력이 세워지고 나서 그 권력에 의해 침략 전쟁이 일어났지만, 일본에서는 천황제의 침략 전쟁이 먼저 진행되고 나서 전쟁 수행을 하며 필요에 의해 천황제가 파쇼화 되었다. 즉 일본은 동아시아 대부분을 식민지·반식민지로 만들어 놓고, 천황제 파시즘의 논리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강요하였다.
 
  넷째는 독재적인 위치를 만들기 위해 獨·伊의 파시즘은 국민통합의 정신적 원리를 새롭게 만들어야 했고, 또 히틀러·무솔리니에 대한 절대적인 개인 숭배를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었다. 그러나 천황제의 파시즘은 지금까지의 “國體” 원리를 더욱 강조하여 “現人神”으로써 천황 숭배를 강화할 뿐이었다. 이것은 즉 구심점의 문제였던 것이다. 獨·伊는 ‘히틀러와 무솔리니’라는 약간의 권력을 지닌 인간에 불과한 독재자가 있긴 했지만, 일본처럼 신이라 칭해지는 ‘천황’이라는 절대적인 가치의 구심점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에게는 이런 절대적 가치의 ‘천황’이 일본 우익의 변하지 않는 흐름이며, 일본에게 있어서의 가장 큰 대의 명분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다섯째는, 獨·伊에게는 적어도 명료한 의지와 주체가 있어서 책임이 존재하는데 반해, 일본의 파시즘에는 명확한 정치적 주체가 없어서 책임의식 역시 없다. 일본의 파시즘은, 행위는 분명히 있지만 아무도 그 행위의 주체가 아닌 것처럼 모든 것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자연적인 힘’에 의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제2차대전이 끝난 후 전범 재판이 행해질 때, 獨·伊는 최고 책임자 및 전쟁 관련 인물과 현장 책임자까지 철저한 응징과 처분이 행해졌고, 지금까지도 숨어있는 사람들도 찾아내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게끔 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최고 책임자이고, 전쟁에 관련한 천황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일언반구도 없고, 전범 재판 이후로의 전범 처리 역시 없다. 단순히 현장에 제일 가깝게 있던 사람들에 한 해서만 처분이 이뤄졌고, 명령을 내리고 지휘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처분이 없었던 셈이다.
 
  여섯째는 獨·伊는 근대의 민주적인 정치 절차를 밟아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서 파시즘을 형성하였지만 일본은 민주적인 제도 자체를 스스로 파괴하면서 파시즘을 형성하였다.
 
 
 
1936년 2·26사건으로 젊은 장교들에게 수도권이 장악되자, 군사력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군사력밖에 없다고 하여 군부가 개입하여 진압시켰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을 가게 되고, 1937년 ‘대정익찬회’라고 하여 국회가 해산되었다. 이것은 군부의 힘에 압도되어 국회의원들 스스로 민주주의 체제 중 하나인 국회를 자체 해산한 것이다. 이후 정치적으로 맹목과 굴종이 있었으며, 국회의원들 즉, 위에서 스스로 파시즘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천황의 직속기구였던 군부가 행하는 모든 일에는 당시 ‘현인신’으로 숭배 받는 천황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천황은 군부, 파시스트들의 최고 우두머리가 되어 파시즘을 이끌었다.
 
천황제 파시즘의 형성과 확립에 천황 裕仁는 주도권을 발휘할 수 없었다. 천황은 2·26사건 때, 파쇼 장교들이 자신이 신임하는 대신·장군을 죽이는 것은 자신의 목을 조이는 것이라며 분노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가 정부·의회를 무시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파쇼화를 진행하는 일 자체에 한번도 반대한 적은 없었다. 또 천황기관설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본질적으로 천황주권자론, 전제군주주의자 였던 그는, 이론적으로는 天皇機關說과 「國體明徵」은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천황제 파시즘의 국체원리의 體現者로서 파쇼 군부·정부의 우두머리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20년에 걸친 전쟁에 대해서, 裕仁천황은 일본국 유일한 통치권자, 일본군의 유일한 최고의 통수권자로서의 객관적 책임이 있는 것뿐 아니라 그 자신이 주도권을 발휘했다는 그 자신의 주체적인 책임도 크다 할 수 있다.
  패전 후 裕仁천황은, 자신은 “책임 있는 기관이 합의하여 案을 만들고, 천황의 재가를 요청한 것은 반드시 재가한다.”라는 불문율에 따라 언제나 행동했으며, 일·미 전쟁에 대해서 자신은 반대했으나 불문율에 따라 정부·대본영의 案을 재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는 등을 반복해서 말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표면상으로는 明治천황 시대부터, 정부나 군부가 정해진 案의 재가를 요청하면, 천황은 반드시 재가하며 거부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정부나 군부도 천황에게 정식으로 재가를 청하기 전에, 비공식으로 內奏(은밀히 천황에게 말하는 것)을 천황에게 제출한다. 천황은 그것을 검토하고, 좋다던가 일부 수정시키든가 안 된다든가를 지시하여 “御內意を示す(마음속 생각을 나타낸다)”한다. 內奏와 內意の往復이 때로는 2·3번 정도 있어서 천황과 당국이 완전히 일치되는 案을 만들면, 비로소 당국은 정식으로 재가를 청하고 천황은 재가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內奏 단계를 보지 않으면 천황 자신의 개인적인 역할은 알 수 없다. 內奏·御內意는 당사자 이외에는 모르게 하지만, 현재는 전쟁 중의 천황 측근의 高宮이나 정부, 군부의 수뇌 일기, 메모, 담화, 서한 등이 공개되어 있는 것도 많다. 이것들을 통해 천황이 자신의 주도권(발언권)으로 정부·군부를 지도하고 지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裕仁천황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을 군부가 맘대로 하는 것은 절대로 허락할 수 없었고, 이길 수 있다고 생각되는 전쟁은 추진했다. 그 전쟁은 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으로 세밀하게 파악해 보면,
  (1) 1937년 12월, 일본군은 중국의 국민정부의 수도 南京을 점령했다. 이때 참모본부는 중국의 항전력이 의외로 강해 이대로 전쟁을 계속하면, 일본은 수렁에 빠지며, 그 당시 소련이 「만주」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두려워 휴전하기를 바랬다. 하지만 정부는 그것에 반대했다. “수도를 공략 당한 국민정부는, 이제는 하나의 지방정권에 지나지 않는다. 머지않아 한번에 눌러서 완승할 수 있다. 이기고 있는 일본이 지고 있는 지방정권에 講和를 요구할 일은 없다”라고 천황은 정부를 지지했다. 그는 정부와 참모본부가 정면에서 대립하고 양보하지 않을 때, 참모총장인 황족 閑院宮(KANINMIYA)원수에게 참모본부가 소련 때문에 중국전쟁을 그만두려는 것을 비난하거나, 총장이 천황을 만나고 싶다고 해도 총리를 만날 약속이 있다며 거절함으로 중국과의 교전을 중지할 것을 집요하게 권하는 총장의 말을 막은 것이다. 천황의 단호한 지지에 의해 일본은 중국 침략전쟁이 대패할 때까지 계속했다.
  (2) 1937년 말부터 1938년 여름에 걸쳐서, 육군은 독일과 공모하여 소련 및 영·미를 적으로 하는 日·獨·伊 3국 동맹을 맺으려고 했다. 천황은 소련을 적으로 하는 동맹에는 찬성하지만, 영·미를 적으로 돌리는 동맹에는 반대했다. 황족인 참모총장이 천황에게 면회를 요구해도, "3국 동맹 건이라면 만날 필요 없다"라고 냉담하게 돌려보낼 정도였다. 천황의 단호·반대 때문에 이때는 3국 동맹은 성립되지 않았다.
  그런나 1940년 5월, 近衛(KONOE)내각이 소련과 불침략조약을 맺고, 영·미만을 적으로 돌리는 새로운 日·獨·伊 3국 동맹을 체결하려고 할 때는, 천황은 즉시 동의했다. 정부와 군부는 공식적으로는 3국 동맹은 日美전쟁을 방어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지만, 정부·군부·천황·樞密院 고문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천황은 3국 동맹은 日美전쟁을 불가피한 것으로 각오하고 그 체결을 재가했다. 그래서 천황은 日美전쟁으로 「만일 일본이 패전국이 될 때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가? 이 같은 상황이 도래할 때는, 총리(KONOEHUMIMARO)도 자신과 수고를 같이 해 줄 것인가?」라고 近衛에게 절실히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대신 木戶幸一(KIDOKOUICHI)에게 日英동맹 때는 궁중에서 아무런 의식·축제도 없었지만, 이번 3국 동맹은 그저 기꺼이 받아들일 수만은 없다고 했다. "정세의 추이에 있어서 중대한 국면에 직면한 것이기 때문에, 친히 賢所(天照大神를 제사지낸 궁정내의 신전)에 참배하여 보고함과 동시에 신의 가호를 빌고 싶다"고 말하여, 그 같은 조처를 취했다.
  (3) 1941년 12월 日美전쟁에 대해서 천황과 대본영, 정부, 특히 東條대장이 수상이 되고 나서 東條(TOUZYOU)와의 사이에는, 內奏와 內意の往復이 반복되었다. 천황은 對美전쟁을 단행할지 말지 여러 번 동요했다. 대본영·정부가 對英美개전을 최종적으로 의정한 것은 1941년 11월 1일로, 12월 1일 오전 0시까지 對美교섭이 타결되면 전쟁은 하지 않고, 타결되지 않으면 개전한다는 것이지만 日美교섭이 이후 1개월 내로 急轉直下(갑자기 상황이 변하여 일이 타결된다) 될 리는 없었다. 천황은 이 의정을 11월 2일에 재가하지만, 작전계획에 대해 중국의 상해 외의 英佛 등의 조계(제2차 세계대전 전에 중국의 개항 도시에서 외국인의 거류지로 개방되었던 치외법권 지역)는 언제 공격할지, 말레이 작전은 예정대로 잘 되는지, 해군의 진주만 공격 예정일은 언제인지 등을 납득이 갈 때까지 질문을 하였다.
  또 이때 방침으로는, 일본은 對美개전 전에 타이를 강제로 일본 군사동맹국으로 하고, 여기에 말레이반도, 싱가폴 쪽으로의 진격 기지를 세우기로 예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타이와의 교섭은, 대의명분상으로는 일찍 시작하는 편이 좋지만, 그렇게 하면 일본의 의지가 英美에게 읽혀짐으로 말레이쪽 기습작전의 성공은 위험해진다. 작전성공을 위해서는 타이와의 교섭은 될 수 있는 한 늦게 시작하는 것이 좋아서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할지는 천황도 참모총장도 명확하게 답하지 않았다. 결국, 일본은 타이와의 사전교섭은 하지 않고, 12월 8일 未明해군함공대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보다도 빨리 육군부대가 타이 남부에 기습상륙하고, 타이의 의용군과 수 시간 교전하여 147명의 전사자를 냈다. 전쟁을 시작한 후에, 일본 정부는 타이와 교섭하고, 타이 남부에 일본군 기지를 두는 것에 동의시켰다.
  11월 2일 결정 후에도, 천황은 對美전쟁에 이길 수 있을지 어떨지 고민했다. 해군 장교인 동생인 高松宮(TAKAMATUMIYA)가, 천황에게 해군은 아무래도 이길 자신이 없는 것 같다고 하자, 천황은 걱정이 되어 새삼 해군 군령부 총장과 해군 대신을 불러들여 정말로 이길 수 있는지 확인했다. 두 사람 모두 이길 수 있다고 대답하여 천황은 안심했다. 천황은 또 「重臣」과 수상이였던 사람들을 불러모아, 對美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지 여부를 물었다. 裕仁천황은 또 작전에 대해서 육해군의 통수부와 함께 하나하나 검토했고, 이렇게 신중하게 검토한 끝에, 12월 1일 對美英전쟁을 천황이 정식으로 결정했다.
  일본의 항복은, 정부·大本營이 결정할 수 없고, 천황 혼자서 결정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근위, 木戶(KIDO)들, 천황측 중신, 동향外相이나 重光葵(SIGEMITU) 등 외무성의 주류, 東久邇宮(HIGAXHIKUNIMIYA)등의 조기항복파가, 패전은 불가피함으로 끈질기게 전쟁을 고집하는 육군을 막았다. 항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부·大本營 앞에서 천황이 직접 항복을 선언하는 수밖에 없도록 일년 전부터 신중하고 면밀하게 세워진 계획 하에 행해졌다.
  천황은, 동맹을 맺은 독일이 무조건 항복하고(1945년 5월 8일), 沖繩(OKINAWA)가 미군에게 점령당한(1945년 6월 2일) 그 후에도, 역시 육군을 믿고 의지하며 전쟁을 계속할 방침이였다. 7월 하순이 되어 천황은 이윽고 육군이 말한 본토 결전에 의한 승리에 불안을 느꼈다. 그 무렵, 東京·大阪는 물론 일본 전국의 대·중 도시는 전부 황폐해지고 군수생산도 거의 행해지지 않고, 연합함대는 이미 전멸하여 항공기 보급도 되지 않게 되었다. 7월 25일, 내대신 木戶幸一는 천황에게 “군부가 말한 것처럼 본토 결전에 이길 수 없다, 진다면 적은 공정(하늘에서 여럿 가운데서 앞질러 나아감, 스스로 앞장서서 몸을 바쳐 일함)부대를 국내 각 장소에 강하시키고, ‘大本營이 포로(천황이 포로가 되는 것을 암시)’가 되어 어쩌면 3종의 神器를 유지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기보다 먼저 항복하고 국체를 보호해야한다,” 고 말했다. 천황은 드디어 전쟁종결을 결의하지만 무조건 항복은 생각할 수 없었다.
  이 다음날 7월 26일, 美·英·中 3국이 일본에 즉시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이 발표되어진다. 이 선언으로 즉시 무조건 수락파와 항복후의 천황의 일본통치권을 연합국이 보장하지 않는 한 수락할 수 없다는 파가 대립했다. 천황은 후자 쪽에 이끌렸다. 그러다 보니 천황은, 미군의 廣島·長崎 원폭투하(8월6일·9일)와 소련의 참전기회를 주고 말았다. 이것으로 인해 즉시 무조건 수락파가 8월 14일에, 천황의 입으로 항복을 확정시킬 수 있었다.
  8월15일, 천황은 라디오를 통해 전국민·전군에게 포츠담선언을 수락한 것을 알렸다. 그 중에서 천황은, “국체를 수호할 수 있는 것을 기뻐한다”고 하며, 최후로 “너희 臣民은 神國 일본의 불멸을 믿고, 전력을 다해 국체의 정화를 펼쳐라”라고 끝맺었다. 천황의 머리에는 “국체” 다시 말해서 천황제, 결국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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